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9일 수요일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세금에 대한 시험

 

성 경: [20:19-26]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20)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21)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22)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

23)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24)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25)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6) 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

 

 

[20:19]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들 두려워하더라 - 19:47-48에서 언급된 내용과 비슷하다.

 

(19:47-48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여기서도 유대지도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감동되어 있는 군중들 때문에

예수를 죽이지 못한다고 하는 똑같은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장면에서 확인(確認)할 수 있는 것은

예루살렘 성 안에서 예수는 일반 백성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셨다는 점이다.

 

그들은 예수의 메시야 되심에 관해 본질적으로 오해하고는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전폭적인 지지의 환호를 보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교 지도자들을 위시한 기득권자들은

예수의 언행이 매우 도전적이고 선동적이라고 생각하여 두려워했을 것이 분명하다.

 

 

[20:20]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 마태의 경우에는 '바리새인들'이라고

문장의 주어를 밝히고 있는데 반해 누가는 주어를 밝히지 않는다.

 

'엿보다'라는 말은 주의 깊게 몰래 지켜보는 것을 뜻하며

문맥상으로 볼 때 예수의 약점을 책()잡아 공격하려고

'호시 탐탐(虎視耽耽)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라는 뜻이다.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 붙이려 - 2절에서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제거시키기 위해 처음 짜낸 묘안은

종교적 가르침의 권위를 문제 삼으려 그를 책잡는 것이었다.

 

(2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그러나 그들은 종교적 문제로 예수를 문제 삼았다가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1-8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4)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5)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7) 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허다한 군중들이 예수를 추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힘으로 예수를 처치하기 곤란하다고 판단하였다.

 

더욱이 당시 죄수에 대한 사형권은 로마 정부의 고유 권한이었기 때문에

설령 유대교 지도자들이 유대법상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을 조작한다 해도

함부로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유대 지도자들은 로마 총독의 정치적인 힘을 빌어

예수를 제거하고자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 1,2절에서

산헤드린의 대표들이 직접 예수를 심문하듯이 공격한 것과는 달리

여기서는 정탐이라고 표현되는 특정한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이 예수를 책잡고자 나타난다.

 

공관복음서 평행 구절을 종합하면 산헤드린 대표들이 보낸 정탐꾼들은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이었다.

 

(22: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12:13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이 두 당파는 대개의 경우 서로 뿌리 깊은 반감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일치단결하고 있다.

 

예수는 이들에게 있어

기득권을 위협하는 암적인 존재요 공통의 타도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것이다.

 

실로, 그들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데 빠른 발을 지닌 악인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1:16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

 

 

[20:21]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 정탐꾼들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당신'이라고 호칭했던 것과는 달리,

'선생님'이라는 정중한 말을 사용한다.

 

(2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들어 칭찬한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간교한 술책(術策)의 일환이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 이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첫째는

20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자신들이 의인인 것처럼 행세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즉 자신들이 예수의 말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특히 예수의 가르침이

참으로 정직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평가함으로써

자신들이 민족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참된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는

위선적인 말이다.

 

둘째는

이 같은 칭찬의 말을 통해 예수를 인정하고 추종하는 사람인 것처럼

위장하여 예수를 안심시키고 자기들의 의도대로 이끌어 가려는

유도(誘導)성 질문을 하기 위한 연막(煙幕)이라고 할 수 있다.

 

 

[20:22]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 - 여기서 특별히

가이사(Caesar)에게 바치는 세금에 관하여 질문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유대인들이 자기 나라를 무력적으로 지배하면서

높은 세금을 징수하는 로마 제국에 대해

깊은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 같은 민족 감정에 대한 예수의 입장을 말하게 함으로써

예수를 로마 쪽이나 유대 쪽으로부터 미움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고안된 진퇴 양난식(進退兩難式)의 교묘한 질문이다.

 

민족 감정으로 첨예하게 드러나 있는 지배국에 대한 세금 납부 문제는

초기 단계에 이미 유대인의 저항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I.H.Marshall).

 

예수 당시에 유대인의 반() 로마적 감정은 세금 징수 문제에 있어

큰 반발심으로 표출되었다.

 

그래서 정탐꾼은 자신들이 민족주의 운동을 하는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인 것처럼

가장하여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주의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당연하게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는

대답이 나올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반대로 친로마적 발언을 한다면 예수를 환호했던 대다수 무리들로부터

배척당할 것이라는 기대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20절의 내용으로 보아 그들은 반로마적 대답을 기대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언급된 '가이사'(Caesar)'시이저'라고도 발음되는데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말로서 로마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 때부터

유래되어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유대인들이 납부해야 할 세금은 인두세, 관세 등 각종 세액이 있었는데

그 세금은 수입의 1/3이상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로마가 요구하는 세금 중 인두세(人頭稅)가 악명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인두세는 14-65세까지 해당되는 모든 남자와

12-65세까지 이르는 모든 여자에게

한 사람당 한 데나리온씩 부과되었다.

 

 

[20:23]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그 간계(奸計)를 아시고 - 예수의 판단 형식을 빌어 질문하는 자들의 의도를

말해주는 이 구절은

20절의 설명을 상기시키며 사람의 깊은 의중을 간파하시는 예수의 전지성을 보여준다.

