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한 인생 모습 2
성 경: [전 4:7-16] 내가 또 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8)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
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13)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14) 그는 자기의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났을지라도 감옥에서 나와 왕이 되었음이니라
15) 내가 본즉 해 아래에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다음 자리에 있다가 왕을 대신하여 일어난 젊은이와 함께 있고
16) 그의 치리를 받는 모든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전 4:7-8] 내가 또 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8)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
▶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
이는 그 주위에 아들이나 형제가 없는 고독한 자가 느끼는
인생의 허무함을 언급한 것이다.
특히 본절에서 고독한 자가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서도 끊임없이 일하며
부를 만족하지 않는 것은 그가 느끼게 되는 인생의 허무함을
더욱 극적으로 묘사해 준다.
한편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란 '눈'이 인간 내면의 욕망을
나타내는 외적인 한 기관으로서 표현되어지는 바
(2:10 또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들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을 억제하여 어떤 기쁨도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내 마음이 내 모든 수고를 기뻐하였기 때문이라. 이것이 내 모든 수고로 인하여 얻은 내 몫이었노라)
고독자가 자족함을 누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부에 집착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본절에서 고독자가 부를 축적하면서도
그 심령에 낙을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참 기쁨을 누리는 길은 자신의 노력이나 외적인 상황 여건에 의해서가 아니고
창조주 되시며 기쁨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에 의해 가능함을 엿보게 한다.
(2:24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과 스스로 수고하는 중에 자기 혼으로 하여금 좋은 것을 즐기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도다. 내가 이것도 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왔도다,
26 하나님께서 자신의 눈앞에서 선한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기쁨을 주시거니와 죄인에게는 모으고 쌓는 해산의 고통을 주사 그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며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로다).
[전 4: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
이는 앞절(8절)의 고독자의 허무함에 비해 뜻이 맞아 협력하는 자들의
유익성을 상대적으로 언급한 말로 보인다.
성경에서 두 사람의 협력의 유익성에 대해서는 여러번 언급되어지는데
그 최초의 암시는 창 2:18-24의 결혼의 유익성에서 보여진다.
그리고 예수님이 전도의 목적으로 그의 제자들을 둘씩 파송한 것도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눅 10:1 이 일들 후에 또 주께서 다른 칠십 명도 세우사 친히 가시고자 하는 각 도시와 지역으로 둘씩 둘씩 자기 얼굴 앞에 보내시니라).
그리고 주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고
말씀하셨다.
한편 혹자는 여기에서 '상'이란 이어지는 세 절에 나타나는
세 가지 실례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Lange).
그러나 그보다는 두 사람의 협력으로 얻을 수 있는
갖가지 유익들을 지칭한 말로 보는 것이 낫다.
[전 4:10]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
원문에 의하면 본절 서두에 '키'라는 원인을 나타내는 연결사가 있다.
이는 본절이 앞절(9절)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특히 본절의 묘사는 흔히 팔레스틴과 같은 거칠은 사막과 광야 지역에서
여행할 때 일어나는 사건들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이는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도 반드시 명심해야 할 사항이다.
갖가지 유혹과 실패로 인해 낙망하고 무의미와 회의감에 젖어 있을 때
옆에서 위로하고 붙들어 일으켜 줄 신앙의 동반자가 필요 요청되기 때문이다.
한편 본절의 '화'란 9절의 '상'이란 말과 대조를 이룬다.
[전 4:11]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
원문에 의하면 본절 서두에는 '또한', '역시'의 뜻인 '감'이라는 낱말이 있다.
이것은 본절이 앞절(10절)과 같이 9절에 대한 이유를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본절의 '두 사람'은 남편과 아내를 말할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팔레스틴 지역을 여행하는 여행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팔레스틴 지역은 낮에는 기온이 높으나 밤에는 기온이 급강하하여
매우 춥기 때문에 야영할 때 두 사람이 바싹 붙어서 자면
한결 따뜻함을 느끼게 된다.
