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비유 2
성 경: [눅 15:17-24]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눅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 스스로 돌이켜 - 문자 그대로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의미로,
정신을 제대로 차린 것을 말한다.
KJV에 의하면 본래의 '자신에게로 돌아오다'(come to himself)이다.
이러한 표현은 '회개'에 대한 히브리적 사고를 나타내 주는 숙어이다.
(Jeremias, parables,P.130).
또한 이 표현은,
육신의 정욕에 이끌려 자행자지하는 삶은
자신의 존재를 상실케 함을 시사한다.
하나님을 떠난 삶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참된 자아를 상실한 삶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는 곧,
자기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 내 아버지에게는 - 그가 회개하게 된 동기는 배고픔이었으나
그가 되돌아가기를 원하였던 곳은 아버지에게로 였다.
'아버지에게로'의 길은 자신의 교만과 허랑방탕한 삶에 대한 회개의 길이며
앞으로의 자신의 삶을 아버지의 판단과 처분에 전적으로 맡기는
완전한 순종의 길임을 뜻한다.
▶ 양식이 풍족한 - 직역하면 '빵으로 둘러싸이다'이다.
이것은 양식이 남아돌아갈 정도로 가산이 넉넉함을 암시한다.
참으로 영원히 주리지 않게 될 음식은 하나님에게만 있다.
(암 8:11-1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눅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일 - '곧 출발하리라'는 표현이다.
이러한 말은 그의 '스스로 돌이킴'이 결연한 의지를 동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참된 회개란 마음의 변화에 따른 행동의 변화가 수반(隧伴)되어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감은 그가 회심한 이후에
최초로 취해진 의지의 결단이었다.
▶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 여기에서 '하늘'이란 하나님을 의미한다.
히브리인들은 종종 하나님 대신에 하늘이란 단어를 사용했었다.
이 아들이 지은 죄악은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겠으나
그는
(1) 아버지의 재산을 마음대로 다 탕진해 버렸다.
(2) 허랑 방탕한 삼을 살았다.
(3) 부정한 짐승과 접촉했다.
이러한 죄를 범하면서 그는 아버지에 대해
불효, 불순종, 불충, 불성실했다는 사실과 함께
그토록 자상하고 사랑이 많은 아버지를 주신 하나님께
범죄 했음을 겸손히 시인했다.
또한 본 구절은 사람에 대한 도리롤 이행하지 못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범죄 하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것을 교훈한다.
바울은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 했다.
(엡 6:1-3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한편 아버지와 하나님이 따로 언급되고는 있지만
이 비유에서 아버지가 한 행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하신 행동을
그려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과 유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시 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눅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 '감당치 못하다'라고 하는 말은
'알맞지 않다’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의미로
이 작은 아들은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더 이상 아들의 자격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패역된 죄를 저질렀음을 자책하고 있다.
자신의 행위에 의해 그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상실되었을 것으로 단정하였다.
그는 이미 상속분을 다 받았으므로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음식과 의복제공과 같은 것도 이제는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질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있다.
그러나 부자 관계란 어떤 인의적 계약이나 재물의 수수관계에 의해
깨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아들은 밉든 곱든 자기 아들이며,
그 역(逆)으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 품꾼의 하나 - 품꾼은 일시적인 기간만 고용되는 사람, 즉 날품팔이를 가리킨다.
따라서 그는 아버지의 아들로서도 그리고 종으로서도 들어가 살 수 없고
다만 일시적인 고용인으로서 날품팔이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 굽어진 관계의 회복이 아버지의 주도하에 이루어진다(K.H Rengstorf).
아버지의 주도적인 사랑(initiative love)은 다음과 같다.
(1) 아직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아들을 먼저 알아보았다는 사실을 미루어
그가 매일같이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먼 거리를 살펴보았음을 알 수 있다.
(2) 회개의 말을 듣기도 전에 힘들고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에
측은(側隱)한 마음을 느끼게 된다.
'측은히 여기다'란 도와주지 않으면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아들의 참회고백 이전에 아버지의 불쌍히 여기는 느낌이 선행한다.
