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3일 수요일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이 있나니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해 아래 인생의 허무 2

 

성 경: [6:7-12]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하느니라

8)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뇨 인생 앞에서 행할 줄 아는 가난한 자는 무엇이 유익한고

9)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10) 이미 있는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이 칭한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11)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이 있나니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12)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 그 신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6:7]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하느니라 -

 

전반절은 전도자가 앞에서 인생의 가장 좋은 것을 먹고 마시며

낙을 누리는 것이라고 한 내용과 연관시켜 볼 수 있다.

 

(2:24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과 스스로 수고하는 중에 자기 혼으로 하여금 좋은 것을 즐기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도다. 내가 이것도 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왔도다;

 

3:12-13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 외에 그들 안에 다른 선한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며

13) 또 모든 사람이 먹고 마시며 자기의 모든 수고로 인한 좋은 것을 누려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아노라;

 

5:18 내가 지금까지 본 것에 주목할지어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그의 생명의 모든 날 동안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행하는 자기의 모든 수고의 좋은 열매를 즐기는 것이 선하고 마땅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그러나 전도자는 단순히 이 세상 것만을 인정하고 영생이나

초월적 세계를 믿지 않는 유물론주의자나 이 세상 쾌락만을 추구하는 자와는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 삶의 모든 축복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었기 때문이다.

 

(5:18-19 내가 지금까지 본 것에 주목할지어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그의 생명의 모든 날 동안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행하는 자기의 모든 수고의 좋은 열매를 즐기는 것이 선하고 마땅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19) 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부와 재물을 주시고 또 그에게 그것을 먹고 그의 몫을 취하며 그의 수고한 것을 기뻐할 권능을 주셨나니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로다).

 

한편 '식욕'에 해당하는 '네페쉬'는 원래 '영혼'(soul)이란 뜻이다.

혹자는 여기서 '영혼'이란 ''과 대조를 이루는 말로서

''이 육체적, 일시적 기쁨을 위하는 것이라면

'영혼'은 영적이며 영원한 즐거움에 의해 채워지는 것으로서

서로 비교되고 있다(Zockler).

 

그러나 이보다는 인간의 지, , 의의 인격을 형성하는 중심으로서

'영혼'의 기능중 본절에서는 감정적인 측면, 특히 음식에 대한

욕구와 관련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 식욕(영혼)은 차지 아니하느니라'라는 말 속에는

진정한 기쁨은 단순히 음식, 물질 따위의 외형적인 여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창조주 되시며 모든 기쁨과 만유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진정으로 채워질 수 있다는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 하겠다.

 

(2:24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과 스스로 수고하는 중에 자기 혼으로 하여금 좋은 것을 즐기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도다. 내가 이것도 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왔도다;

 

4:8 한 사람이 홀로 있고 대신할 자가 없으니 참으로 그에게는 자식도 없고 형제도 없도다. 그럼에도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으며 또 그의 눈은 재물로도 만족하지 아니하고 또 그가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해 수고하며 내 혼에게서 좋은 것을 빼앗는가? 하지도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며 참으로 쓰라린 해산의 고통이로다).

 

 

 

[6:8]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뇨 인생 앞에서 행할 줄 아는 가난한 자는 무엇이 유익한고 -

 

원문에 의하면 본절 서두에 연결사 ''가 있는데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이를 원인을 나타내는 연결사로 보나(KJV, RSV, NASB),

 

혹자는 '역시'의 뜻으로 이해하기도 한다(Lange).

어느 경우든 본절이 앞절과 연관됨을 나타낸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한편 본절에서 '지혜자''우매자'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 대해

어떤 이는 낙태되어 이 세상의 고난과 괴로움을 모르는 자와

부요하고 오래 사나 그 심령에 낙을 누리지 못하는 자에 관한 앞 내용(2-7)

연관되어진다고 보기도 한다(G.A. Barton).

