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은 양의 비유 2
성 경: [눅 15:4-7]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 이 비유에서 등장하는 목장 주인은 그리 큰 부자는 아니다. 아라비아 유목민(遊牧民)의 목축 규모는 대개 20내지 200수 정도이다.
유대법에서는 보통 300수 정도를 쳐야 대규모 목축에 속했다.
비유에 나오는 이 사람은 몸소 양을 칠 형편이지
품꾼을 사서 거느릴 정도로 넉넉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한편 여기서 등장하고 있는 양 일백 마리에 대해선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하나님 곁에 안연히 거하고 있는 성도들을 지칭한다고 봄이 무난할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초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백 마리의 양이 아니라
잃은 양 한 마리이다.
▶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 팔레스틴의 목초지는 대부분 팔레스틴 남북을 잇는
중앙 고원 지대에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 고지는 해발 평균이 5백 미터나 되기 때문에
일단 양이 목자를 떠나 길을 잃어버리면 사고를 당하기 쉽다.
그래서 팔레스틴의 목자(牧者)들은 서너명이 한 조가 되어 양떼를 보호했다.
이들은 저녁이 되어 양떼를 우리(fold)로 몰아넣을 때
잃어버린 양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양떼를 세어보았는데
만일 단 한 마리의 양이라도 없을 경우 목자는 그 양을 찾아
온 지역을 찾아 다녔다.
한편 '잃다'라는 표현에 대해서
마태는
양 스스로가 양떼로부터 '벗어나다'의 의미인 '플라나오'라는 말을 사용하여,
잃은 양 한 마리는 복음의 진리를
스스로 거부한 자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에 누가는'파멸하다'의 뜻인 '아폴뤼미를 사용하여
양이 '고의' 혹은 '악의'로 양떼를 떠나 사악한 길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양이 연약하고, 무지하며, 미련하여 양떼들과 함께
올바로 목자를 따라가지 못했음을 암시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본문의 잃어버린 양은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 방황하고 있는 죄인들을 나타낸다.
▶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 예수께서 잃은 백성을
다시 찾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고 하는 것은
누가복음에서 나타난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이다.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마 23:15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한 사람의 개종자(conyert)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닌다고 하였는데
이들의 열심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시키기 위함이 아니고
자기들의 종파를 열렬히 신봉할 지지자를 얻기 위함이었다.
(마 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그러나 목자 되신 예수께서 양을 찾으시는 것은
그 양의 경제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길을 잃고 위험에 처한 양을 구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가려고 하지만,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는
이 양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이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눅 15: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 즐거워 - 이는 만족으로 인한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기쁨이 넘쳐서 노래라도 부르며 춤을 덩실덩실 추고 싶을 정도로
홍분이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본문은 죄인 하나가 참으로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이와 같은 것임을 암시한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바닷가의 모래알 처럼 미미(微微)한 존재인 인생들을,
하나님이 이렇듯 깊은 관심과 애정의 대상으로 삼아주신 것은
오직 당신의 주권적 은혜라 하겠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 받은 성도의 존귀와 영광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다.
스바냐는 성도들올 향한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이렇게 노래했다.
(습 3:17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 어깨에 메고 - 목자의 말을 듣지 않고 제 길로 나아간 양이라고 하더라도
'찾은 양'은 그에게 크나큰 기쁨이 되었으며,
온 세상을 정복하고 돌아오는 승리자의 깃발과도 같이
온 동네에 내보이고 싶은 자랑거리와도 같은 것이다.
복음 전도자의 열심과 수고로 얻게 된 성도들도
그 사역자의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이 된다.
(빌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살전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눅 15: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 나와 함께 즐기자 - 잃은 것 즉,
양, 은전, 아들을 찾았을 때
이웃들을 불러 모아 함께 즐긴다고 하는 이 기쁨의 잔치는
본장에 나오는 세 비유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내용이다.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비유들의 정점은 잃은 것을 도로 찾은 것보다도
찾은 이후에 이웃과 함께 공동의 향연(饗宴)을 즐긴다고 하는 것에 있다.
향연을 베풂으로써 개인의 기쁨은 공동체에게로 나아가고
함께 걱정했던 이웃들의 노고에 보답하게 된다.
이렇듯 하나님 나라에서도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은
그리스도만의 기쁨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 나라 전체에 큰 기쁨이 된다.
[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 이 말은 백 마리 양이 모두 귀하지만
잃어버렸다가 찾은 양은 더 각별한 관심의 대상임을 의미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즉 탕자 비유에서,
큰 아들은 계속 아버지의 집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탕자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 수많은 고생을 겪었으므로
동정과 긍휼이 그에게 더 쏠렸다는 것이다.
(31-32절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실 성도들은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순서에 있어서는
다소간 차이가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잃어버린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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