* 참조 : (렘 36:22 이제 왕은 구월에 겨울 집에 앉아 있고 왕 앞에는 불타는 화로에 불이 있더라,
30 그러므로 주가 유다 왕 여호야김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다윗의 왕좌에 앉을 자가 그에게 없겠고 그의 시체는 버림을 받아 낮에는 열기를, 밤에는 서리를 맞으리라).
[전 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 문맥상 본절은
계속해서 여행자가 당하는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즉 한 사람이 여행할 때 강도가 덮칠 경우 꼼짝없이 강탈당하고 말지만
두 사람이 여행할 경우에는 능히 당해낼 수 있는
협동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것이다(M.A. Eaton, G, A. Barton).
▶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 여기에서 '삽겹 줄'이란 말은
앞절의 '두 사람'에서 하나를 더한 수를 뜻하며,
이와같이 어떤 수에서 하나를 더하는 식의 표현은 구
약 시대에 흔히 사용된 것이다.
(11:2 일곱에게 또 여덟에게 몫을 주라. 무슨 재앙이 땅 위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암 1:11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에돔의 세 가지 범죄 곧 네 가지 범죄로 인하여 내가 그것의 형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칼을 들고 자기 형제를 쫓아가며 불쌍히 여기는 것을 다 버리고 영구히 분노하여 찢으며 자기의 진노를 영원히 간직하였기 때문이라).
여기서는 둘 이상의 더 큰 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이라는 표현은 꼭 두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동할 수 있는 두 사람 이상의 많은 수를 암시한다(M.A. Eaton).
한편 유대인에게 있어서 '3'이란 완전 수를 상징하는 바,
'삼겹 줄'이란 그 단결된 힘의 온전함을 나타내는 말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단결된 힘은 신약 시대에 성도의 교회 생활
특히 기도 생활에서도 필수적이다.
(마 18:19-20 내가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자기들이 구할 어떤 것에 대하여 땅에서 한마음이 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해 그것을 행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거기에 그들의 한가운데 있느니라, 하시니라;
요 17:21-23 이것은 그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이 믿게 하옵소서.
22)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나니 이것은 그들이 하나 안에서 완전해지게 하려 함이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니이다;
행 1:14 이들이 다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이 되어 기도와 간구를 계속하더라;
엡 4:12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라;
빌 2:2 너희는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며 한 뜻과 한 생각이 되어 내 기쁨을 성취하라).
[전 4:13]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
본절에 대하여 혹자는 앞절들과 같이 고독의 어리석음(8절)
및 단결된 협력의 중요성(9-12절)의 주제와 연결되는 내용이라 말하며(M.A. Eaton),
혹자는 인간 사회에서 누리는 행운의 허무함을 다루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Lange).
그러나 이보다는 인간사에서 누리는 명성 또는 인기의 허무함을 다루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겠다(Delitasch, D.R. Glenn).
한편 본절에서 '소년'(옐레드)은 일반적으로 아동기를 벗어난
10대에서 40대에 이르는 자들을 늙은 노인에 빗대어 사용하는 말로 보인다.
(창 37:10 그가 그 꿈을 자기 아버지와 형들에게 고하매 그의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이 꿈이 도대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하니라;
삼상 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주를 섬겼는데 그때에는 주의 말씀이 희귀하여 열린 환상이 전혀 없었더라;
왕상 12:8 그러나 왕이 노인들의 권고 즉 그들이 자기에게 준 권고를 버리고 자기 앞에 서 있던 자들 곧 자기와 함께 자란 청년들과 의논하여;
14:21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유다에서 통치하였는데 르호보암이 통치하기 시작할 때에 나이가 사십일 세더라. 그가 주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도시 예루살렘에서 십칠 년 동안 통치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암몬 여인 나아마더라).
그리고 '둔하여'에 해당하는 '케실'의 원래 의미는
'살진'이나 여기서는 '미련한'의 의미로 유추된다(foolish, KJV).