 

그러나 그보다는 이 질문을 바로 앞절, 7절 내용과 연결시키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Lange). 즉 인간은 그의 입을 위하여 수고하나

그의 식욕(영혼)이 차지 아니하는 바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탁월한 처세술을 발휘하여

부귀와 명예를 누리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 중간격이라 할 수 있는 자들, 곧 비록 가난하지만

생활의 지혜를 늘 찾으려 애쓰는 자들도 있다.

 

물론 본절에서 '지혜자''우매자'란 하나님의 관점에서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를 가리키기보다는 인간 세상의 관점에서,

인간적인 지혜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6:9]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

 

바라는 바 적은 것이나마 낙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 머릿속에

근사한 공상만 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결국 이 또한

인생의 참 행복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혹자는 이와 관련하여 본절의 ''이란 인생을 즐기고

만족을 발견하는데 필요한 신체 부분 중 하나라고 보기도 하며(1:8, M.A. Eaton),

 

다른 사람은 '눈으로 보는 것이 ... 나으나''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즐기는 것이 나으나'(better is the enjoyment of what one has)라는 뜻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G.A. Barton).

 

그리고 루터(M. Luther)는 이를 '다른 좋은 것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현재의 좋은 것을 즐기는 것이 더 낫다'라고 번역하였다.

 

한편 '공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형 '할라크''걷다', '이리저리 다니다'는 뜻인데,

이를 '심령'(영혼)이라는 말과 연관하여 '영혼이 원하는 것'(what the soul desires)으로 KJV, RSV등은 좀 더 의역하여 '욕망의 방황'(the wandering of the desire)으로

번역하고 있다.

 

 

 

[6:10] 이미 있는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이 칭한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그 이름이 칭한 바 되었으며 - 존재하는 모든 것의 성격이나 특성이

이미 규정되어 있으므로(M.A. Eaton) 사람은 존재론적으로

스스로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일정한

질서와 법칙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뜻을 암시한다.

 

한편 주석가 위클리프(Wycliffe)는 본절이 어떤 것을 변화시키려는

인간의 자의적 노력이 전혀 무용하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보기도 한다.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 만물의 생성 소멸과 존재 법칙 및

인생의 모든 길흉화복을 주권적인 섭리로써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피조물이 반박하거나 대항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45:9 자기를 만드신 이와 다투는 자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질그릇 조각은 땅의 질그릇 조각들과 다툴지니 진흙이 자기를 빚는 자에게, 네가 무엇을 만드느냐? 할 수 있으며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냐?;

 

46:10 내가 처음부터 결말을 밝히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들을 옛적부터 밝히 알리고 이르기를, 나의 계획이 설 터이니 내가 나의 기뻐하는 일을 모두 이루리라, 하였노라;

 

9:20 아니라, 오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 대꾸하느냐? 지어진 것이 자기를 지은 이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하겠느냐?).

 

또한 이 말 속에는 참된 낙을 누리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주권에

철저히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문맥상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6:11]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이 있나니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

 

원문에 의하면 본절 서두에는 연결사 ''가 있어서 본절이

앞절과 연관되어 있음음 암시한다.

 

여기서 ''이란 문자적으로는 '데바림'으로서 대략

다음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된다.

 

(1) 개역 성경처럼 '(사건)'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Hengstenberg, Ginsburg).

영역본 KJV도 이를 지지한다.

 

(2) '말들'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Delitzsch, M.A. Eaton, G.A. Barton).

이를 지지하는 영역본들로는 NIV, RSV, NASB등이며, 70인역(LXX)'말들'(로고이)로 번역하고 있다.

이 경우 이 '말들'10절에서 암시되어지는 바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다투는 무익한 변론의 말들을 뜻한다 하겠다.

