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3일 목요일

온 백성이 예수님의 말씀에 열심히 주의를 기울이므로 자기들이 행할 바를 찾지 못하였더라

  

예루살렘이 겪을 운명

 

(19:41-48) 그분께서 가까이 오사 그 도시를 보시고 그 도시로 인해 슬피 우시며

42) 이르시되, 적어도 이 날 즉 네 날에만이라도 너 곧 네가 네 화평에 속한 일들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리요! 그러나 지금 그 일들이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들이 네게 이르리니 그때에 네 원수들이 네 주위에 도랑을 파고 너를 둘러싸서 사면으로 가두며

44) 또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땅에 쓰러뜨리고 네 안에서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를 돌아보는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하시니라.

45) 그분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그 안에서 파는 자들과 사는 자들을 내쫓기 시작하시며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하였거늘 너희가 그것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 그분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거늘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우두머리들은 그분을 죽이려고 꾀하되

48)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에 열심히 주의를 기울이므로 자기들이 행할 바를 찾지 못하였더라.(한글 KJV)

 

 

하늘로부터 오신 특명대사이신 주님은

여기에서 공공연하게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다.

거기서 존경을 받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배반을 당하러 가신다.

주님은 당신이 친히 걸려 들어가신 독사의 그물을 알고 계셨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예루살렘에 대한 사랑과

이곳을 위하여 걱정하시는 두 실례를 보게 된다.

 

. 주님은 예루살렘성의 멸망이 가까워 옴을 인하여 눈물을 흘리셨다.

 

(41절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셨다".

 

아마 이 때는 예루살렘 성을 다 내려다보실 수 있는

감람산으로부터 언덕을 내려오실 때였을 것이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성의 대부분과 성 안에 있는 당당한 여러 구조물들을 보실 때에

그 광경은 주님의 마음을 괴롭게 하였고 그 괴로움은 눈물을 흘리시게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알게 된다.

 

1. 주님의 마음은 너무도 온유하셨다.

 

주님께서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지만 우셨다는 기록은 몇 군데 있다.

바로 이곳에서 주님의 조상이 되는 다윗과 그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울었다.

그러나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은 전쟁하는 사람들이었다.

세상에는 가장 용감한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얕보지 못할 경우가 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창 승리의 개가를 올리실 때,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환희에 차 있을 때에 눈물을 흘리셨다.

 

사람들의 박수갈채나 환호로써 조금도 흥분하시는 분이 아님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리 기쁜 일이 있더라도 떨리는 마음으로 기뻐할 것이며

마치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승리의 기쁨이란 불행이 닥쳐와서 그것을 흐리게 할 수도 있고

우리 자신의 슬픔으로 인하여 사라져 버리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3. 주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다.

 

세상에는 바라보고 눈물을 흘릴 성들이 있다.

그런데 거룩한 성으로 여겨져 내려오던 예루살렘보다 더 비참하게 될 성이 없었다.

이 성이 타락되면 온 땅의 기쁨도 퇴화되고 말 것이었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셨을까?

 

"저것이 예루살렘 성이로구나,

저기서 내가 배반당하고, 묶이고, 침 뱉음 당하며,

채찍을 당하고 정죄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을 곳이로구나" 라고하시며 우셨을까?

 

아니다. 주님은 친히 주님의 눈물의 참 뜻을 다음과 같이 알려 주셨다.

 

(1) 예루살렘은 기회의 시기를 잘 이용하지 못했다.

 

주님께서는 우시며 말씀하시기를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다면 좋을 뻔 하였도다"라고 하셨다.

 

복음이 너에게 전해질 때에 네가 그것을 깨달았다면

그것에 의하여 너에게 구원이 주어졌을 것인데,

만일 내가 마침내 결심하고, 너희 평화에 속한 것이 무엇인 줄 알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너희의 영적이며

영원한 복을 얻는 길을 따랐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하는구나" 하셨다(44).