(3) 나이 많은 동양인의 경우 아무리 급할 때에라도
달려 나가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이 비유의 아버지는
그 자신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Jeremias) 행동하고 있다.
이는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그분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이다.
또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달려갔음은 아버지의 용서 행위가
아들의 사죄 행위보다 우선한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하나님께 천천히 다가가지만
회개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급히 달려 오셔서 그의 은혜를 베푸신다.
(4) 입맞춤은 삼하 14:33에 의하면 아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서를 뜻한다.
(삼하 14:33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에게 아뢰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그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그에게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
또한 '입맞추니'의 뜻인 '카테필레센'은 많은 입맞춤 즉,
여러 번 거듭한 입맞춤으로, 단 한 번의 의례적 인사와는 달리
돌아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기쁨을 그대로 드러내는 행위이다.
죄를 자백하고 벌을 받으려고 돌아온 아들에 대한
끝없는 용서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눅 15: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 여러 고본(古本)들에는
19절의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이 아들은 마음속에 깊이 각오한 회개와 겸비의 뜻을
그대로 아버지 에게 고하고 있다.
아마 그는 자신을 보고 기쁨에 겨워 입 맞추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용서의 뜻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감히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면목이 없음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돌아온 아들을 무조건 적으로 용서하는 아버지의 사랑과
지나간 잘못을 철저히 뉘우치는 아들의 겸비함이
함께 어우러진 이 장면은 뜨거운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 제일 좋은 옷 -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품꾼이 아니라 극빈처럼 대우하였는데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바로가 하사한 물품과 같은 것들이 지급되었다.
(창 41:42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제일 좋은 옷이란 문자적으로 그 집에 있는 첫 번째의 옷이다.
제일 좋은 옷은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큰 영예를 의미한다.
그 당시에는 훈장(勳章)이 없었을 시기였으므로
왕이 공로가 많은 신하를 포상할 때 귀중한 옷을 하사했다.
따라서 아버지의 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혔다고 하는 것은
아들의 죄를 탕감해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가 여전히 유효한 것임을 공표하는 행위였다.
▶ 가락지를 끼우고 - 가락지는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인장 반지와 같은 것으로서 이를 아들에게 주었다고 하는 것은
곧 자신의 권한을 아들에게 위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재산을 아들들에게 모두 이어준 아버지가 이제 가지고 있는 권한은
맏아들의 재산에 대한 사용권 뿐이다.
따라서 첫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불만을 토로한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됨직하다.
(29-30절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엄밀한 이해타산으로 따지면 그의 아우는
이제 가산(家産)에 대한 아무런 권한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 신을 신기라 - 신을 신는다고 하는 것은
그가 자유인의 권리를 회복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당시에 종들은 맨발로 다녔다.
먼 나라에 가서는 다른 사람의 머슴의 신세였던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와서는 다시 자유인으로서 살게 되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반드시
죄에게 종노릇을 하게 되는 반면에
하나님 안에서는 완전한 자유자가 됨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옷, 가락지, 신)는
필요성 때문에 제공된 것이라기보다는
아들을 존귀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Plummer).
[눅 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 살진 송아지를 - 헬라어 원문에는 송아지라는 단어 앞에
관사'톤'이 붙어있어서 그 송아지가 바로 준비해 둔 송아지임을 나타낸다.
당시 유대인들은 귀한 손님이 올 경우와 같은 특별한 때에는
자신이 키우던 짐승들 가운데 가장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손님을 대접하였다.
▶ 잡으라 - 고대 교부들(Irenaeus,Augustine,Jerome) 중에는
이 송아지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 구절의 핵심은 앞서 언급한 상징적인 의미보다는
죄인이 회개하여 돌아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더없이 기뻐하신다는 사실에 있다.
(시 51:16-17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눅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아들 편에서의 영적 죽음과 부활을 뜻하고,
'잃었다가 다시 얻음'은 아버지 편에서의 아들과의 분리와 재결합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엡 2:1과 요일 3:4에 의하면
'허물과 죄로 죽은' 삶을 뜻한다.
(엡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요일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이러한 인간의 죄악 된 죽음의 상태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은총에 의해서만 온전히 회복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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