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9일 화요일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

 지혜의 유익함(1)

 

(7:7-10)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

8)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9)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10)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

솔로몬은 앞에서, 자기가 "해 아래서" "억압"에 대해 가끔 불평을 토로하였었는데, 이런 "학대"는 우울한 생각을 많이 불러 일으키며 덕행이나 경건을 크게 실망시키는 것이 된다.

 

. 그는 강해지고자 하는 유혹을 인정하고 있다(7).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너무나 흔한 사실이다. 현명한 자도 장기간에 걸쳐 너무 심하게 억압을 당하면 그답지 않게 말하고 행동하기 쉽다. 자기 열정의 목에 매둔 고삐를 풀어 버리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대해 외람되게 불평을 터뜨리거나, 자신의 구제 수단으로 비합법적이고도 불명예스런 방법을 사용하기가 쉽다. "의인들은 "악인의 막대기""자기들의 분깃"에 오래 "머물면" "자신들의 손을 불의에 내밀" 위험에 처하게 된다(125:3). 지혜로운 사람도 부당한 고난에 압박을 당하게 되면 자기 성미를 죽이고 자기 분수를 지키느라고 무척 고심을 한다.

"그것은 선물의 마음을 망하게 한다"(후반절은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선물들을 기꺼이 주고 싶어하는 관대한 마음의 소유자가 훌륭한 은사를 많이 부여받은 은혜로운 마음의 소유자라도 학대를 받음으로 인해 멸망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학대 당하고 그릇된 취급을 받는 자들을 크게 참작하지 않으면 안 되며, 비록 그들이 당연히 해야 할 만큼 분별있게 행동하지 않더라도 너무 가혹하게 그들을 비난해서는 아니 된다. 만일 우리의 경우가 그들의 처지와 같다면 우리도 어떻게 행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 그는 탐학에 반론을 펴고 있다. 우리는 압제자들의 권세와 성공을 초조하게 여기거나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학대자들의 성격은 매우 악하다(어떤 이는 그렇게 이해한다. 7).

만약 "지혜자"의 명성을 얻었던 사람이 "학대자"로 된다면 그는 "미친 자"가 된다. 그의 이성은 그에게서 떠나버려서 그는 울부짖는 사자나 어슬렁대는 곰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선물들" 즉 그가 받는 뇌물들이나 자기의 탐학으로써 거두어 들이는 것 같이 보이는 이득은 "그의 마음을 망하게 할" 따름이며 그나마 그에게 조금 남아있던 지각과 덕성을 아주 없애 버리고 만다. 따라서 그는 선망의 적이라기보다 연민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를 혼자 내버려 두면 그는 너무나 어리석게 행동하고 아주 맹렬히 돌진하다가 순식간에 자멸해 버릴 것이다.

2. 결과는 마침내 좋을 것이다. "일의 시작보다 끝이 더 낫다."

신앙의 눈으로 마지막이 어떠할지 내다보며 인내로써 그 종말을 고대하라. 교만한 자들이 그들의 가난하고 정직한 이웃들을 억압하기 시작할 때는 그들의 권력이 자기들을 끝까지 지지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승리를 거두고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것이라고 믿어 마지 않는다. 그러나 처음에 보던 것보다 마지막에 그들의 행동이 더 잘 판명이 될 것이다. 그들의 권력은 꺾어질 것이며, 압제로 거둬 들인 재물은 소모되어 없어질 것이다. 그들은 겸비케 될 것이고 낮아질 것이며 자신들의 불의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반면 무고한 피압제자들은 구출되고 보상을 받을 것이다. 저 교만한 압제자 바로와 모세의 협상은 벽돌 수를 두 배로 불리고, 만사가 절망적이었던 담판의 "시초보다" 이스라엘이 의기양양하게 인도함을 받고 나왔던 "끝이 더욱 나았다.“

 

. 그는 몇 가지 필요한 지시를 내림으로써 탐학에 대비하여 우리를 무장시킨다. 만약 우리가 압제로써 미치게 되지 않고자 하며 우리 자신의 영혼을 보존하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우리는 자비(自卑)의 옷을 입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이 교만한 자들은" 차마 압제받는 것을 견디어 낼 수 없어서 난폭하게 되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면 안달을 내게 된다. 그러한 것은 교만한 자의 마음을 부숴버릴 것이지만 겸손한 자의 수면은 깨뜨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만한 마음을 극복하라. 그러면 낮춰진 마음은 비천한 처지에도 쉽사리 조화될 것이다.

