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성 경: [눅 16:19-23]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눅 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
이 부자는 왕같이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의 의복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이었는데
자색 옷은 당시 왕이나 귀족들만이 입던 매우 비싼 옷이었으며
고운 베옷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두 배나 더 비쌌다.
또한 그는 매일 잔치를 벌여 세상 연락을 즐기는 생활을 하였다.
사실 부자가 누리는 부(富) 자체가 죄일 수는 없다.
다만 넘치는 부를 누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위에 있는 가난한 거지 나사로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데에 부자의 잘못이 있다.
일반적으로 부자는 자신의 부귀가
스스로의 뛰어난 노력에 대한 대가로 주어진 것이라 믿으며
가난한 자들의 가난을 무능과 게으른 탓이라고 돌려버리기 쉽다.
따라서 부자는 점점 더 특권 의식과 교만에 사로잡히게 된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고 경계하신 예수의 말씀은,
(18: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재물의 강한 부정적 흡인력을 경계하신 것이기도 하지만
부자들의 이러한 냉정성(冷情性)을 염두에 두신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눅 16: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 나사로 - 이는 히브리어 '엘리에셀'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라는 뜻이다.
예수의 비유들 속에서 등장인물에 이름을 붙인 경우는 이곳 한 군데 뿐이다.
이는 가난한 사람의 경건을 암시하기도 하나
그가 지금은 고통 중에 있으나
죽은 후에는 평안을 누리게 됨을 암시하기도 한다.
한편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종의 이름과 일치하는가 하면,
나사로는 요 11장에 나오는 인물 마르다, 마리아의 오라버니요,
예수께서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린 자의 이름과 같다.
▶ 헌데를 앓으며 - 나사로는 몸도 꼼짝할 수 없는
불구자(에베블레토. '던져져 있는')이며 피부병을 앓는, 거지이다.
그의 병이 '궤양' 혹은 '종기'라고도 하지만 문둥병이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나사로가 문둥병 환자라고 한다면
그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함께 살 수 없었을 것이다.
▶ 대문 - 보통의 대문과는 달리 장식이 된 높은 솟을 대문과 같은 것으로서
그 부자의 집의 호화스러움과 사치를 엿볼 수 있는 말이다.
[눅 16: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 대개의 유대인들의 경우
일단 그릇에서 바닥에 떨어진 빵조각은
먹어서는 안 되며 도로 접시에 담지도 않는데
이는 전염병을 염려해서 생긴 습관이다.
오히려 그들은 찌꺼기를 식탁 아래로 버린다(S.Kraub).
여기서 '떨어지는 것'이라는 말은 '던져지다'의 의미이다.
즉 부자의 식탁에 앉은 자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음식을 땅 바닥에 던진 것을 뜻한다.
▶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 여기서 개란 사람들이 집 안에서 기르는
개인 '퀴나리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납게 거리를 쏘다니는 개의 뜻인 '퀴온'이다.
이러한 개에게 시달리는 사람이란
고대 유대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사상에 의하면
하나님에 의해 벌을 받고 있는 죄인을 의미한다.
리펠드(Liefeld)에 의하면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는 것은
나사로가 '개'에게까지 모욕을 당한 것을 뜻한다고 한다.
한편 몇몇 학자들은(Vincent, Geldenhuys, Alford),
개들만이 나사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의 헌데를 핥아주었다고 해석한다.
[눅 16: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 천사들에게 받들려 - 성도들의 삶을 보호하고 인도할 뿐만 아니라
사후에는 그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천사의 역할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행 27:23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히 1:14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한편 후기 유대교 사상에 의하면
의로운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을 선한 천사들이 받들어 모셔가고,
악한 자가 죽으면 악귀들이 데려간다고 한다.
아마도 성대한 장례식이 있었을 부자의 죽음과는 달리
거지인 나사로는 장례식도 없이 공동묘지와 같은 곳에 버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그들의 영혼이 도달하게 된 장소는 전혀 반대였다.
▶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 '아브라함의 품'은 낙원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며,
(막 12:26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행 7:32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으로서 낙원에 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약 2: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본문은 간접적이나마 사후의 중간 상태에 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부분이다.
인간이 죽은 후 머무는 처소에 대하여
성경이 결정적인 확증을 주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성경 여러 곳의 종합적 고찰을 통해
대략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수 있다.
(단 7: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마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롬 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고전 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즉, 사후에
인간의 육체는 무덤에서 부패하나,
영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 상태인 낙원과 음부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영은 낙원에,
불신자들의 영혼은 음부에 가는데
낙원은 이 세상에 비해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곳인 반면,
음부는 이 세상에 비해 고통스러운 곳이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도래할 완전한 천국과 지옥에 비하면
그야말로 그림자에 불과하다.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고후 12: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6:9-11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7:9-10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눅 16:23]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 고통 중에 - 24절에는 그가 '불꽃'가운데서 고통당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지옥의 상태가 종종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당하는 고통 상태로 묘사된다.
(막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불로 인해 당하는 고통이 문자 그대로인지,
아니면 상징적인 것인지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본 구절에서는 거지 나사로의 축복된 모습과 비교해 볼 때
철저한 결핍과 소외의 상태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즉, 의인들이 풍성하고 사랑 가득한 교제의 축복을 누리는데 반해,
악인들은 그 마음속에 있는 엄청난 탐욕과는 정반대로
결핍 가운데서 목말라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 부자의 돈을 매개로 찾아든
수많은 사람들의 아첨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말자
더 큰 결핍과 소외에 직면케 된 것이다.
▶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 예레미야스(Jeremias)는
말하기를
'의인들과 악인들이 저 세상에서 서로 마주 본다고 하는 것은 후기 유대교에 잘 알려진 표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13:28에 의하면 저주받은 자들이 축복받은 사람을 볼 수 있는 것은
최후심판 이후에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3: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따라서 여기서 예수께서는
장차 지옥에서 당할 끔찍한 고통의 장면을
어느 정도 앞당겨 보여줌으로써
경고의 뜻을 강조하고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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