 

마가는 '간계' 대신 '외식'으로 또한 마태는 '악함'으로 표현한다.

이 표현들은 공통적으로 예수를 책잡으려는 정탐꾼들에 대한 평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마가와 마태는 이 같은 평가 후 예수가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라고

반문하는 것으로 묘사하여 공개적으로 그들의 불순한 의도를

폭로하신 사실까지 언급하였다.

 

 

[20:24]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 이같은 예수의 요구는 로마에 납부하는

세금의 정당성에 관한 질문에 대한 첫 대답인데,

 

이 요구로 보아 한 데나리온은 일상적으로 지니고 다닐 정도에 해당하는

액수의 화폐인 것으로 보인다.

 

'데나리온'은 신약 성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로마 화폐이다.

 

헬라 화폐 '므나'1/100에 해당되며,

유대 화폐 '세겔'1/4정도에 해당되는 단위인데

 

당시에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 사용되었다.

또 잘 알려진 헬라 화폐 '달란트'1/6,000에 해당되는 가치를 갖고 있었다.

 

예수가 여기서 한 데나리온을 요구한 것은 아마도 당시에 로마에서

부과하던 인두세가 백성 한 사람당 한 데나리온씩 부과되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염두에 두시고 로마에 세금을 납부하던 데나리온 하나를 보이라고

하셨던 것 같다.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 당시에는 어느 나라가 새로 세워지거나 왕이 새로 즉위하면 새 왕의 화상(畵像)을 넣은 돈을 만들었다.

또한 그것들이 유통되는 곳에서는 세금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데나리온 주화에는

당시 황제 가이사 디베리우스(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그 주화의 글귀는 황제의 이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그의 어머니가 여신으로서 묘사된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이 로마 주화에 그려진 황제의 얼굴은 종교적 권위가 부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Stauffer).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화폐를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몸에 지니고 다니기를 꺼려했었다.

 

 

[20:25]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 두 문장이 극적으로 대립되어

땅의 권위와 하늘의 권위를 대립시켜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양극적 언급을 정교 분리(政敎分離)의 이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정교 분리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13:1-7과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국가 또는 사회 권력에

대한 합당한 자세를 언급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13:1-7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3)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4)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5)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6)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본질적으로 질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위의 통치 구조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성도는 삶의 실제적인 모든 영역에서 권위에 원칙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와 종교가 서로 별개의 것으로서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설명해서는 안 된다.

 

이 같은 논리들은 하나님의 영역과 권위를 훼손시키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는 철저하게 로마로부터 지배받아 사회. 문화. 종교 문제까지 위협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A.D. 70년에 이르러서는

로마 군대로부터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정신적. 종교적 뿌리인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다면 예수의 이야기를,

로마의 것과 유대의 것은 분명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즉 로마의 것은 로마에게로 돌려주고,

유대의 것은 유대에게 돌려놓으라는 말이다.

 

'데나리온'이라는 화폐도 역시 로마 황제의 소유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데나리온도 가이사에게 돌려주라는 말이다.

 

그리고 유대의 전통, 유대의 정신을 유대인의 것으로 돌려놓으라는 뜻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예수의 발언은

양극을 피해가는 기회주의적인 말이 아니라,

지극히 민족주의적이면서도 범세계적인 입장에서 하신 말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민족주의의 한계 속에 제한된 말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바치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돌려놓으라는 강조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것을 빼앗았다면

또는 '가이사'로 불려지는 황제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를 넘어서는

무례를 범하고 있다면(사실 당시 '가이사'의 권위는 가히 신적이었다)

그 권위를 하나님에게로 돌려놓고,

가이사의 것만 가이사에게 주어야 할 것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유대인의 사상이나 성경이 보도하는 바처럼

천하 만물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으며

이 세상의 돌 하나, 풀 한 포기라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결국 가이사의 왕국조차도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가이사에게 돌아갈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셈이 된다.

 

이러한 예수의 응답이 갖는 비판적 의미 때문에 예수를 고발했던 사람들은

예수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선동한 사람이라고 증언하게 된다.

 

(23: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20:26] 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 - 예수를

제거시키기 위한 또 한 차례의 노력과 음모가 실패로 끝나는 장면이다.

 

그들이 예수를 책잡을 수 없었던 이유는

 

첫째,

예수의 답변이 책잡기 위해 질문했던 자들의 수준을 크게 넘어섰기 때문에

그들이 당황하였고,

 

둘째,

예수의 답변이 단순히 세금을 내고 안내고 하는 문제를 넘어서

원천적으로 해결해야 될 근본적 문제를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셋째,

주위에 함께한 무리들이 예수의 발언에 대해 긍정적으로 경청하고 있었으며

그 분위기가 압도적인 것이어서 더 이상 말을 붙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의 답변에 기이히 여겼다고 언급되는데,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다우마조'

'놀라다' 혹은 '칭송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예수의 답변이 합리적이며 반론의 여지가 없어서

청중들 가운데 긍정적으로 수용되면서 그 지혜에 놀랐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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