2021년 12월 17일 금요일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탕자의 비유

 

성 경: [15:11-16]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5: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사복음서 중 오직 본서에만 기록된

'탕자의 비유'는 앞의 두 비유와 마찬가지로 죄인을 찾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비유는 세부 묘사가 매우 생생하며

당시의 관습과 법적인 절차를 반영하고 있으며

영적인 감동과 충격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이 비유의 첫 번째 부분(11-24)은 앞의 두 비유와 같이

잃었던 것을 다시 찾는데 대한 기쁨을 말하고 있으며,

 

두 번째 부분(25-32)은 대조적으로 맏아들의 냉혹한 태도를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앞부분은

하나님이 인생의 죄악을 사하기 원하시되 신속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사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어 뒷부분은

이기적 탐욕으로 가득한 입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를 오히려

비방하는 자들의 왜곡된 모습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두 비유가 일명 '돌아온 탕자의 비유'로 잘 알려져 있지만,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여기 등장하는

두 아들 모두가 소위 '잃어버린' 자들이라 할 수 있다.

 

호색과 방탕으로 가진 소유를 깡그리 탕진 하고서

아버지께 돌아온 탕자가 하나님을 모르고 방황하는

모든 죄인들을 상징함은 분명한 사실이거니와,

큰 아들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있다는 점에서 '잃어버린 자'였던 것이다.

 

 

[15: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둘째가 - 서리나 죄인(1) 또는 이방인과 같이 뒤늦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얻게 된 자,

혹은 사회적으로 억압당하던 천민계층을 상징한다고 봄이 무난하겠다.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 이러한 요구는 둘째 아들이

21:17에 나오는 재산 상속의 율법을 잘 알고 있음을 나타낸다.

 

(21:17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21:17에는 재산 상속시

장자에게 전 재산의 2/3,

차자에게 1/3을 나누어 줄 것을 규정하고 있다.

 

(21:17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그런데 둘째 아들의 이 같은 요구는 사실상 관례에 어긋난 것이었다.

왜냐하면 재산의 상속은

아버지의 임종(臨終)이 임박할 때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식에게 정식으로 재산을 상속해 주기 전까지는

적당한 재산을 선물로 주곤 했다.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 작은 아들이 자기 몫을 완전히 물려받았고

큰 아들도 역시 자신의 몫을 양도받은 것 같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사용권이 여전히 아버지에게 있는 그의 재산을

아버지의 동의 없이도 마음대로 처분한 것에 반해서

큰 아들은

그 사용권을 여전히 아버지에게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유대에서는 만일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 재산을 물려받았을 경우

상속자는 이를 자신의 임의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만일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 상속자가 그 재산으로 장사를 해서

이익금을 남겼다 해도 그 이익들을 임의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돌려야 했다(Jeremias,Parabes of Jesus,P.128-29).

 

 

[15: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 '모아 가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쉬나고'에는

'거두어 들이다'의 뜻 외에도 '헌금으로 바꾼다'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보기도 한다(Greed).

 

이러한 둘째의 태도로 보아

그는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 일엔 전혀 관심이 없고

오히려 큰 도시에 나가 장사와 같은 업종에 종사하려고 했던 것 같다.


허랑방탕하여 - NIV에는 '거친 삶을 사는 것'(wild living)이라 표현한다.

 

한편 여기서 그가 먼 나라로 떠난 것은

그가 얼마나 부모의 품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살고 싶어 했는지를

또한 그 계획이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임을 잘 나타내 준다.

 

뿐만 아니라 그 재산을 모두 허랑 방탕한 생활에 소비해 버린 것은

그가 계획한 모든 생각들이 육적인 쾌락을 향해 있었음을 증명해 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청운의 꿈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갔지만

그곳에서 세상의 온갖 유혹을 받아 타락했다고도 볼 수 있다.

 

어쨌든 아버지의 집을 떠난 그는

걷잡을 수 없는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종국에는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15: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궁핍한지라 - 방탕한 아들에게는

 

(1) 가진 모든 재산을 허비하고

(2)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기근까지 겹치는 어려움이 몰려왔다.

 

그런데 그 기근은 단지 한 지역에만 국한 되었던 것이 아니고

그가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찾아왔던 그 나라 전체를 엄습했다.

