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4일 토요일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구원에 이르는 길 2

 

성 경: [13:26-30]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13: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 문 밖에서

거절당한 무리들은 예수와 안면이 있음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유대인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와 친분이 있다는 것으로 구원을 보장받으려 하고 있으나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분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첫째로, 그들이 제시한 사항은 "주 앞에서 먹고 마셨다"는 것이다.

유대 사회에서는 함께 식사하는 것을 친밀한 교제의 표현으로 여겼다.

하지만 본 구절의 무리들은 형식적으로 예수와 함께 식사한 적이 있을지 모르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내밀한 교제를 나눈 것 같지는 않다.

 

둘째로, 그들이 제시한 것은 주께서 그들을 가르치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응답(應答)한 흔적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과 예수 사이에는 아무런 인격적 친분도 없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한편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고

귀신을 쫓아냈으며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주장한다.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러나 그런 것 조차도 구원을 보증해주는데 아무런 효과를 발생시키지 못한다.

하물며 본문의 조건들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3:27]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 무리들은 자신들과 예수 사이를

매개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항들을 열거하였지만

그들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단호한 대답은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는 것이다.

 

이 대답은 25절에 이어 반복 되면서

그들이 당하는 외면을 더 비극적로 강화시키고 있다.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 이 말씀은 예수께서 그들을 거부하는 이유를

제시하는 것으로 시 6:8의 인용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행악'(아디키아)'불의', '악행'을 뜻하며, 누가만의 독특한 표현이다.

 

(16:8-9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18: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1: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8: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이는 누가가 '불의'를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 파악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나를 떠나 가라 - 단순히 알지 못한다는 차원을 넘어 여기서는 완전한 분리를 선언하고 있다.

 

마태의 경우에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범죄자를 추방(追放)할 때 사용하는

관용적 표현인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는 표현을 썼다.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13: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민(the chosen people)의식을 철폐시키는 말씀으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기대 즉,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서

열조들과 함께 하리라는 기대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29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세 명의 선조들을 천국 잔치에서 언급을 한 것은,

마태복음의 평행 본문과 일치하나,

 

(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선지자'에 대한 언급은 누가만의 기록이다.

그러나 '선지자'에 대한 언급이 의미는 아니다.

선지자와 선지자를 거역한 백성들의 대조는 이미 앞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11:47-51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49)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50)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슬피 울며 이를 갊이 - '슬피 울며'는 위로할 길 없는 비참과

영원한 절망에 대한 울음이며(Hendriksen),

 

'이를 갊'은 증오에 떠는 몸부림이다.

 

결국 본문이 표현하는 그들의 상태는

'절망적 후회'의 차원을 넘어 주를 향한 강한 적대감까지 표시하는

최악의 상태임을 알 수 있다.

 

 

[13:29]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 이 장면은 구약성경과

유대교의 여러 문헌에서 이야기 해왔던 하늘에서의 잔치를 묘사한 것이다.

 

(49:12 어떤 사람은 먼 곳에서, 어떤 사람은 북쪽과 서쪽에서, 어떤 사람은 시님 땅에서 오리라).

 

이 잔치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궁극적으로 실현될

그리스도와 성도간의 혼인잔치를 뜻한다.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동서남북''전 세계'를 뜻하는 표현이며,

 

(59: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8:7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참여하리니'는 만찬 석상에서 비스듬히 누워

음식 먹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을 서술한 것이다.

 

본래 그 자리에 참여하도록 되어 있는 유대인들은 밖에 쫓겨남을 당하고

그 자리에 참여할 수 없다고 여겨져 왔던 이방인들이 유대인을 대신하여

참여한다는 것이 본문의 요지인데 이것에 관해서는 마태복음의 평행본문이

더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8:11-12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 - '좁은 문'의 비유는 이 말씀으로 결론에 이른다.

 

'나중 됨과 먼저 됨'의 처음 순서가 뒤바뀔 수도 있다는 말씀인데,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1) 지옥에서의 고통이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12:47-48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광도 차이가 있는데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천국에서의 등급이 뒤 바뀔 수 있다는 뜻으로 본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천국과 지옥에 갈 자가 뒤 바뀌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의 등급이 바뀐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2) 이 세상에서의 명성이 곧 하늘에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뀔 수도 있다(Hendrikson).

 

(3) 현재 억압당하고 희망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자신들만 합당하다고 여기는 교만한 사람들은 거부당한다는 의미로 본다. (Marshall).

(1:51-53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4) 먼저 선택받은 선민으로서의 유대인들은 교만과 불신으로 인해

구원받지 못하고, 멸시받던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로 본다(Yyndale).

 

이 가운데서 네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여기서 확인되어야 하는 것은 본문을 유대인과 이방인이

전체 집단으로서 뒤바뀐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유대인 모두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이방인 모두가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개인의 차원에서 바뀔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