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도에 관한 교훈
성 경: [눅 14:25-3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눅 14:2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 바리새인의 집에서 떠나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고 있으며 수많은 무리들은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
여기서 '허다한 무리'(오클로이 폴로이)는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상당히 많았음을 시사하며 아울러 예수의 인기가 대단하였음을 뜻한다.
하지만 그들 대다수는 예수께 현세적 축복을 갈구하는 무리들이었다.
혹자는 이 무리가 절기를 지키기 위해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자들 이었고(Farrar),
이들은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등극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따랐던 것이라고 한다(Plummer).
▶ 돌이키사 - 예수의 가르침이 시작될 때 많이 사용되는 용법이다.
(7:9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9: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10:23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2: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예수께서 이 시점에서 진행을 정지시키신 것은 무리들의
빗나간 기대에 제동을 걸어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눅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 미워하지 아니하면 - 예수에게 나아오는 것이 그의 부르심에 대한
일차적인 응답이라면 본 구절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보여야 할 이차적인 응답에 해당한다.
일차적인 응답으로부터 이차적인 응답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수행해야 할 하나의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의 모든 혈육과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문자적인 의미에서 심리적으로 미워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미워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세이'가
'조금사랑하다', '덜 사랑하다'의 뜻으로,
상대적으로 다른 것보다 덜 귀히 여기는 것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마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결국 예수의 말씀은 무리들이 당신을 따름에 있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예수의 뜻을 추종하려는 것인지를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즉 세상의 일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 중,
후자의 것에 궁극적(窮極的) 가치를 두지 않고 있다면
예수를 따르는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한편 누가는 마태가 기록하지 않고 있는
'형제자매' 및 '아내'와의 단절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 중 특히 '아내'에 관한 부분은
20절과의 관계에서 누가가 특별히 기록한 것이라고 본다(Marshall).
(20절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눅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자기 십자가를 지고 – 본 구절의 문구는 9:23에 표현된
진리를 부정적 형식으로 바꾼 것이다.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여기서 부정적인 형식으로 말씀하시는 까닭은
지금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십자가를 지는 것과는
거리가 먼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예수를 따르려는 자는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데
여기서 '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스타조'는
요19:17에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표현 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요19:17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예수께서 십자가지신 것처럼
그를 따르려는 자는 '누구나' 십자가를 져야 하며
당시에 죄수들이 자기의 십자가를 자신이 져야 했듯이
예수를 따르는 자도 자기의 십자가를 자기가 몸소 져야 하는 것이다.
[눅 14:28]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 망대 - 이는 13:4에도 언급되는데 그와 달리 여기서는
'농장 건물'을 뜻한다고 본다(A.G.Marshall).
이러한 건물을 지을 때는 기초 공사만 놓는데도 상당한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 먼저 앉아 - '앉아'(카디사스)는 정밀한 계산을 위해서
정좌하여 앉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
건축을 시작하기 전에 거기에 소요(所要)되는 비용을 철저히 계산하여
자기가 확보한 돈으로 건축을 시작해도 될지 잘 판단해야 하는 것처럼,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도
그 길은 결코 부귀영화를 누리는 길이 아니라
자기의 목숨까지도 희생해야 하는 길임을 알아
냉철한 판단에 의해 따르기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때 주께로 향한 뜨거운 열정을 보이던 사람이
얼마가지 않아 작은 시험조차 이기지 못해
쓰러지는 경우가 많음을 생각할 때,
이 말씀은 더욱 깊이 상고되어야 할 것이다.
[눅 14: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 아마 당시에는
치밀하고 완벽한 준비 없이 건축을 시작하여
기초만 쌓고 건축을 증단 하거나 또는 건축 중간에 비용이 없어
중단하는 미련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던 듯하다.
일설에 의하면 빌라도가 수도 공사를 진행시키던 중,
공사비 부족으로 중도에 공사를 중단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 비웃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엠피이제인'은
'놀림감'을 만들다', '조롱하다', '우습게 보다'의 뜻으로
어리석은 건축자가 당하게 될 부끄러움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따르겠다고 하고 신앙인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일에 있어서 실패자의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은 애초에 따르겠다고 나서지 않은 것만 못한 상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망신을 당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죄악조차 범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눅 14:30]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 이 사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 호 안드로포스'는
경멸적 또는 풍자적 용법으로서 '이 친구' 라는 뜻이다.
예수를 따르려는 자는
일시적인 충동이나 잘못된 비전(Vision)을 가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시작될 경우
마지막까지 십자가를 지는 참다운 제자가 될 것이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작의 귀중함은 결과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히 6: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눅 14: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 싸우러 갈 때에 - 정확한 판단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같은 주제의 비유가 연속하여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앞의 비유처럼 '너희 중에'라는 서두가 없는데,
이는 거기에 있던 무리 가운데 왕이 없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는 수많은 생명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인 만큼
더욱 정확한 판단이 요구된다.
▶ 헤아리지 – 만 명을 거느린 임금이 이 만명을 이끌고
공격해오는 적을 맞아 싸우게 되었을 때
승산이 있는지의 여부를 빨리 판단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조속히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집단 몰사할 가능성이 많겠기 때문이다.
