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20일 월요일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하나님의 자애(慈愛)에 관한 비유

 

누가복음 151-32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예수께서 세리와 죄 있는 자,

즉 속인에게 접근하심을 보고,

바리새와 학자 즉 종교가들이 맹렬히 그를 공격하신 데 대하여,

예수는 굳이 변호도 않으시고, 의론도 하지 않고서,

세 가지 비유의 말씀을 하셨다.

 

이것이 유명한 누가복음 15장인 것으로서,

어떤 사람이, 성서가 모두 소실된 대도,

만약 이 한 장이 남아 있다면,

그리스도교는 없어지지 않는다고 탄상한 것도 그럴듯한 일로서,

실로 놀라운 가르치심이 이 안에 진술되어 있다.

 

세 가지 비유는

하나님의 마음 성지의 세 방면을 보여주신 것으로서,

우리는 이것을 듣고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그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제1,

하나님의 연민(compassion)의 마음()을 보여주신 것으로서,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는 때에는,

하나님은 이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연민(동정)을 가지고서 찾으신다는 것이다.

 

사람은 어쩌면 생각하리라.

아주 작은 나 일 개인이 하나님을 믿건 믿지 않건,

천지주재의 하나님께 있어서 무어라고,

 

하지만 모르는가!

하나님은 마치 목양자가 그 양떼 중 하나를 잃은 때에

온 무리를 들에 두고서 마음을 애태우며 애써 그 하나를 찾아 구하시듯,

불신자 위해서는 한없는 연민(동정)으로서,

 

가령 이름 없는 한 천민(일적민) 이라 해도,

그 슬하로 돌아오기까지는,

모든 수단을 다하여 이것을 찾도록 하시는 것은

실로 황송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경에 대하여 알고,

그 순결을 알며, 그 권위를 알았다.

 

하지만 만물을 창조하시고 천지를 주재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충심(충정)에 있어서 그러한 연민(동정)

가득히 나타내셨다는 것을 들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목양자의 마음으로서,

혹은 자식을 가진 어머니의 마음으로서,

겨우 추료(추량 conjecture)할 수 있는 깊은 가르치심이다.

 

예수는 제1의 비유로써,

이 깊은 하나님의 연민의 뜻을 우리들 인류에게 전하셨다.

 

2,

하나님은 어떠한 마음(성지)으로 하나님을 떠난 자를

찾으시는지를 보여준 것으로서 가난한 여인의 은화로써 비유하셨다.

 

가난한 여인이 절약하여 긴 세월(영녀) 고심한 결과,

어렵게 저축한 은화 십 매는 실로 귀한 것으로서,

유대의 고대에 있어서는 어머니로부터 딸에게로

대대 양도되어 전해졌다는 것이고 보면,

일층 깊은 정서(emotion)가 어려지게 된다.

 

그렇듯 소중한 은화의 하나를 잃는 일이 있을 것인가?

마음을 앓으며 집안을 소제하고, 힘 다해 찾다가,

그것을 찾아내면, 이웃 사람들을 불러다가 기뻐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놀라운 것은 천지 주재의 하나님이 통절한 심정으로서

신앙을 잃은 자를 아파하신다는 것이다.

 

다만 연민(동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앓으시고 슬퍼하시며,

하나님은 이 때문에는, 대 우주를 소제하시고,

온갖 수단을 다하여 찾으시는 것이다.

 

혹은 성서를 주시고,

혹은 의인을 일으키시는 등은 그 한 수단이다.

 

이름도 없는 우리들 일인의 불신은,

단지 우리들 자신의 불행이요 손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신 것이다.

 

불량소년을 자식으로 가진 어버이의 마음으로서,

어느 만큼 추정(conjecture)할 수 있으리라.

 

불량아 자신은 그저 태연하게 소일한대도,

어버이에게 있어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다.

 

불신자 자신은 혹은 그것으로 좋을 것이나,

하나님께 있어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시며,

어디까지나 수색(grope)의 손을 펴시는 것이다.

 

우리들의 몸에 임하는 간난불행은 필경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구하시기 위해 행하시는 소제이시다.

이제 공전()의 대 전쟁은 세상에 임하여,

전율(shudder) 않을 수 없는 참극(참혹사건)은 연출되고 있다.

 

하지만 그 원인이 알려지지 않음은 실로 기태인데,

그러나 신자는 능히 그 원인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세상 모두 오로지 이른 바 문명을 추구하여 하나님을 잊으려 하는 때문에,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께 복귀케 하기 위한

자비 깊으신 하나님의 소제가 지금 행해지고 있는 것 아닌가?

