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한 농부의 비유
성 경: [눅 20:9-13] 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1)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13)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눅 20:9] 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 이 비유는 19절에서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의 입을 통해 확인되는 바와 같이
당시 집권자들을 향한 비판적 공격이 되는 내용이다.
(19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여기서 '백성'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오스'는
평민층을 중심으로 하는 '오클로스'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말이다.
'라오스'는 불특정한 대중, 다수의 사람 등으로서 이해되며
일반적인 사람들(people)을 가리키는 집단적 의미를 갖고 있다.
아마도 누가는 예수의 비유가 성전에 모인 모든 사람들과
그 자리에 함께 있는 특권층, 집권자, 산헤드린 대표 등을 포함해
모든 사람을 향해 주는 비유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貰)로 주고 - 이 비유에 등장하는 사건은
당시 팔레스틴의 사회적 배경을 근거로 하고 있어
듣는 이들에게 별 무리 없이 쉽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팔레스틴 본토에 토지를 소유하고서 외지에 거주하는 유대인들,
혹은 로마인으로서 팔레스틴에 땅을 사둔 자들도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부재(不在) 지주(地主)로 인한
갖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곤 하였던 것이다.
세(貰)로 주었다는 말은
이 세상의 소유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고
다만 성도는 이를 관리하는 청지기 내지는 종의 위치에 있음을 뜻한다.
또 타국에 갔다는 말은 주인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포도원을 경작하라고 맡겼다는 뜻인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맡은 바
사명을 추구해 나가야 함을 시사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주어지는 비유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구원사적 맥락에서도 이해되어야 한다.
[눅 20:10]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 때가 이르매 - '때'(카이로스)는 시간(time),
또는 어느 한 시점(point of time)이나 시기(period of time)를 뜻한다.
이 비유에서는 포도를 따 들이는 추수의 때,
곧 종말적 심판의 때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때는 성도에게는 풍성한 결실과 완성의 때이지만 불신자에게는 파멸의 때이다.
▶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 9절에서 언급된 사실대로
포도원의 소유권은 주인에게 있고,
농부들에게는 세로 빌려준 것이기 때문에
추수 때에 소작세를 받기 위해 종을 보냈다고 묘사된다.
이것은 소작료를 받는다는 것 자체 보다는
주인과 소작인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비유를 풀어서 말하자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잘 유지되는가 하는데 관심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소작료를 잘 내는 것은
주인과 소작인간의 관계가 좋다는 말이 되고,
소작료를 거부한다는 말은
주인과의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때문에 종이 온 것은 주인과 소작인의 관계를 끊지 않고 계속 유지시키고자 함이었다.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선지자들의 주 임무 역시
백성들의 죄악을 회개시킴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데 있었다.
▶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때리고 빈 손으로 돌려보냈다.
이는 주인과의 계약 관계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겠다는 의사 표시이다.
아울러 이는 9절에서 언급된 포도원의 소유권이 주인에게 있음에도
그 소유권을 빼앗아 자기들이 갖겠다는 것을 암시하는 행위이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등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다가 모욕을 당했던 선지자들을 연상시키게 한다.
(렘 7:25-26 너희 조상들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었으나
26)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조상들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
25:4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끊임없이 보내셨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
슥 1:6 내가 나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한 내 말과 내 법도들이 어찌 너희 조상들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돌이켜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의 놀라운 경험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불신앙의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물론 이 같은 비유가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종교. 정치 지도자에게로 돌아가는 화살이기도 하다.
[눅 20:11]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 마가복음과 본서는 종의 파송을
단수로 언급하고 있는데 반해 마태복음은 복수로 계속 언급한다.
아마 마태는 많은 선지자들이 역사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농부들의 죄악을 강조하려 했던 것 같다.
▶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 농부들이 종을 대하는 태도가 점점 거칠고 잔인해진다.
여기서 '능욕하다'라는 말은 예수가 체포되어 당하던 모욕을 연상하게 한다.
(22:63-65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마 26:67-68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막 14:65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마가는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했다고 묘사하는데
이것 역시 예수가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쓴 사실을 연상하게 한다.
(마 27: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막 15:17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따라서 종이 받는 수난은 마지막 상속자가 받는 죽음으로 집중되고 있으며,
(14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이 같은 수난의 묘사는 곧 닥치게 될 예수의 죽음과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눅 20:12]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 농부들은 주인과의 관계를 끊고 계약도 파기하며
주인의 종까지 모욕을 주고 돌려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그 사실에 대해 침묵하고
세 번째로 그 농부들에게 종을 보내는데
이것은
(1) 주인이 농부들에게 보내는 끊임없는 신뢰이며,
(2) 농부들이 회개하여 다시 정상적인 관계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희망의 표시이고,
(3) 농부들의 배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이 바로 되기를 바라는
사랑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주인을 하나님으로 비유 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끝없는 배신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분으로 이해될 수 있다.
▶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 종이 받는 상처가 점증되고 그냥 돌려보낸 것이 아니라
'내어 쫓아 버렸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농부들의 마음이 더욱 완악해진 살기등등한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마가복음의 평행 구절에서는 세 번째 종 이외에
많은 종들이 다시 왔음을 밝히면서, 그들을 죽이기도 했다고 묘사한다.
마가의 진술이 훨씬 사실에 가깝다고 보여지는 것은
침례 요한의 죽음이 증명하듯이
보냄을 받은 선지자들이 많이 죽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전승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애굽에서의 유배 생활 중에 돌에 맞아 죽었으며,
이사야는 톱에 켜여져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는 14절에서 상속자의 죽음을 더욱 극적으로 말하기 위해
종들을 고난 받는 것으로만 묘사한 듯하다.
또한 누가는 종과 상속자의 죽음을 따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로 보고,
또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이 행했던 잔인한 반역의 행위를 하나로 묶어,
예수의 죽음까지 극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눅 20:13]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 주인은 세 번째 종이 상처를 입고
쫓겨 오게 되자 비로소 애절한 탄식과 함께
자신의 아들을 보내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이 같은 누가의 표현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주인의 직접 애절하게 탄식하는 모습과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겠다는 결심을 직접적으로 묘사한다.
누가에 의하면 주인이 어찌할꼬 하면서 탄식하는데,
이 탄식은 소작세를 받지 못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안타까움도 아니고,
주인이 보낸 종들의 수난 때문만도 아니다.
오히려 이는 어떻게 해야 강퍅해진 농부들의 마음이 변하여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될 수 있을까 하는 탄식이다.
그래서 주인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기로 결정하는데 사실 이것은 모험(冒險)이었다.
왜냐하면 종을 세 번 보내기까지 횟수가 거듭 될수록
농부들의 마음은 굳어지고 종들에 대한 수난도 갈수록 가혹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들을 모냈을 경우
이번에는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인은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사용된 '사랑하는'(아가페토스)이라는 단어는
외아들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말이다(only-beloved).
이 단어는 예수가 침례를 받을 때 하늘로부터 들려온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에서도 사용되었다.
(3: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따라서 이 같은 묘사는 누가의 의도적 표현으로 볼 수 있는데
즉, 주인의 탄식과 자신의 아들을 보낸다는 이야기는
곧 하나님이 독생 성자 예수를 이 땅에 보냈다는 사실과 일치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 비유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알레고리적(allegorical)으로 일치시켜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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