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만찬
성 경: [눅 22:14-18]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7)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눅 22: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 때가 이르매 - 유월절 식사의 때 즉 니산월 14일 저녁 해질 때를 가리킨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식사의 때를 언급하는 것은
최후 만찬의 엄숙성과 다른 유월절 식사와 구별되는 식사임을 암시하고자 하는
누가의 의도라고 보여진다.
▶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 예수께서 유월절 식사를 할 때 함께 한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제자'(마데케스)라는 말 대신 '사도'(아포스톨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사도는 제자들을 지칭하는 다른 말로서 대표, 사자 등의 뜻을 지니며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예수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을 뜻한다.
따라서 누가는 '사도'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유월절 식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락방에 '함께 앉았다'고 묘사하는 헬라어는
'아나피프토'의 제2 과거형을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의 뜻은 '눕다', '비스듬히 기대다'이다.
아마도 식사하기 위해 비스듬히 눕는 자세를
그들의 습관에 따라 취했을 것으로 보인다.
본래 유월절 식사는
일어서서 신을 신고 지팡이를 든채로 급히 먹는 것이었으나,
당시는 약식화(略式化)되어 일반 식사와 동일한 형식을 취했다 한다.
(출 12: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눅 22: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가 통상적으로
유대인들이 지키는 유월절 식사 때(니산월 14일 해진 뒤) 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문맥상 하루 전날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그 시간이면 이미 붙들리시어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요 19:14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여기서 예수는 유월절 식사를 자신의 고난과 결부시키고 있는데
이는 누가만의 독특한 자료이다.
따라서 유월절 식사가 단순히 출애굽을 기념하는 식사가 아니라,
고난과 죽음을 앞둔 비장한 각오와 결단이 서려있는
기념적인 식사임을 알 수 있다.
▶ 너희와 함께 -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나누는 의미심장한 친교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죽음을 앞둔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자 하는 심정은
이제까지 함께 활동해 온 지난 날의 모든 추억들을 제자들의 마음속에 되살리고
자신의 일을 제자들이 실천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제자들과의 영원한 연대성을 확인시켜 주고자 했을 것이다.
▶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 유월절의 식사는
어린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뿌린 후 고기를 구워서
무교병과 쓴나물과 포도주를 함께 먹는 것이었다.
따라서 여기서 '유월절을 먹는다'는 말은 '유월절 식사를 한다'는 말인데,
'먹다'의 목적어인 '유월절'에 대해서 다른 해석도 있다.
즉 유월절을 식사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식사를 먹는다는 표현이 어색하기 때문이다(I. H. Marshall).
따라서 유월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스카'는
어린양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C.K. Barrett, Jeremias).
그래서 식사의 종교적 해석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의 이 유월절 식사는 전체적 정황을 볼 때
기념적 성격을 갖는 식사이므로 과거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라는 종교적 식사보다는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예수 자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새로운 차원의 식사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즉 이 식사는 다름 아닌 예수 자신이 유월절 어린 양이 되는바,
장차 이루어질 그의 죽음을 의식하시고 제자들과 더불어
사전에 기념을 한 선견적 식사였다.
예수는 이 같은 식사를 제자들과 함께 하기를 '원했다'는 말을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간절하게 강조한다.
이렇게 예수께서 제자들과의 식사를 간절하게 원하셨기 때문에
10-12절에서처럼 그는 어렵게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셨고
비밀스럽게 식사 장소를 마련하신 것이다.
(10-12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11)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2) 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시니)
또한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고 계셨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시면서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시고,
성찬 예식을 제정하심으로써 자신의 죽음이 갖고 있는
구속사적 의미를 가르치시고자 했던 것이다.
*참조 - (요 14-16장)
[눅 22: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 앞 구절에서 언급했던 바처럼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고자 간절히 원했던 이유는
이 유월절 식사가 마지막 식사가 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더 이상 유월절 식사를 하시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기한을 정하고 있는데 그 기한은 유월절이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지기까지이다.
여기서 두 가지로 초점을 맞추어 예수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에서 드러났듯이 유월절이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져야 할 과제라는 점이다.
먼저 유월절의 의미가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주적이고 민족적인 공동체 국가의 출발을 기념하는 것이라면
아직도 유대 민족은 참다운 유월절을 성취하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즉 로마로부터의 정치적 지배 뿐만 아니라 인간 생활의 전 영역을
이 피지배자의 위치에서 신음하고 있는 상황은 분명히 유월절이 아니다.
또한 같은 민족이면서도 지도자들은 민중으로부터 신뢰를 잃고
집권자들의 착취가 민중을 억압하는 상황에서는 유월절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고통이 모두 사라지고 인간의 죄악성이 뿌리 채 뽑아져
변화된 사람이 살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참된 유월절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예수는 그 날까지 유월절 식사를 않겠다는 말을 함으로써
참다운 유월절을 기대하도록 제자들을 이끌고 계신 것이다(Jeremias, Ellis 등).
둘째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주의 만찬의 친교를 통해 '새로운 유월절'을 맞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다음에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참예하게 될 만찬은
유대의 전통적 유월절이 아니다.
만민이 참여하게 되는 성찬식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만찬은 마지막 유월절 만찬이 되는 동시에
새로운 성찬 예식의 전조가 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행 10: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이 새로운 성찬 예식은
예수의 부활 이후부터 지금까지 실시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눅 22:17]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평행 구절에서는
먼저 떡을 떼어 축사한 것으로 묘사하는 반면,
누가는 첫 순서로 잔을 받아 사례한 것으로 묘사한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마태와 마가는 잔을 한번밖에 언급하지 않은 반면
누가는 20절에서 다시 한번 언급한다.
그리고 누가는 두 번째 잔을 언급하면서 잔에 대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월절 식사는 가장(家長)이 잔을 들어 축사하고
식구들에게 잔을 돌리면서 시작된다.
따라서 누가가 첫 번째로 언급한 잔은 유월절 식사의 첫 잔 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가 언급한 잔은
누가가 20절에서 언급한 잔과 의미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식사 후에 마시는 잔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유월절 식사 때는 포도주를 모두 4잔을 마시게 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누가는 첫째 잔과 마지막 잔을 언급했고,
마태와 마가는 마지막 잔만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Edersheim).
이유는 마태와 마가는 잔에 대한 의미 부여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세 복음서 사이에 나타난 식사 순서에 관한 진술에는 모순이 없다.
다만 잔을 나누는 것은 일반적으로 교제를 의미하나
식사 후의 잔(20절)은 특별히 예수의 수난과 그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20절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 너희끼리 나누라 - 사례한 잔을 제자들에게 주며 서로 나누라고 하는 이 장면은
마치 예수는 마시지 않고 제자들에게만 잔을 넘겨 준 것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런데 15절에서 '먹기를 원했다'는 예수의 간절한 희망을 보거나
당시 같은 잔을 여러 사람이 나누었다는 예레미야스(Jeremias)의 진술이나
관례적으로 주인공이 먼저 잔을 마셨다는 쉬어만(Schurmann)의 주장을 볼 때,
예수가 먼저 잔을 마시고 제자들에게 차례대로 마시게 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눅 22: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 포도주를 더 이상 마시지 않겠다는
약속의 기한을 언급하는 이 구절은 16절에서 언급된
유월절 식사에 대한 것과 비슷한 어투이다.
(16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여기서의 초점은 하나님의 나라인데,
이 구절 역시 두 가지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는,
유월절의 포도주는 참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월절 식사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유월절의 포도주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유월절의 포도주를 나누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