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11일 금요일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부활에 대한 시험

 

성 경: [20:27-40]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8)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9)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31)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3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39)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40)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20: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 본문의 사두개인들이

산헤드린의 명을 받고 고의적인 공격 의도로 왔는지

아니면 종교상의 진지한 논의를 위해 왔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전후 문맥으로 보아 그들도

예수께 대한 공격적 의도로 질문해 온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태는 '그 날에'라는 단어를 사용해

앞서 소개되었던 세금에 관한 논쟁과 같은 날에 이 사건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22: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한편 사두개파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제사장 사독에게서 기원된 집단으로서,

하스모니안 시대 때(B.C.166-163) 구체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삼하 8:17 아히둡의 아들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은 제사장이 되고 스라야는 서기관이 되고)

 

 

이들은 특히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면서

다른 전승 문서들은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유대 사회내의 소수 집단이었지만 부유한 지배 계층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적 세력을 갖고 있었다.

 

특히 현실주의자라는 별명과 함께 로마의 통치에 협력하여

자신들의 이권을 유지했던 무리들이었는데 예루살렘 함락(A.D. 70)과 함께 몰락했다.

 

이들이 주장하는 교리 중 독특한 것은

부활과 영(spirit)을 믿지 않았다는 점이다(Josephus, Antiq., 13.10.6).

 

 

[20:28]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 이 사람들도 역시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적대적 감정이 없는 듯이 말문을 열고 있지만

실상은 이어지는 질문을 통해 선생으로서의 주님의 권위를 깡그리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께서 부활을 인정하신다고 판단하고서

나름대로 철저한 반대 논리를 펴고자 했다.

기실 그들은 부활에 관한 문제를 놓고 바리새인 등

견해를 달리하는 집단들의 논리에 대항하기 위해 첨예한 이론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 대해서도 자신만만한 투로 접근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논거로서 언급한 내용은 신 25:5-10에 나타난 계대결혼(繼代結婚)에 관한 법이다.

(25:5-10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7)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8)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

9)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10)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남편이 자식 없이 죽을 경우

시동생과 그 과부가 재혼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재혼을 통해 죽은 남편의 이름으로 자손을 잇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모세 율법과 부활 교리와의 모순점을

신랄하게 드러내기 위해 이러한 관습을 근거로 들고 나왔다.

 

 

[20:29-33]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31)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 그들이 계대 결혼과

부활의 모순을 말하기 위해 전제된 이야기가 본문 29-32절의 내용이다.

 

즉 일곱 형제가 있는 집안에서 결혼한 맏형이 죽게되자 전통과 율법에 따라

동생이 형수의 남편이 되었는데 그러기를 일곱 회나 반복하여

이 여인은 일곱의 남편이 생긴 셈이 되었다.

 

마침내 이 여인도 죽었는데 문제는 모두 죽어서 다시 부활했을 때

한 여인이 일곱의 남편을 만나게 되는데 있다.

 

그렇다면 부활 후 어느 한 사람이 진짜 남편이 되어야 하는데

일부일처제가 옳다고 생각되는 상황 하에서 일곱 명의 형제 중

누가 그 여인의 남편이 되겠느냐하는 질문이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었는지 가상적인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동생이 미망인인 형수의 남편이 되어야 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수혼(嫂婚) 제도의 상황 하에서

이 질문은 상당히 진지하고 흥미 있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질문을 던진 사두개인들은 논쟁의 승리를 확신하고서

아마 속으로 예수를 비웃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질문에 따라 일곱 형제 중 어느 한 명을 택하여

그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는 대답이 나오면

그것은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거리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활 때에는 어떻게 되겠느냐'는 식의 객관적 자세에서 나온 진지한 물음이 아니라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아예 단정적인 물음을 던졌다.

 

이 물음에는 마치 그 미망인이 부활시에는

반드시 일곱 형제 중 한 사람의 아내가 되어야 된다는 것처럼

윽박지르는 느낌이 담겨 있다.

그것은 현세의 삶과 동일선상에 두고자 하는 전제 자체의 오류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20: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 이 부분은 타()공관 복음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문장인데 대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예수가 사두개인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성경을 잘못 알아

부활을 오해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신 것으로 묘사된다.

 

본 구절에서도 예수는 대적들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시지 않고,

곧 그들의 질문에 끌려다니는 입장에서 벗어나사

부활 후 상태에 관한 진실을 본질적으로 설명하심으로써,

대적들의 무지와 악한 계교를 자연히 그리고 적나라하게 드러나게끔 하는 방법을 취하셨다.

