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일 금요일

전도서에 대하여 2

  

전도서에 대하여 2

 

시인 괴테'파우스트 극'에 있어서의 주인공 파우스트도 이 길을 취했던 것이다.

그리고 솔로몬 아닌, 또 괴테 아닌 우리나라(일본)의 소학사, 소박사로서

처음에 지혜와 지식에 들뜨고, 뒤에 인생의 불안에 견디지 못하여

자연주의의 실행으로 끝난 자는, 결코 적지 않은 것이다.

 

코헤레스(전도서의 저자)는 광망(madness)과 우치(어리석음)

시도 하렴에 있어서 말했다.

 

'내 마음에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서, 술로써 몸을 살찌게 하리라'(2:3).

 

그는 역시 많은 취한과 마찬가지로, '취해도 난동치 않는다'고 하면서 뽐냈던 것이다.

 

'지혜를 품고 있으면서 술은 마신다. 무슨 해가, 이에 있으랴'고 한 것이다.

 

하지만도 지혜는 마침내 술의 삼킨바 된 것이다.

몸을 광망에 맡기려한다. 그리고 광망 중에도 정각을 잃지 않으려 한다.

타락의 심연에 처한 학자의 심중에 측은히 여겨야 할 데가 있다.

 

학자 반드시 결코 지자(知者)는 아니다. 지혜와 지식은 헛됨이다.

광망도 우치도 또한 헛되다.

그러나 실로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왕자였던 코헤레스(솔로몬)이다.

그는 지혜와 어리석음(우치)은 동등하게 헛된 것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빛이 어두움 보다 나음 같이 지혜는 어리석음(우치) 보다 낫다.

나는 이것을 깨달았노라'(2-13 일역).

 

이자 한 가지로 헛것이다. 그 끝나는 바는 하나이다.

그렇다고 하지만도, 이자를 비교해 볼 때, 지혜가 어리석음 보다 나음은 분명하다

.

지혜와 지식은 헛되다고 하여, 이것을 배척할 것은 아니다.

학문은 확실히 무학보다도 귀한 바가 있다.

지식에 영구의 평강은 없다한대도,

하지만 이것을 비천히 여기고,

이것을 경히 여기며, 이것을 폐지할 것은 아니다.

 

지식은 천상의 빛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상의 빛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사람의 지혜이다.

이에 분과 근심이 따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닦아야 할 것이다.

지혜는 헛것(공허)이다. 일락은 헛것이다.

어느 것도 마음을 채우기에 족하지 못하다.

인생의 지상선은 이것을 이자 어느 것에 있어서도 구할 수는 없다.

 

이에 있어서, 코헤레스(전도자),

이것을 자기의 노동과 노동에 의해 얻은 간소한 가정에 있어서 구하려 했다.

노동과 가정, 전원생활, 간이생활,

아가에 구가 된 목자와 술람미 여자와의 생활 이것이 이상이요,

지상선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낙을 다하고서 그 반대의 간이생활로 돌아갔던 것이다.

전원생활이 구가 되는 때는, 언제나 사치가 성행되는 때이다.

사람은 일락에 권태를 느끼는 때면, 그 반대인 노동에 위안을 구하려 하는 것이다.

 

'오라, 내 너를 즐겁게 하리라. 그때, (), 낙을 누리어라'고 하는 자는, 멀지 않아 말하는 것이다.

 

'무릇 네 손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은 힘을 다하여 이를 하도록 하라'(9:10 일역)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9:10 한글 역).

일락을 권하고, 또 노동을 격려한다.

이 세상의 지자가 하는 일은 거의 모두 이런 것이다.

그리고 작은 조용한 간소한 가정을 시도하고서,

코헤레스는 무엇이라고 말했던가?

그는 마침내 만족을 발견했던 것일까?

아니다. 그는 또 탄성을 발하여 말했던 것이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그 노고함에 의해 마음을 즐기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니라'(2:24).

 

그는 여러 번 이 이상을 지고, 여러 번 실망했던 것이다.

 

(3:12-13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13)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3:22 그리하면 그것이 네 영혼의 생명이 되며 네 목에 장식이 되리니;

 

5:18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9:7 이하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이 잡히느니라).

 

'이것도 또 헛것으로 바람을 먹는 일이라'는 것은 그가 되풀이해 마지않는 누구였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빵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술을 마시라. 이는 하나님께서 얼마동안 네 행사(하는 일)를 기쁘게 받으셨음이로다. 네 옷으로 하여금 항상 회개하라. 네 머리에 기름을 그치지 않게끔 하라. 해 아래서 네가 받은 이 네 헛된 생명 있는 동안, 너는 그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살도록 하라. 이는 네가 세상에서 받는 분깃(분복), 네가 해아래서 일하는 노고에 의해 얻는 것이라'(9:7-9).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서 네 술을 마시라'. 인생의 지상선은 이에 있다고 한다.

