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30일 목요일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부자(富者)와 빈자(貧者)

 

누가복음 1619-31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먼저 눈을 감고서,

마음에 이 구절의 광경을 그려보십시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서 자랑하는 부자와,

피부는 상처 나서 헌데로 시달리고,

개가 와서 핥는다는 빈자.

 

미미가효(미효 side-dish)로 호사하며 즐기는 부자.

그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부양되려는 빈자.

그 대조가 실로 현저합니다.

 

그리고 부자의 씨명(氏名)을 올리지 않고,

도리어 빈자 나사로의 이름을 서명(기명)

그리스도의 태도야말로,

먼저 주의해야 할 한 가지 사실입니다.

 

특히, 그 양자의 구음을 말씀하심에 이르러서,

말씀, 간결하고 의미심장, 문장의 묘를 다하고 있습니다.

 

즉 빈자는 죽어 그 영이 곧 아브라함의 몸으로 보내지고,

부자는 죽어 그 유해 앞에 장려한 장의의식이 드려졌다고.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다만 이 일련구(a couplet)에 이미 만곡(무한 copiousness)의 맛이

담겨져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활화는 일전 합니다.

다만 일매의 흑막(black curtain)의 전후입니다마는,

이 세상과 내세와는 잘도 모든 것의 위치가

전도(upsetting)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빈자가 위로되고, 부자가 고통하며,

그 사이에는 커다란 심연이 있어서,

건널 수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현세와 내세와의 구별은 명확하게 묘사되어 있고,

광경의 급전,

실로 사람의 마음을 놀라게 합니다.

 

그리고 내세는 보통으로 생각되듯 무차별평등의 세계는 아닙니다.

다만 그 차별이 연유되는 표준이 다릅니다.

 

즉 사람의 눈으로 보는 계급은

()와 위계(位階)에 의해,

 

하나님의 눈에 나뉘는 계급은

순 도덕적 가치에 의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큰 자, 부한 자, 권세 있는 자가

반드시 참으로 큰 자, 부한 자, 권세 있는 자가 아닌 것으로 됩니다.

 

참으로 이것을 정하는 것은 내세인 것으로,

부자도 음부의 고통에는 다만 한 방울(a drop)의 물조차 갈하고,

개에게 마저 업신여김을 당하던 나사로는

도리어 안태(安泰)의 품에 쉬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 주인이 아니고, 노복, 노복이 아닙니다.

정신 차려야 할 일들입니다.

 

다시 두 가지 주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25절 및 29절에 있는 아브라함의 말입니다.

 

첫째(1)로 말하기를,

 

'아들아, 너는 살았을 때에 네 행운을 받고, 또 나사로는 고통을 받은 것을 기억하라'(25일역).

 

일본 역에 있는 '그 고통'이라는 것은 오역입니다. 없이 하는 편이 낫습니다.

 

즉 이 의미는,

부인(富人)은 그가 스스로 행운이라고 믿는바

행운(행복-하나님 편에서 보신 행운이 아니라)을 마음껏 누리고,

나사로는 그 스스로는 원하지 않는,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고통의 생애를 보냈다는 의미입니다.

 

''라는 한자의 유무에 의해 크게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즉 성서의 설은,

부자 반드시 악하여 내세에 고통하고,

빈인 반드시 선하여 위로 받는다고는 단정하지 않습니다.

 

부와 빈은 그것 자신이 내세의 행불행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현세에 있어서 자기가 원하는 행복을 마음껏 다한 것과,

자기가 원치 않는 불우의 일생도 유순하게 보낸 자와,

내세에 있어서 차이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르기를,

 

'그들에게 모세와 예언자 있으매 이에 들을 것이다. 만약 모세와 예언자에게 듣지 않으면, 가령 죽은 데서 살아나는 자 있대도, 그 권면을 받지 않을 것이다'(29, 31일역)라고.

 

이는 실로 우리들이 가장 주의해야 할 일입니다.

왕왕 사람은 말합니다.

기적으로써 증거 하면 믿겠다고.

그러나 성서에 의해 믿지 않는 자가

어떤 방법에 의한다고 믿기에 이를 것 일지요?

 

그리고 또,

먼저 성서에 의해 믿지 않을 정도의 사람에게는,

기적을 준대도 이것을 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가령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 부인의 집으로 보냈다고 하십시다.

5인의 형제들은 이것을 이러쿵저러쿵 해석해 버리고,

참으로 하나님의 보내신 부활의 사자로서 받을 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부자의 형제들 뿐은 아닙니다.

세상 일상(日常)의 일로서,

또 우리들도 빠지기 쉬운 유상(그릇된 생각 delusion)입니다.

 

*내촌감삼의 해석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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