 

여인은 잃은 은화를 찾아 집안을 소제하고,

하나님은 잃은 사람을 찾아 우주를 소제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불신자에 대하시는 정(),

하나는 연민(동정)이고,

하나는 그 자신의 고통이시다.

 

예수는 여기서 사람을 양에 비유하시고,

또 은화에 비유하고도 부족하여,

 

3의 비유의 말씀에 있어서는,

사람을 사람에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전이자의 계속이 아니면 보유(supplement)인 것으로서,

이 비유의 좋은 해석은 앞의 두 가지 비유 이야기이매,

다시 이것을 되풀이 할 것 없다.

 

방탕자식은 환락의 꿈에서 깨어난,

궁여 끝에 다시 아버지를 사모하고,

초연히(맥없이) 겁내면서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니,

아버지는 노하지도 않고 질책도 않고,

문전 멀리 달려와 그 목을 껴안고서 입 맞추고,

기꺼이 맞이하여 미의(美衣) 미식(美食)을 주고,

또 살진 송아지를 잡아 축연을 열고,

무악(舞樂)으로서 즐겼다는 것이다.

 

이 축연은 자식 위해서가 아니라,

잃은 아들을 얻은 아버지 자신의 기쁨 때문이다.

 

실로 지상에 있어서 다만 한 사람이 회개한 것으로 인하여,

하늘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축연이 개최되어,

우주는 음악으로서 울려 퍼진다는 것이다.

 

세상의 참된 어버이 또는 스승에 있어서도

그 자식이나 그 문생(문하생)의 고락은 곧 자신의 고락이다.

 

자식이나 문생이,

자기 위해 걱정하고 자기 위해 기뻐해 주는

어버이가 있고 스승 있음을 생각하는 때,

만연(몽롱 vague)히 있을 수 없어,

각각 그 업에 정진하는 것이 상례인데,

 

여기서 천지만물의 주재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들과 고락을 함께 하신다고 할 때,

일각도 주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곧 그 품으로 달려가 그 마음을 편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아(미자 a lost child) 자신은 혹은 의외로 평안히,

어느 곳에서 소일한대도, 부모는 자나 깨나 안부를 알고자,

심통으로 몸마저 수척해 지는 것이다.

 

우리들 자신 혹은 하나님을 떠나서 평안한 생을 보낸대도,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수는 이 세 가지 비유로서

하나님의 깊으신 자애를 보여주셨다.

세상에 그렇게까지 자애 깊은 가르치심이 그리스도교 외에 어디 있으랴!

 

예수는 여기서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것으로 일은 되었다 해도,

이는 바리새인과 학자의 공격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므로,

 

최후에 방탕아의 형에 대한 것이 있는 것이다.

 

실로 빈틈없는 용의주도(perfect)이다.

이 마음 냉정한 형은, 밭에서 돌아와,

자기 집에서 들리는 무악 소리를 괴이히 여겨,

더구나 곧 그 아버지에게 묻지 않고,

종의 한 사람에게서 위세(전부 details)를 듣고서 노하여 집에 들어가지 않고,

아버지에 대하여 원망하여,

돌아온 아우를 부름에 '그 아들'이라 하고 '내 아우'라 하지 않고,

아버지가 그 아들의 귀가를 축하함에 대하여 불평만만이다.

 

잘 묘사된 형의 성정,

우리들도 역시 자칫하면 이 형의 위치에 서려는 자이므로,

깊이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자 사이에 있어서,

특히 교회의 교역자 사이에 있어서,

다수의 이 형을 보게 되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실로 아버지가 그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오고,

잃었다가 다시 찾은 것을 기뻐 축하함은 당연한 일인데,

이것을 밉살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비열한 인정의 약점이다.

 

그리스도교는 하나님과 인류와의 당연한 관계를 가르치는 것으로서,

도덕의 보다 높은 가르침이 아닌 것이다.

 

윤리의 근본을 말하여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도덕윤리는 아무리 좋다 해도.

그것에 사람을 구원함의 아무런 힘이 없다.

 

우리들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인류에 대하여 가지는 마음()

얼마만큼 자애 깊으신 것인지를 알았다면,

우리의 생애는 일변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은 얼마이랴!

지상에서 하찮은 내 일신이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때,

 

하늘에 있어서는, 대 축연이 열리고,

우주는 기쁨의 무악으로서 울려 퍼지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복음인 것으로서,

이것을 전하는 것이 전도이다.

그리고 이 한 가지를 전하는 것에 의해 세계는 일변하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글을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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