 

주님의 말씀하시는 태도는 무뚝뚝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너희가 알았다면! ! 네가 복음을 약간이라도 받아들였더라면.

내 백성이 나를 청종하였더라면"(81:13; 48:18)이라는

말을 하시며 한탄하셨던 것이다.

 

(81:13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48:18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혹은 만일 네가 말라 가는 무화과나무를 바라보듯이 잘 알았더라면 너를 위하여 얼마나 행복했었느냐!

 

또는 "만일 네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을 알고 너 자신을 위하여 울었더라면 나는 너 때문에 울기보다도 기뻐했을 것이 아니냐"고 하셨을 것이다.

 

여기에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모두

멸망이 임박한 예루살렘을 책망하시는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다음과 같다.

 

[1] 우리의 화평에는 거기에 종속된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화평이 이루어지는 방법, 화평이 제공해 주는 것,

화평의 복을 받게 되는 조건 등을 알고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화평에 속해 있는 것들은 우리의 현재와 장래의 행복에 관계되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우리가 실제로 화평을 적용함으로써 잘 터득하고 있어야 한다.

 

[2] 우리의 화평에 속한 것들을 알고 또 선한 목적으로 이해하려면

한때의 권고 받는 시기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사를 풍성하게 누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우리에게 전해질 때,

곧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역사 하시고 우리의 양심이 가책을 받아

각성하게 될 때에는 우리가 보다 좋은 사람이 되라고 권고 받는 시기이다.

 

[3] 자기들의 권고 받는 때를 오래 동안 무시해 내려온 사람들이

만일 드디어 곧 최후에 그들의 눈이 열리면 스스로 결심하고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11시에 포도원에 온 일군도 거절당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4] 은사의 방법만을 무리들이 기쁘게 여긴 것은 놀랄 만큼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치명적인 것은 기회의 시기를 이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의 화평의 조건들이 그들에게 보여졌지만 그들은 이를 무관심하게 여긴다.

그것들에 관심이 없다는 듯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들은 "받을 만한" 때와 구원의 날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저 정신 차리지 못한 채로 지나쳐 버리고 허송해버리고 만다.

그 때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눈먼 자가 없고,

화평한 일에 눈을 감아버리는 것처럼 큰 형벌이 돌아오는 것은 없다.

 

[5] 복음의 은사를 경멸히 여기는 죄와 어리석음은 주 예수에게

큰 고민이 되는 동시에 우리에게도 큰 고민이 된다.

 

주님은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잃어버린 영들,

곧 회개하지 않고 그들의 멸망의 길로 곤두박질하는 자들을 보신다.

주님은 그들이 그대로 계속해 살다가 죽지 않고 회개하고 살기를 바라신다.

주님은 그들이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2) 예루살렘은 멸망의 날을 피할 수 없다.

 

예루살렘의 화평에 관한 일은 이제는 그들의 눈에서 가리어지고, 머지않아 없어질 것이다.

그 뒤에도 복음은 제자들에 의하여 그들에게 전파되었다.

 

"이스라엘 온 집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화평이심을 정녕 알게 하였다(2:36)".

그래서 많은 무리들이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였다.

 

그러나 유대 나라와 그 지도자들은 꼼짝도 않고 불신앙의 태도를 가졌다.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혼미한 영을 주셨던 것이다.

 

(11: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들은 복음에 대하여 너무도 싫어하고 반대하였으며,

몇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그들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이적이었으며(회개한 바울의 경우와 같이),

이러한 이적들이 일어나서 저들이 그 천벌을 받을

몽매함과 완고함을 단념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화평에 관한 일은 특별한 사람들의 눈에서는 가리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유대인의 나라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리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늦다.

그러므로 그들은 멸망되기로 결정되어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분명한 결과로써 닥아 올 멸망을

주님은 내다보시며 예언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알자.