 

잇꾸 오쇼우의 '극락은 어느 쪽일까고 생각했더니,

(심엽) 늘어세운 마다로꾸가 몽'을 생각나게끔 하지 않을 수 없다.

실로 낮은 이상이다.

 

'네가 받은 이 생명 있는 동안, 너는 그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살 것이다. (지내도록 하라)'고 한다.

 

시인 번즈Highland Mary를 읽는 기분이고,

작은 사랑스러운 메어리가 있는 곳에 내 천국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인 (전도서)코헤레스는 부인에 대하여 무어라 말하고 있는가?

'내가 깨달았도다. 부인의 그 마음은 올무와 그물 같도다. 그 손은 포승 같도다. 이것은 죽음보다도 괴로운 것이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는 이것을 피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죄인은 이것에 잡힐 것이로다. 나는 천인 중에서는 한 남자를 얻었지만도, (같은) 수중에는 한 여자를 얻지 못했노라'(7:26-28).

그리고 만약 부인이란 그런 것이라면,

이와 함께 지낸다는 것이 인생의 지상선이 아님은 말하지 않아도 분명하다.

 

'이는 죽음(사망)보다도 괴로운()것이다'고 저자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즐겁고, 즐거운 가정'이라고 노래한다 해도, 이것은 비교적인 말인 것으로,

여기에 인생의 지상선을 구할 때, 사람은 누구나

 

'이것도 또 헛되다 바람을 먹는 일이라'고 하며, 얼굴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전도서의 저자 코헤레스'세상 사람을 하늘 아래서 생애에 어떠한 일을 하면 좋은 것인가'하는 문제를 설정하고,

 

이것을 논구하고 실험한 결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도다. 모두 헛되도다'라는 결론에 달했던 것이다.

 

지혜와 지식, 이건 헛되다.

광망과 우치, 본능성의 만족, 일락의 생애, 이것 역시 헛되다.

 

그렇다면 조용한 가정 간이생활, 전원생활 청경우독의 시적(詩的)생애,

양처와 함께 즐겁고도, 간편한 가정생활을 하는 것, 이 어떤가고 자문 하고서,

그는 또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도 역시 헛되어 바람을 먹음이라'.

 

이렇게 그는 문제를 만들어,

이에 대하여 만족한 대답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인생의 지상선이 무엇이 아닌지를 알 수 있었지만도,

그것이 무엇인지는 이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다만 되풀이하여 말한 것이다.

 

이것도 또한 헛되다. 바람을 먹음이다.

 

그리고 이 글() 끝에 이르러 겨우 사람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전도서는, 그 설정한 대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으로 단정하는 일 많고,

적극적으로 가르치는 바는 극히 적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성서의 다른 부분으로써 전도서를 보충함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인생은 헛되고 헛된 모두가 헛된 것은 아니다.

인생에 헛되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이다.

지혜와 지식은 물론 헛되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에게 지혜 이상, 지식 이상의 것을 주시어,

그로 하여금 만족케 하시는 것이다.

 

육체()의 쾌락은 물론 헛되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업 이상, 미술 이상, 재보 이상의 것을 사람에게 주시어,

그로 하여금 아무것 가지지 못한대도 모든 것을 가진 느낌 있게 하신다.

 

노동과 가정은 하나님의 크신 은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영혼을 만족시키기 위한 양식으로서는 이것은 헛되고 헛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또 노동 이상, 가정 이상의 선한 것을 예비하시어,

그를 사랑하는 자에게 영원토록 변치 않는 평강과 안식을 주신다.

 

사람의 지상선은, 학식 이외, 가정 이외, 달리 있다.

전도서는 명백하게 이것에 대하여 보여주는 곳은 없다.

 

하지만 성서는 다른 곳에서, 이사야서에 있어서, 예레미야서에 있어서,

4복음서에 있어서 로마서에 있어서 신약 전체에 있어서,

 

아주 명백하게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 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5 한글 역).

 

여기에 눈은 보아 족하고, 귀는 들어 만족한 것이 있는 것이다.

 

'내 아버지 내 어머니가 나를 버린대도,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라'(시편 27:10 일역)

 

여기에 부모보다도 친하신 분으로 내 영구한 보호자로서 계신 이가 있는 것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8-39 한글 역)고 있어서,

 

우주의 어떤 것으로서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의 끈,

즉 우리를 천상에 연결(이어주는 것)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기타 이에 관한 성서의 말씀은 이를 다 예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생의 만사만물 모두 다 헛된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오직 하나, 그렇다 오직 하나,

헛될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있기 까닭에 이로 말미암아,

모든 다른 것 까지가 헛되지 않기에 이르는 것이다.

인생의 지상선, 코헤레스 아닌 크리스천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학문은 아니다. 재능은 아니다. 철학은 아니다. 신학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에 추구하여 마지않는 생활의 모든 재료는 아니다.