 

문제의 핵심을 파고들어 전제 자체의 오류를 지적하고

올바른 진리를 선포하는 이 놀라운 신적 지혜 앞에서

대적들은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0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한편 본문의 사두개인들은 당시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일반적 부활관을 염두에 두고 예수를 시험하려 했던 것 같다.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 부활관에 따르면,

사람들은 죽은 후에도 이 세상에서의 삶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성경은 부활 이후의 삶을 현세의 삶과 다른 차원의 것으로 묘사한다.

 

(고전 15:35-49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3: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요일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20: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

 

부활하여 새롭게 사는 세계를 저세상으로 표현한다.

즉 이세상과 저세상을 명확히 구분함으로써

사두개인이 질문한 내용이 일차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말한다.

 

부활한 새로운 세계는 이세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이다.

 

여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이라는 말은

부활 후 거하게 될 세계,

곧 천국이 모든 사람의 세계가 아니라 제한된 사람들의 세계임을 암시해 준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에 의해서도 지적되는 바,

13:46에서 영생을 얻기에 합당한 자와 합당하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고 있는 내용과 맥을 같이 한다(I.H.Marshall).

 

(13: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여기서 언급된 합당한 자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의 의()로 옷 입게 된 자들을 가리킨다.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20: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 이는 앞 구절에서 언급 된 바

곧 부활한 저세상에서는 결혼이 없다는 말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

 

결혼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출산을 통한 종족(種族) 보존에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새 생명을 받아 불멸의 존재로 새로 탄생하는 성도들로서는

더 이상 결혼이나 출산을 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사들의 수효가 창세 때로부터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듯이

부활의 생명을 받는 자들의 수효도 만세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더 이상 수효를 보충해야 하는 부족함이 야기되지 않는다.

 

아울러 본문은 부활한 성도의 삶의 양태가 현세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를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20:3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 사두개인들이

모세 율법을 근거로 삼아 예수를 시험하였듯이,

예수께서도 이에 대해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증거하신 말씀을 통해 부활신앙을 변호하셨다.

 

즉 본문은 출 3:6에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었던 음성이다.

 

(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며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신 것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과 같은 신앙의 선조들이 몸은 비록 죽었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새 생명에 참예케 될 것임을 뜻한다.

 

하나님이 이들과 맺은 언약은 영원한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유한한 인생의 눈으로 보면 육신의 죽음이 곧 존재의 끝으로 보이지만,

신령한 믿음의 안목으로 보면 그것은 새로운 시작일 뿐인 것이다.

 

 

[20: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 결론부에 해당되는 이 말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는 관계임을 역설한다.

 

즉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된다는 말이다.

 

육적인 몸을 지니고 이 세상에서 살아 있다 해도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하여 구체적 삶이 변혁되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 있다고도 할 수 없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육체적으로 죽었다 해도 중생한 사람이라면(36)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누가는 마가나 마태와 달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 있다고 덧붙이는데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다는 말이고,

하나님 안에 있으면 모든 사람이 죽어도 산다는 말이다.

 

이것은 이미 죽음을 넘어서는 이야기이며

부활 역시 육체적 의미의 죽음과 부활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회개를 통해 영생을 얻게 되며 그 영생은 죽음 후에 오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여기서 부터이며 어느 한 시점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로서 영생, 부활이 있는 것이다.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0:39]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부활과 영생에 대한 믿음이 강했으며

사두개파 사람들과는 경쟁적 차원에 있었다.

 

이러한 신학적 견해 차이로 말미암아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려 했던 일(27-40)

외에는 이 두 그룹은 항상 마찰을 빚어왔다.

 

본 구절에서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자신들과 사상적 숙적(宿敵) 관계에 있던

사두개인들의 그릇된 주장들을 여지없이 훼파해 주신데 대하여선 크게 기뻐하였다.

 

 

[20:40]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 이 진술 역시 누가만 언급하고 있는데,

사두개인들이 주장했던 논리가 예수 앞에서 단번에 무너지는 장면이다.

 

결국 본장에서 등장한 산헤드린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그리고 사두개인 등, 모두가 예수와의 논쟁에서 패하게 되었다.

 

이들은 당시 유대 민족의 지도층으로서 한 민족을 이끌어가는

주도 세력 또는 집권 세력인데 그들이 예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예수님의 신적 지혜와 권위를 더욱 부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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