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9일 일요일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탕자의 비유 2

 

성 경: [15:25-32]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15: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맏아들 - 죄인들에게 베풀어지는 사죄와 구원의 은총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전 유대인들을 상징한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율법에 충실한 자로서 행동하지만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몸과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맏아들의 이러한 위선적 태도는

작은 아들이 돌아온 사건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밭에 있다가 - 밭에서 일한 것이 꼭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서

행한 것이었으리라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이미 상속을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위해서 밭에서 일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 것이다.

 

이는 자신들의 교리와 율법을 지지할 신봉자(信奉者)를 얻기 위해

열심히 전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했다고 하는

바리새파 유대인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15: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무슨 일인가 물은대 - '묻다'의 뜻인 '에퓐다네토'는 미완료형로서

계속해서 묻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태도는 일종의 조사, 심문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의문점은 축하연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맏아들이 그 자리에 없었다고 하는 점이다.

 

이는 그 축하연이 너무나 빨리 진행되었기에

맏아들이 그 자리에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는 26-31절의 대화로 보건대 맏아들이 그 잔치에 없었다고 하는 것은

그의 가족과 그와의 관계가 다소 소원(疎遠)하였음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는 맏아들의 아버지 집에 대한 무관심과

아울러 동생에 대한 불만 심지어는 적개심까지도 암시한다.

 

(26-31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15: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다시 맞아들이게 됨 - '다시 얻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가족 전체의 축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말이다.

 

 

[15: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그가 노하여 - '분노하다'의 뜻인 '오르기조'

'콧구멍을 벌름거리다'에서 온 말이다.

이는 일시적으로 격양(激昻)된 감정에서 나온 화가 아니라

깊이 쌓인 분노와 노여움을 암시한다.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서 식사를 하며 예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에 대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원망하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맏아들의 이러한 노여움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여 하나님께

구원받게 됨에 대해 요나가 화를 내었던 것과 유사하며,

 

(4: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분노, 죄인들의 구원에 대해

스스로 의인인 체하는 자들의 노여움과 상통한다.

 

들어가기를 즐겨아니하거늘 - 문자적으로는 '기꺼이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의미로, 축하 잔치 자리에 들어가기를 거절했다는 뜻이다.

이는 동생의 돌아옴을 거부하는 행위를 나타낸다.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 아버지의 주도적인 사랑(initiative love)

또다시 보여주는 말이다.

 

20절에서 그랬듯이 집으로 들어오지 않는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다시한번 집에서 나왔다.

 

'권하다'(파라칼레오)는 말은 '옆에 서서'를 뜻하는

'파라''말하다'를 뜻하는 '칼레오'의 합성어로

옆에 서서 다정히 이야기하거나

또는 친절한 말을 건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여기서는 미완료형으로 사용되어

아버지의 권함이 계속되어졌음을 나타낸다.

 

아울러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어

유대인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계속 권고하심을 상징한다.

 

 

[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 잃었던 아들을 다시 얻은 기쁨으로 인해

잔치를 벌이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이러한 비난은

맏아들의 불만이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온 것임을 암시한다.

 

여기서 섬긴다고 하는 표현 '둘류오'

상전에 더한 종의 관계에서 사용되는 말로,

마치 종처럼 섬겼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식과

그 기쁨을 느끼지 못한 죄로

단순한 의무감에서 하나님을 섬겨왔음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신령한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일은 뒷전으로 미룬 채

단지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지키기에 급급하였다.

 

즉 율법의 수많은 조항들을 지키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

이를 이루는 것으로만 생각한 것을 의미한다.

 

3:9에 의하면 바울은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라고 하였었는데,

 

이는 자기 의를 내세우는 우월감과 자만심을 단적으로 지적해낸 말이다.

맏아들의 이러한 태도로 미루어 보건대,

내적(內的)으로는 오히려 그가 '잃어버린 아들' 에 해당한다 하겠다.


염소 새끼라도 주어 - 인과응보의 법칙을 적용하기를 주장하는 말이다.

이 염소 새끼는 살진 송아지에 비해 싼 것에 속했다.

 

큰 아들의 불만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그의 아버지가 작은 아들만 편애(偏愛)한다는 항변이다.

하지만 그는 두 아들 모두 한결같이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알지 못했으며,

불쌍한 처지에 놓인 아우에 대해 철저한 이해관계로만 반응하는 냉혈한이었다.

 

둘째로 그는 아버지가 공의에 어긋난 태도를 보인다고 항변했다.

이는 곧 그는 선하고 옳은 사람이며

아우는 정죄 받아 마땅한 악인이라고 하는

위선적 편견으로서 바리새적 교만을 상징한다.

 

한편 맏아들이 아버지의 전 재산을 상속하게 될 것을 깨닫지 못한 채,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염소나 송아지 한 마리로 인해 불평한 것은,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과

영적인 특권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눈앞의 현세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배타적 독선에 빠져 있었음을 암시한다.

 

 

[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이 아들 - 원문에 의하면 '당신의 아들'이다.

그는 돌아온 아들을 '동생'이라고 부를 것을 거절한다.

 

이는 자신과 동생과의 형제관계를 인정치 않으려는

강한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경멸적인 어투로서,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20: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7: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세리와 창기와 같은 사람들을

'죄인'(sinner)이라고 부른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러한 맏아들의 표현을 시정(是正)하여 '네 동생'이라고 하였다.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과 영적인 특권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던 것같이

맏아들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이 무엇인지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는 장자로서 아버지의 재산의 3분의 2를 상속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밖에 집의 가장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로서,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구원에 있어서 우선권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61:6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

 

이방인들을 구원에로 인도할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의무와 권리를 망각하고 있었다.

 

 

[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마땅하다 - 이 말은 '잔치를 베풀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아버지의 변명의 말이 아니라

'너는 반드시 환호하고 기뻐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하는

아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이다.

 

이는 죄인들이 예수께 가까이 나아오는 것을 원망하던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그 죄인들의 돌아옴을 기뻐해야 한다는 의미를 시사한다.

 

그리고 '마땅하다'의 뜻인 '에데이'는 미완료 시제로 필연성과

긴급성(the necessity and urgency)을 내포한다.

 

따라서 이 비유의 맏아들은 잔치에 참여해야 할 당위성을 갖고 있으며

더욱이 돌아온 동생을 뜨거운 가슴으로 맞아들이도록 요청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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