 

위대한 구원을 무시함은 흔히 한 사람에게 일시적인 심판이 내리는 것인데

주님께서 예언하신 지 40년이 못되어 예루살렘에 이런 심판이 내리었으니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바가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1] 로마인들이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참호를 파고,

주위를 둘러싸고 사방에서 그 주민들을 나가지 못하게 가두었다.

 

요세푸스는 이에 관련하여 기록하기를

티터스는 아주 빨리 예루살렘 성을 둘러싸고 있는 한 성벽으로 달려 올라가서

주민들이 도망칠 길을 모두 막아버렸다고 기록해 놓았다.

 

[2] 로마 군사들은 예루살렘 성내도 완전히 점령했다.

 

티터스는 그의 군사들을 명하여 예루살렘을 파괴 할 3개의 탑을 빼놓고는

경내 전부를 평평하게 만들었다. 요세푸스의 유대인의 전쟁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예루살렘 성 뿐 아니라 시민들을 땅 위에 눕혀 놓고(어린것들도 함께)

잔혹한 살인자들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그리하여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권고의 날을 몰랐기 때문이다.

다른 도성과 국가들이 경계할 일이 아니겠는가!

 

. 사람들 앞에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주님의 열정.

 

예루살렘이 오래지 않아 파괴될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이라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1.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을 더럽히는 것들을 깨끗이 하셨다.

주님께서는 곧장 성전으로 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셨다"(45).

 

이에 의하여

(비록 성전에 대하여 원수처럼 나타내셨고, 대제사장를 앞에서는 주님이 하신 일이 범죄라 할 수 있겠지만)

 

주님께서 성전의 공납품이나 보물들을 거룩한 물건이라 하여

숭배하는 제사장이나 다른 누구보다도 성전을 참으로 사랑하는 분이심을 나타내셨다.

성전을 정결케 함은 그 보물이나 재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존엄함에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전의 장사꾼들을 몰아내신 이유를 말씀하셨다.

 

(46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성전은 기도하는 집, 곧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하여 구별해 놓은 집이다.

장사꾼들은 사기적인 매매를 함으로써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었다.

성전에서 장사를 하는 것은 기도하러 온 사람들에게

소란을 피우는 일이니 제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2. 주님께서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성전을 가장 잘 이용하셨으니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신" 것이었다(47).

 

다음 사실을 유의하자.

교회의 부패적인 행위를 추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복음전도를 장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주님께서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신 일을 여기서 살펴보자.

 

(1) 성전을 다스리는 자들이 얼마나 주님을 대항하여 짖궂게 굴었는가.

 

그들이 주님께 위해(危害)를 가하려고 얼마나 기회와 구실을 찾기에 힘썼는가.

 

(47절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 그리고 산헤드린 위원들,

이들은 다 주님을 잘 접대하고 또한 백성들에게도

주님을 수종들도록 권해야 할 사람들인데,

"주님을 죽이려고 꾀했고" 또 죽이었던 것이다.

 

(2) 보통 백성들은 주님을 얼마나 존경하였었는가.

 

그들은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었다."

주님의 시간사용은 주로 촌()에서 보내셨다.

그래서 성전에서는 전도하지 않으시다가 성전에서 하시니까

더욱 존경하여 열심히 주님의 전도에 참석하여

주님의 말씀 듣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였으며

주의하여 들어서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주석했다.

"모든 백성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 주님의 편이 되었다".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주님을 반항하는 자들이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는 말로서 아주 적절하게 이유를 밝혀 준다.

 

주님을 반대하는 자들은 만일 자기들이 주님에 대항하여 난동을 부린다면

백성들이 달려들어서 항거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때가 이르기까지는 주님을 보호해 드리는 일반 백성들에게 관심을 쏟으셨다.

 

그러나 주님의 때가 이르렀을 때에

대제사장의 위력이 일반 백성들에게 미치어 주님을 그에게 넘기게 되었다.

 

*메튜 헨리의 주석을 참조 함.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