적군의 숫자가 아군에 비해 두 배나 많은 것으로
언급된 사실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살아가는 일이
마치 중과부적(衆寡不敵)과도 같은 상황처럼 어려움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로써만 감당 되어질 수 있다.
(히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눅 14:32]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 화친을 청할지니라 - 이는 순수한 전쟁의 상황에서 적용되는 것이지
선과 악의 싸움 또는 영적인 싸움에서 적과 타협하라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본 비유의 초점은 화친을 하고 안하고에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임하는 자의 냉철한 판단력에 맞춰져 있음에 유의하자.
[눅 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 27절의 구체화이자 두 비유의 결론으로서,
(27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30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32절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본문의 말씀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리들은 예수를 따르며 그의 제자가 되려고 결정할 때,
'모든 소유'를 버려야하는 상황마저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한 후에 냉철한 판단을 해야 한다.
결국 소유에 대한 집착은
제자가 되는 것,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18-20절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본문에서 '버리다'(아포타쎄타이)는 말은
사용되는 대상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데,
사람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작별 인사를 뜻하고,
사물에 대하여 사용될 때는 '포기하다', '버리다'의 의미가 된다.
특히 '아포타쎄타이'는 현재형으로서
그 '포기'가 지금 당장 결단해야 할 성질의 것임을 말해준다.
한편 본문에는 18:22의 부자 청년에게 주어진 명령과는 달리,
포기의 방법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
(18: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이것은 본문의 말씀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 후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무소유의 상태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에 대한 의식을 버리는 것,
또는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을 강조하는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을 마음대로 남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기에게 위임(委任)된 것이라고 여기는 청지기 정신을
가지라는 말씀으로 이해된다(Liefeld).
[눅 14: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 소금은 음식의 맛을 조절하는
양념으로 사용되었고
종교 의식상의 용도 곧,
소제와
(레 2:13 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너의 소제를 삼되)
번제의 예물 위에 뿌리는데도 사용되었다.
(겔 43:24 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
또 성전에 피우는 향의 성분 속에 소금이 들어갔으며,
(출 30: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새로 태어난 아기를 위해 의학적 목적으로 소금을 뿌리기도 했고,
방부제로 쓰기도 했다.
(겔 16;4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에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이중 특히 소금의 역할로 중요한 것은 맛을 내는 일이다.
본문도 이점을 중요시하고 있다.
그런데 소금이 그 맛을 잃는다는 표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 본래 이 말씀은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없듯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복음도
없어지거나 그 영향력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씀이 전승과정에서 제자들의 변절 가능성을
지적하는 말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G.Bertram).
(2) 가축의 똥을 연료로 땔 때 소금을 촉매제로 함께 섞어 사용했는데
일정한 시간이 경과한 후에는 소금의 촉매력이 없어져
화력이 떨어지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본다.
(3) 팔레스틴에서 만들어진 소금은 사해(死海)의 소금물을 증발시켜서 만든다.
그런데 사해의 물에는 염화나트륨 외에도 여러가지 성분이 있기 때문에
수분을 증발시키면 거기에는 소금과 광로석 및 찌꺼기가 남게 된다.
이 때 소금이 먼서 결정되므로 그것들을 모으면 순수한 소금이 되지만
쓴 맛을 내는 광로석을 소금으로 착각하여 채취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잘못 채취된 광로석의 표면에 묻어있던 염분이 용해되어 버리면
그것은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는 것이다(J.Tinsley, Marshall).
이 세 개의 해석 가운데 (3)의 해석이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 말씀을 앞의 말씀과 관련지어 이해할 때,
이는 소금도 그 맛으로 소금됨을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의 제자들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과 자기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것으로
참다운 제자 됨을 확인받을 수 있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눅 14:35]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버리느니라 - 소금이 땅과 거름에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왜냐하면 소금이 비료나 거름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부정과 긍정의 견해로 갈리기 때문이다.
(1) 부정하는 견해 - 팔레스틴에서 소금을 거름으로 사용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오히려 소금은 땅을 황폐하게 한다는 언급이 있을 뿐이다(Jeremias).
(2) 긍정하는 견해 - 현대 이집트에는 소금기 있는 흙을
비료로 사용한 증거가 있다(H.Gressmann).
소금은 잡초를 죽일 뿐만 아니라 땅속 깊은 곳에서
사해의 소금이 가지고 있는 칼슘 성분을 용해시켜
토양을 개량시키고 아울러 인분의 부패를 억제하늘 작용을 한다(E.Deatrick).
이러한 양 견해에 대해서
어느 것이 옳은지를 판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의 사실성 여부에 관계없이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즉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아무데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마태는 누가의 본문보다 더 강하고 경멸적(輕蔑的)인 표현인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밝힐 뿐이니라"로 서술하고 인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매우 의미있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
이제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던 무리들에게 필요한 말씀을 충분히 해주셨다.
(25절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이제 남은 것은 무리들이 예수의 말씀을 잘 이해하여 현명한 결단을 하는 일이다.
그 결단은 강요에 의한 것도
구걸에 의한 것도 아니요
다만 듣는 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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