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1일 화요일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하심

 

성 경: [19:41-4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성을 보시고 우시며 - '우시며'에 해당하는 '에클라우센'

슬퍼하고 비통하여 우는 것을 뜻한다.

 

예수가 성에 가까이 이르러 성을 바라보고 울었다는 이 묘사는 누가만의 증언이다.

예수가 울었다는 이야기는 복음서 중에서 여기와

11:35에서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서 울었던 것,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모두 두 번 나오는데

5:7에서도 예수가 통곡하여 울었다는 이야기가 언급된다.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이같은 묘사는 예수의 인성(人性)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으며,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열광적인 환호와 찬양이 있은 후에

묘사되었다는 점에서 그 울음의 의미를 더 의미심장하게 해주고 있다.

 

또한 예수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울었다는 점에서

이 눈물은 예루살렘의 장래를 애통해하는 메시야적인 눈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눈물이고 사랑의 눈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 울음은 예루살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보면서 인류의 아픔을 보고

온 세상 모든 피조물의 고난까지도 생각하면서 우는

메시야적 눈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구체적 이유는 24:44절에서 언급되지만,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당시 이스라엘이 당하고 있던 고난,

즉 로마로부터의 압제와 억압,

그리고 자기 문화와 종교의 헬라화 또는 타락,

그럼에도 소수 특권 계급의 끊임없는 자기민족 착취와 지배 등은

실로 암담(暗澹)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이같은 상황은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류의 고난받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고난은 인류사적 맥락과 일치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눈물은 자기 민족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류가 당하고 있는 보편적 고난과 죄에 대한 애통의 눈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 이 말은 탄식조의 문장인데

예루살렘을 인격화하여 ''라고 호칭하면서 외치는 소리이다.

 

즉 예루살렘을 너라고 부른 것은

예루살렘안에 사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이며,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라는 점에서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뿐만 아니라 각 민족간의 역사적 정황은 각각 다르지만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고난과 죄성을 통칭하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한편 본 구절의 핵심은 '평화'이다.

이미 38절에서 '하늘에는 평화'라는 찬양이 있었고

예수의 탄생 때 천사들의 노래가 땅위의 평화를 선포한 바 있듯이,

 

(2:14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와 사람들을 향한 선하신 뜻이로다)

 

'평강의 왕이신' 예수의 활동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바는 땅 위의 평화였다고 할 수 있다.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 그들은 평화의 길이 없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길이 있는데도 자기 눈이 가리워져 알지 못한다고 말함으로써

그 책임이 그들 자신에게 있다는 암시를 준다.

 

다시 말하면 이 전에 수많은 선지자와 예언자들을 통해

평화의 길을 제공받았고

예수의 활동을 통해 하늘나라의 길을 밝히 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눈 안에서 그 길을 숨겨 버렸다는 것이다.

 

 

[19: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날이 이를지라 - 여기서 ''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메라이'

복수 형태로서 5:35;17:22;21:6;23:29에서도 언급되는데

모두 종말의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

 

(5: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7: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21: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23: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즉 종말적 심판의 때가 도래하게 된다는 뜻이다.

또한 이 예언은 훗날 A.D.70년에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될 것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다.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성의 함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예언이다.

 

A.D. 70년에 디도(Titus)가 이끄는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기 위해 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위한 방책(防柵)을 둘러 쳤다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언급된 '토성'은 헬라어로 '카랖스'로서 본래는 '말뚝'이라는 뜻이다.

즉 토성은 말뚝으로 친 공격용 방책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예언과 역사적 사실이 일치된 이유 때문에

누가복음의 저자가 예루살렘 함락을 목격한 후

누가복음을 완성시킨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갖게 해준다.

 

그러나 한편 예수가 직접 이 예언을 못했을 리도 없다.

예수의 통찰력이라면 당시 그 도시가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고

그대로 방치될 때에는 그와같은 종말을 맞이하리라는 점을

불 보듯 명확하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19: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 이 말은 성곽과 성전의 완전 파괴를 의미한다.

 

이와 똑같은 형태의 언급이 21:6에서도 나오는데 물론 성전을 상대로 한 말이다.

 

(21: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한 도시가 거주민의 완전한 파멸과 건물의 완전한 파괴로

더 이상 구원의 가능성이 사라져버린 그림을 보는 듯한 이 묘사는

전술하였듯이 단순히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과 연결지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같은 예언은 평화의 길을 걷지 않고

주의 길을 거부(拒否)하면서 살아가는 사람과 도시와 민족의 최후를 말해주는 것이며,

종말적 심판의 때에 이와같은 파멸을 당하게 되리라는

궁극적이고 우주적 의미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 이와 같은 완전 파멸을

맞게 되는 이유를 '보살핌 받는 날'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언급하는 바,

 

보살핌의 날'하나님이 너를 방문 하신때',

혹은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러 오신 때' 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 세상에 와서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호소했지만,

그들이 믿지도, 듣지도 않았기 때문에 완전한 파멸이 오게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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