 

그러나 (2)를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에는 후기 연대설에 근거하여

본서의 내용이 구약 시대 말기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 및 엣세네파 등이

인생의 예정된 운명과 그로 인한 인간의 행동 간의 상호 관계에 대한 토론들

 

(바리새인들은 인간의 행동중 일부는 하나님의 작정하신 자 운명에 의해 또 다른 부분은 인간 자신의 의지에 의해 행해지는 것으로,

사두개인들은 인간의 모든 행동들이 하나님의 예정이나 작정에 의하지 않고 전적으로 인간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해지는 것으로, 그리고

엣세네파들은 사두개인들과는 반대로 인간의 모든 행동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에 의한 것으로 본다, Josephus)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나(Delitzsch, G.A. Barton)

 

일반적으로 본서의 저작 연대가 솔로몬 시대라고 보는 바,

이와 같은 논리 비약적인 주장은 그 근거가 불분명하다.

 

아무튼 본절의 의미는 앞절과 연관시켜 볼 때, 연약하고 무기력한 인생이

모든 일들을 작정하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거역하여 스스로 행하는 것들은

전혀 무익하고 오히려 더욱 헛되게 함을 암시한다.

 

 

 

[6:12]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 그 신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헛된 생명의 모든 날 - 전도자가 인생을 이와같이 규정한 것은

인간이 아담의 범죄 이후 정죄되고 사망 가운데 거하여

 

(5:16-21 또 이 선물은 죄 지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과 같지 아니하니 이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심판은 정죄에 이르렀으나 많은 범죄로 인한 이 거저 주시는 선물은 칭의에 이르기 때문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한 사람을 통하여 군림하였을진대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더욱더 생명 안에서 군림하리라.)

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생명의 칭의에 이르렀나니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로운 자가 되리라.

20) 또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가 넘치게 하려 함이거니와 죄가 넘친 곳에 은혜가 더욱더 넘쳤나니

21) 이것은 죄가 군림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것 같이 은혜도 의를 통해 군림하여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일평생을 헛된 수고와 근심 가운데서 보내기 때문이다.

 

(1:3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에서 무슨 유익을 얻으리요?;

 

2:23 그의 모든 날은 슬픔이며 그의 해산의 고통은 괴로움이니라. 참으로 그의 마음이 밤에 안식을 얻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그러나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모든 것이 새롭게 되어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이 땅에서는 나그네 생활을 하나

하늘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고후 5:16-17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가 아무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니 참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분을 더 이상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3:21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 복종시킬 때 사용하는 능력을 발휘하사 우리의 천한 몸을 변화시켜 자신의 영광스런 몸과 같게 만드시리라;

 

벧전 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두루 흩어진 나그네;

 

2:11 극진히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순례자인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혼을 대적하여 싸우는 육체의 정욕들을 삼가라).

 

 

그림자 같이 보내는 - '그림자'란 실체의 허상으로서 머물지 않고 쉽게

사라지는 것이다. 여기서는 인생의 날이 빨리 사라져 지나가는 것을 암시하는

비유적 표현이다.

 

(대상 29:15 우리는 우리의 모든 조상들같이 주 앞에서 나그네요, 임시로 머무는 자이며 또 땅 위에 있는 우리의 날들은 그림자 같아서 영구히 지속되는 날이 없나이다;

 

8:9 (우리는 겨우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며 또 땅 위에 있는 우리의 날들은 그림자이므로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느니라.);

 

14:2 꽃과 같이 자라나서 꺾이고 또한 그림자처럼 사라지며 계속해서 머물지 아니하거늘;

 

102:11 내 날들은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나는 풀같이 시들었나이다;

 

144:4 사람은 헛된 것과 같고 그의 날들은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으니이다).

 

 

그 신후(身後)- '신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하라''뒤에'(후에)란 뜻인데,

 

(1) 죽음 후를 말하는 것인지(Delitzsch)

(2) 단순히 알지 못하는 미래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나뉜다.

 

그러나 문맥상 (1)이 더 타당한 듯 보인다.

 

아무튼 본절은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이 무지하고 연약하며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지적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거나

그분을 거역하고는 결코 헛된 삶을 살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하겠다.

 

한편 신약에서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인간의 연약함과 무지에 대해 언급하면서

인간의 생명을 수증기(안개)에 비유했다.

 

(4:14 내일 있을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그것은 곧 잠시 나타났다가 그 뒤에 사라져 버리는 수증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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