특히 본절은 고대 근동 지방에서나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나이가 들수록
지혜로운 자로 간주되고 존경받았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레 19:32 너는 흰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나는 주니라;
욥 32:6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응답하여 이르되, 나는 젊고 당신들은 매우 늙었으므로 내가 두려워서 내 의견을 감히 당신들에게 보이지 못하였노라;
시 119:100 내가 주의 훈계들을 지키므로 노인들보다 잘 깨닫나이다),
본절은 왕의 어리석음을 더욱 극력하게 나타내준다 하겠다.
한편 본절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한 말인가 아니면 전도자 자신이
교훈을 위한 한 예증으로서 언급한 말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일반적으로 전자를 주장하는 견해들 중 탈굼역(Targum)은
아브라함과 니므롯과의 관계를,
미드라쉬(Midrash)는 요셉과 바로 또는 다윗과 사울의 관계를
언급한 구절이라고 본다.
그외에도 요아스(Joash)와 아마샤(Amaziah), 고레스(Cyrus)와
아스타지(Astyages) 등의 관계가 언급된 것이라고 주장되어지기도 한다.
반면 그레츠(Graetz)는 이를 헤롯 대왕과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의 관계를
말한다고 하며 히찌히(Hitzig)는 톨레미 필리파테(Ptolemy Epiphanes)와의
관계를 뜻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 본서의 저작 연대를 솔로몬 시대가 아닌
휠씬 후기 연대로 잡아야 하는 바 납득하기 힘들다.
따라서 본절의 내용을 가설적인 예화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겠다(Eaton, Wysliffe).
[전 4:14] 그는 자기의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났을지라도 감옥에서 나와 왕이 되었음이니라 -
이는 13절의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소년'이
'늙고 둔하여 간함을 받을 줄 모르는 왕'의 왕국에서
가난하게 태어났을지라도 후에는 그 지혜로 그 나라의 왕이 되었음을 뜻한다(Eaton).
그러나 본절의 내용이 실제 역사적 사건을 말하는지
아니면 하나의 가상적인 예화에 불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 의견이 나뉘이며, 만약 실제 역사적 상황을 말한다면
어느 시대,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13절에 언급된 것처럼 복잡하다.
[전 4:15] 내가 본즉 해 아래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버금으로 대신하여 일어난 소년과 함께 있으매
▶ 왕의 버금으로 대신하여 일어난 소년(하옐레드 하쉐니 아쉐르 야아모드 타흐타) -
직역하면
'그(왕)를 대신하여 뒤이어 일어난 두 번째(제이)의 소년'이란 뜻이다.
(the second child that shall stand up in his stead, KJV).
여기서 '두번째'(second)에 대해 혹자는 왕의 다음으로 권세 자리에 앉아
차후 그 왕위를 찬탈하는 제2인 선왕(先王)을 이어 왕으로 취임하는
후임자를 뜻하는 것으로 본다(Delitzsch, Wright, Knobel).
[전 4:16] 저희 치리를 받는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 저희 치리를 받는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
이는 지혜로운 소년이 후에 왕이 되어 백성들을 치리한다 할지라도
후 세대의 백성들이 그의 치정(治定)을 기억하거나 그의 공적등을
인정해 주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즉 소년이 치리하는 세대는 그 세대대로 역사 속에서 가고
그 후 세대는 그 후 세대대로 역사 속에서 진행되어 간다는 의미로서,
이는 1:11;2:16의 말씀을 연상케 하며
덧없이 흘러가는 이 세상 명성의 헛됨, 무상함을 암시한다.
(1:11 아무도 이전 것들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또 다가올 것들도 그 후에 있을 것들과 함께 기억되지 아니하리로다;
2:16 지금 있는 것이 훗날에 모두 잊힐 터이므로 지혜로운 자가 어리석은 자보다 영원히 더 기억되지 아니하나니 지혜로운 자가 어떻게 죽느냐? 어리석은 자와 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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