 

이제까지 부족함이 없이 온갖 즐거움과 자유를 누렸던 그는

'비로소' 궁핍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에게 닥친 이러한 어려움은 그로 하여금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하는

기회가 되었고 아버지의 집이 참 행복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였으며

아버지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돌리도록 결단하게 만드는 동인(動因)이 되었다.

 

성도가 하나님이 정해주신 구역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함은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음과 같다.

 

(16: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15: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 나라 - 유대 민족은 팔레스틴에 약 50만 명 정도만 남아 있었고

4백만 명 정도가 디아스포라(Diaspora)의 삶(유대땅)을 떠나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의 생활)을 살았다고 한다.

 

이 먼 나라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이집트 혹은 이디오피아 등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니며

확실한 것은 적어도 유대 밖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붙여 사니 - 이는 '더부살이하다'는 의미로 그의 밑바닥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유대인들은 예로부터 동족은 종으로 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족속의 종이 되는 것을 가장 큰 수치로 여겼다.

 

만약에 동족 중에서 그가 진 빚이나 형벌로 인해서

종으로 부리게 된다고 하더라도 유대인에게는 50년 마다

모든 노예를 무조건 해방하는 것을 정한

희년(禧年)의 규정이 있었다.

 

(25:54 그가 이같이 속량되지 못하면 희년에 이르러는 그와 그의 자녀가 자유하리니).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간섭을 벗어나 제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먼 이국땅으로 떠나갔지만 결국 종살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우리 신앙생활 증에서도 혼히 체험되는 바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요구되는

삶의 질서와 법도를 때로는 무시하며 거역함으로써

소위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해보지만,

결국에는 세상과 죄악의 속박에 얽매여 마치 노예와도 같은

부자유스러운 상태에서 고뇌하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과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 붙잡힌 바 됨으로써만 오히려 가능하다,

왜냐하면 오직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겠기 때문이다.

 

(8:22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돼지는 불결한 짐승 중의 하나이다.

 

(11:7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14:8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런 것의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그 사체도 만지지 말 것이니라).

 

따라서 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도 않을뿐더러

돼지를 치는 것조차 꺼려하며 천시하였다.

 

 

[15: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쥐엄 열매 - 이 열매는 동부 지중해 연안에서 볼 수 있는 상록

교목(喬木)인 구주 콩나무(carob tree)의 열매를 가리킨다.

 

구주 콩나무에는 8-30cm정도 되는 꼬투리가 맺히는데

그 안에는 5-15개의 열매가 들어있다.

 

혼히 이것은 침례 요한의 떡(St.John's bread)이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광야에서 살았던 침례 요한이 쥐엄 열매를 먹었다는 일설 때문이었다.

 

(3: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1: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이 열매의 맛은 약간 단데 주로 가축의 사료로 사용되며

때로는 기근 시에 가난한 사람들의 식량으로 대용되기도 했다.


배를 채우고자 하되 - 그가 배고픔을 채우지 못했음과 아울러

그 상태가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었음을 가리킨다.

그는 임금으로 기본적인 생계 문제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액수를 받았는데 물론 최저 생계비 조차도 보장받지 못하는

그러한 상황은 그 나라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상황은 오늘날의 저임금 노동자의 그것과 유사하다.


주는 자가 없는지라 - 그가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민심은 그로부터 돌아섰다.

결국 이 말은 그가 모든 사람에게 따돌림을 받게 되어

실제적으로 배고품으로 인한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을 겪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그가 한 때 돈을 뿌리며 호의호식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몰려들어 함께 먹고 마시며 즐겼을 것이다.

 

그러나 가진 소유를 깡그리 탕진한 지금에 이르러

그는 모든 사람들로 부터 비웃음과 조소(嘲笑)를 받았으며

완전히 소외된 자(outcast)가 되었다.

 

한 사람도 그에게 동물에게 먹일 사료조차 주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그 나라가 극심한 흉년이 들었음을 말함과 아울러

굶어 죽어가는 그에게 어느 누구도 동정을 베풀지 않은 극단적인 상황을 암시한다.

 

굶주림과 철저한 고독이라고 하는 상황은 인간이 절대자를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인식하게 되는 기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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