2. 우리는 인내를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고난 속에서라도 "끈기있는" 인내로 하나님의 뜻에 승복해야 하며 "기다리는 인내"로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나타날 결과를 고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참는 마음"이란 말은 "교만한 마음"의 대가 되는 말이다. 왜냐하면 겸손이 있는 곳에는 인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 어떤 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자인하는 자들은 어떤 일에 대해서도 감사히 여긴다. "그래서 참는 자는 교만한 자보다 더 낫다"고 일컬어진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더 손쉬운 존재이며, 남들에게는 보다 환영을 받는 자들이다. 또한 그들의 고난은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3. 우리는 격정을 지혜와 은혜로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9).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성급히 기대하고 지체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기대가 즉각 충족되지 않으면 화를 내기 쉽다. "교만한 억압자들이나 너희 고난의 앞잡이가 되고 있는 자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말라."

(1) "쉽사리 화를 내지 말며, 모멸하는 것이라고 성급하게 감지(感知)하고 분개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그 모욕에 대한 분개를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도 서두르지 말아라."

(2) "오랫동안 화내지 말아라." 분노는 지혜로운 자의 가슴에 들어올 수는 있으나 그러한 것은 여행자처럼 통과해 버리고 오직 "우매자의 품 안에만 머무른다." 그것은 거기에 거주하고 남아서 머무르며 가장 깊은 곳에, 가장 첨단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그래서 사랑스런 자처럼 끌어 안으며 품 속에 두고 쉽사리 헤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악마에게 자리를 내어 주지" 않을 만큼 스스로를 현자(賢者)로 입증하려는 자는 "해가 지도록 분을 품어서는" 안 된다(4:26, 27).

4. 우리는 현존하는 것을 될 수 있는대로 선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10). "옛날이 오늘보다 나을 것을 당연히 여기지 말며,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추구하지도 말아라. 왜냐하면 그 명제 자체가 진리인지를 네가 확인하기도 전에, 그 일의 이유를 따지고 그렇게 추궁하는 너는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너는 과거에 대하여는 전혀 낯선 자이고 현재에 대해서조차 유능한 판정을 내릴 수 있는 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네가 추구하는 일에 대해 만족할 만한 해답을 기대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네가 묻는 것은 지혜롭지가 않다. 더구나, 이 가정은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어리석은 비난을 하는 셈이다."

(1) 우리가 우리 자신이 몸담고 사는 시절이 악하다고 불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 보다 우리는 심성의 악함에 대해 불평할 만한 이유가 더 많다(만약 인간의 마음이 호전된다면 시절도 고쳐질 것이다). 또 시절이 그나마 더 악화되지 않으며 가장 역경의 시기에도 우리가 많은 자비를 향유할 수 있다는 데에서 감사할 만한 이유는 더욱 많다. 이런 은사들은 우리가 곤경을 참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편안하게 여길 수 있도록 해 주기까지 한다.

(2) 이전시대의 좋은 점을 칭찬하고 이 시대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평가 절하함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러한 어리석은 자들은 마치 과거에는 지금과 같이 불평스러운 것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부당하고 냉담하게 우리들을 이와 같은 타락의 세상에 보내셨고, 우리에게 과거와 같은 복된 시대를 주시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는 단지 불평과 불만족에서 기인된 것이며, 하나님과 직접 다투고 싶어하는 경향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우리는 본성의 보편적 쇠퇴나 도덕의 타락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하나님은 이제까지 항상 선하셨으며 인간은 언제나 악하였다. 만일 지금 시절이 어떤 면에서 이전 시대보다 더 나쁘다면 아마 다른 면에서는 더 좋은 점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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