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2
성 경: [눅 16:24-31]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 16: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신앙의 조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를 가리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요 8: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이 부자 역시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유대인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부자는 아브라함의 자손 됨을 자랑하는 바리새인들처럼
혈통적 특권에 의지하여 긍횰을 얻기를 간구한다.
(마 3: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 21절에서의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이라는 표현과 대조가 된다.
후기 유대 사상에 의하면 의인들이 있는 곳에는 생수가 흐르고 있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상태가
저 세상에서는 완전히 뒤바뀌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 괴로워하나이다 - 이 말은 '고통', '근심', '비탄'의 뜻인
'오뒤네'에서 온 것으로,
고통으로 인해서 울부짖지 않을 수 없는 극심한 상태를 나타낸다.
이는 육체적 고통을 의미할 수도 있으나
영적 절망과 소외감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다.
[눅 16: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 얘 - 일반적으로 부모가 자녀를 부르는 호칭으로
남자 아이일 경우 '아들아'하는 말이며
여자 아이일 경우 '딸아'라는 말과 같다.
아브라함은 그를 '아들아'라고 부름으로써 그 자손 됨을 시인(是認)하였지만,
다음에 나오는 구절의 내용으로 보아 자신의 자손 즉 선택된 민족이라고 하는
유대인만의 특권이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가치로는 인정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 - 부자가 받은
'좋은 것'은 자신의 재물로 누린 안락인 반면,
나사로는 자신의 잘못에 의해서 받은 고난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나사로가 사회의 구조적인 악 또는 가난 등에 의해서
바리새인들로부터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라는 정죄를 받았던
세리와 창기들과 같은 자였음을 암시한다.
▶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 '위로를 받고'의 원어 '파라칼레오'는
'옆으로 혹은 자기가 있는 쪽으로 부르다'의 뜻이 있다.
이는 고통이나 슬픔을 당한 사람 옆에서
그를 격려, 고무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의미한다.
한편 본 구절이,
지상에서의 부유함이 저 세상에서는 고난을,
지상에서의 가난함이 저 세상에서는 위로를 받는다는
단순한 인과 응보론적 논리를 가르치거나
부는 지옥을, 가난은 낙원을 예비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탐욕과 이기심과 허영을 위해
자기 자신의 재물을 사용하는 사람보다는
가난하여 다른 사람을 돕지는 못했으나
그의 이름 '나사로'(하나님의 도우시는 자)에서 그 경건성을 추측할 수 있는
거지가 더욱더 하나님의 나라에 어울리는 자라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스탤톤(Stanton)에 의하면
'그 부자는 재물만을 사랑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무관심한 죄 때문에 정죄 받았다'고 한다.
즉 여기서 무조건 정죄되고 있는 것은
바로 재물의 남용, 과소비와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무관심과 외면이다.
이 비유는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이웃을 향하여 나타내었던
냉혹한 태도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눅 16: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 정확한 의미는
'큰 구렁텅이가 영원히 고정되어 있어서'이다.
'큰 구렁'의 원어 '카스마아는 '벌어진 틈'을 가리킨다.
이 큰 구렁은 팔레스틴의 사막지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형으로서
장마철 외에는 전혀 물이 없는 골짜기를 지칭하는 말인
'와디'나 '협곡'을 가리킨다.
이 큰 구렁에 대한 아브라함의 언급은
하나님의 결정이 결코 변경될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이는
(1) 이 땅에서는 회개할 기회가 있지만
죽고 나면 더 이상 그 같은 기회가 없게 된다는 것과
(2) 죽음에 의해 결정된 각자의 처소는
어느 누구의 권세의 능력으로도 변경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톨릭에서는 '연옥'(purgatory)이란 교리를 만들어
지상이 있는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들이 연옥에 가있는 자를 위해
미사나 헌금, 각종 교회 봉사를 행할 때
그는 점차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김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이는 성경에 위배되는 거짓된 사상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벧전 3:18-20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눅 16: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 유대인들 중에는
죽은 사람을 통해서(물론 그 방법은 꿈이든지 환상일 수 있다)
산 사람들에게 전갈을 보낼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그 예를 구약의 사울이
엔돌에서 죽은 사무엘을 만나본 사실에서 제시하기도 한다.
(삼상 28:8-19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서는 사울이 이르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하니
9)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사울이 행한 일 곧 그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음을 아나니 네가 어찌하여 내 생명에 올무를 놓아 나를 죽게 하려느냐 하는지라
10) 사울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이 일로는 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1) 여인이 이르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 하니 사울이 이르되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하는지라
12)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13)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하는지라
14)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하니 그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더라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15)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하더라
16)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17)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18)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19)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
그러나 사람이 죽게 되면
그 영혼은 즉시 지상의 세계와 다른 차원의 영적 세계로 옮겨지고
지상의 세계와 교통하지 못한다고 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 볼 때,
(19-31절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사울의 경우는 사단의 기만에 속은 예 였다.
한편 여기서 부자는
나사로를 여전히 그의 종 정도로 생각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현세에서의 신분 차이가
저 세상에서도 여전히 효력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하는 말이다.
[눅 16: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 증거하게 하여 - '증거하다'의 헬라어 '디아마르튀로마이'는
'자세하게 모든 것을 증언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확언이나 맹세 또는 경고 등을 의미한다.
이는 죽고 나서 음부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심판의 엄정함과 무서움을 깨닫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가 가족에게만 나사로를 보내주도록 요청한 것은
여전히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음을 나타낸다.
[눅 16: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 '들을지니라'의 원어 '아쿠오'는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이해하는 것,
더 나아가서는 들은 바대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구절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은
그들의 말씀을 듣고 암송할 뿐만 아니라, 그대로 행하라고 하는 의미이다.
한편 부자는 나사로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
그의 다섯 형제에게 나타난다면 그들이 나사로를
하나님의 사자로서 확실히 믿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야 할 의무를 끊임없이 강조한
모세와 선지자들을 그들이 믿지 않는다면
그들은 설령 죽었다 살아난 자가 경험담을 이야기해준다고 해도
그것을 거짓으로 단정해 버리고 말 것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기적인 삶의 방식은 그 완악한 심령 가운데
이미 굳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의 말씀 가운데 들어있는 아이러니(irony)를 주목해 보라.
예수는 그가 죽음에서 다시 일어났을 때조차도
예루살렘의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이 이를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향한
그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셨다.
[눅 16: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 이 부자의 생각은
오늘날 일반인들의 생각과 같다.
즉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면
불신자들도 믿음을 지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기적 자체에만 연연하는 자는
그 기적이 드러내고자 하는 참된 진리에는 오히려 무관심하다.
더욱이 초자연적 기적이 계속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들은 곧 자신의 세속적인 삶으로 쉽게 복귀하고 만다.
[눅 16: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 아브라함은 이중의 폐단을 제시하며 부자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하나는 현재적 사실로 그들이 현재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글에서 지시하는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
또 하나는 미래의 가능성,
즉 요11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죽음에서 부활한 나사로를 보고서도 회개치 않은 것처럼,
누군가가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맡겨진 재물을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사용하는
참 신앙적인 삶을 살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 말은 이 비유뿐만 아니라 본장 전체의 결론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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