금은 아니다. 은은 아니다. 보석은 아니다. 제왕이 쓰는 관은 아니다.

미술은 아니다. 음악은 아니다. 정원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노동도 아니다.

정원은 아니다. 충실한 남편과 아내도 아니다. 사랑스럽고, 씩씩한 건강한 자녀도 아니다.

 

그렇다. 성인의 덕도 아니다. 종교가의 신앙도 아니다.

우리는 전도서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지상선이 아닌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지상선은?

나사렛 예수이다.

 

인류의 죄 위해, 그렇다.

나의 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이다.

그렇다. 내 죄 위해 넘겨주신 바 되고,

나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시려 부활하신 그이다.

 

그는 사람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모든 창조된 것(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보존될 수 있다'고 하며,

'아버지는 모든 덕으로써 그에게 충만케 하셨다'(골로새서 2:3 일역)고 한다.

 

영생이라든가, 영광이, 그를 떠나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새의 뿌리에서 난 다윗의 후예(후손)인 의의 태양으로서

새벽(여명)의 새벽 별인 그는 실로 인생의 Summum bonum 즉 지상선이다.

 

그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고, 세인은 우리에게 물으리라.

그렇다. 지금 여기서 증거를 들 수는 없다.

다만 하나, 신자의 실험(체험) 따라서 말할 수가 있다.

 

예수에게 완전한 만족이 있는 것이다.

사람은 예수를 믿고, 그와 일체로 될 때

여기서 사람의 생명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영구히 피곤치 않는,

지치는 일 없는 굶주리는 일 없는

()마르지 않는 생애가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에 충실한, 의미 있는, 희망 있는 생애를 실험(체험)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의론은 아니다. 실험(체험)이다.

 

예수가 지상선임의 증거는,

그를 받은 자, 믿게 된 자는 그 이상으로 선을 구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를 사람에게 보여주신 그(예수),

사람을 만족시켜주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참조 : (요한복음 14:8-9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이에 있어서, () 크리스천의 입장에서 볼 때,

사람의 행불행의 판별은 아주 명백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예수)을 가진 자는 생명을 가지고,

그 아들을 가지지 못한 자는 생명을 가지지 못한다.'(요한15:12)고 있다.

 

예수를 믿는 자는 행복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불행이다.

 

생명(모든 행복의 기초)은 예수 안에 있으므로,

그를 떠나서 참된 행복은 없는 것이다.

 

또 그 안에 있을 때 모든 행복은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을 수 있을 때, 지식 있어도 행복이다.

지식 없대도 행복이다. 부해도 행복이다. 가난해도 행복이다. 혼자 있대도 행복이다.

많은 사람과 함께 있대도 행복이다. 가정의 즐거움도 행복이다.

가정이 즐겁지 못하대도 행복이다.

 

행복의 근원인 생명을 그 자신이 가지는 까닭에,

경우의 여하, 소유의 유무에 관계없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행복이다.

이에 반하여, 예수를 믿지 않고서,

어떠한 경우도, 어떠한 소유도,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아들을 갖지 못하고서는 학식과 예능은 도리어 비탄의 씨이다.

예수와 함께 하지 못하고서는 부귀는 도리어 몸을 해치고, 이를 유익하게 하지 못한다.

 

예수께서 계시는 가정만이, 참으로 행복한 가정인 것으로서,

그를 영접치 않고서 다른 조건은 다 완비한대도, 행복한 가정은 없는 것이다.

 

누가 행복한 자인가?

예수를 믿는 자이다.

 

누가 불행한 자인가.

예수를 믿지 않는 자이다.

 

예수는 실로 사람의 지상선이다. 전도서는 이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깨닫는데 이름의 계단으로 된다.

지상선이 무엇이 아닌지를 명백하게 보여주어, 이것을 읽는 자로 하여금,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지 않을 수 없게끔 한다.

 

그리고 이 용무를 하는 까닭에,

이 글()도 역시 성서의 일부분으로서 귀한 바가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이 선으로서 사모하는 것을 모두 부인하고,

유일한 선,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에게 소개하기 위한 길을 여는 것이다.

 

전도서는 이 마음으로써 읽어야 할 것이다.

이것을 보충하여 배우는데 신약성서로 할 때,

우리들은 이 글(), 욥기, 아가, 잠언과 어깨를 겨루어

결코 못하지 않은 글()임을 아는 것이다.

 

'성서는 모두 하나님의 묵시인 것으로서 교훈과 경제와, 또 사람으로 하여금 말씀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의(올바름)를 배우게끔 하는데 유익하도다'(디모데후서 3:16 일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서에 영생이 있다고 생각하여 이것을 상고하도다. 이 성서는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 5:39 일역)

(내촌의 “191511'성서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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