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8일 월요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아름다운 이름의 가치와 슬픔과 기쁨에 대해

 

(7:1-6)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5)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6) 우매한 자들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솔로몬은 이 문단에 몇 가지 비상한 진리를 기록하고 있다.

이 진실들은 인간들 중에 생각 없는 부류, 즉 최다수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역설로 보이는 것이다.

 

. 덕목(Virtue)의 명예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재산과 쾌락보다 가치가 있으며 바람직하다.

(1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좋은 이름은 좋은 기름에 우선하여서 지혜로운 사람이면 누구나가 오히려 좋은 이름을 선택할 것이다.

여기서 "좋은 기름"이란 것은 땅의 모든 이익을 나타내며(땅의 소산 중 기름은 가장 값비싼 것 중 하나로 치기에), 감각적인 모든 즐거움을 나타내고(왜냐하면 이것은 "심정을 기쁘게 해주는 기름과 향수" 여서 "즐거움의 기름"이라고 불리우는 까닭에),

또 사람들이 위엄을 부리는 최고의 명예로운 칭호를 뜻한다(왕들은 기름 부음을 받고 왕으로 삼아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이름"은 모든 "재물보다" 낫다(22:1).

이 방명(芳名)은 곧 지혜롭고 인자한 이들의 지혜와 인자를 위한 이름이며 "정직한 자에게 대한 기억"이다.

이 아름다운 이름은 가장 "귀한 기름이 담긴 옥합"보다 낫다. 이것은 옥합 속의 기름보다 한층 더 마음에 은혜로운 즐거움을 가져다 주고, 사람에게 보다 쓸모있는 큰 기회를 부여해 주신 선이다. 이것은 "보배로운 기름을 담은 옥합"보다 더 멀리 가며 더 오래 지속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의 기름 부음에 대한 답례로 "좋은 이름"을 주셨고 그가 갚아 주신 이름은 복음서 안에서 향기로운 이름이 된 사실로 알 수 있다.

(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그가 언제나 더 유리하도록 갚아 주신다는 것은 확실하다.

 

.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우리가 세상에서 나가는 것이 우리가 세상에 들어오는 것보다 더 큰 호의가 된다.

"죽는 날""사는 날"보다 더 낫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이가 세상에 태어날 때" 기쁨이 있고, 임종시에는 애도가 따르지만 우리는 다르다.

만약 우리가 좋은 이름을 얻을 만큼 훌륭히 살았다면 "우리가 죽는 날"이야 말로 우리의 염려와 수고와 슬픔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며, 우리를 안식과 희열과 영원한 민족에로 이사시켜 주는 날이 될 것이다.

이 날은 이토록 많은 죄악과 고통과 허무와 번뇌의 세계 속에 첫 발을 디디게 하는 날인 "우리가 출생하는 날"보다 더 낫다.

우리는 불확실하게 태어났으나 선한 자들은 불확실한 중에 죽지는 않는다.

"우리의 출생일"은 영혼에 육체의 중한 짐을 지워주지만

"우리의 사망일"은 영혼을 육체의 부담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다.

 

. 장례에 가는 것이 축제에 가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유익할 것이다.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잔칫집" 즉 결혼식이나 헌당식에 "가서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서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게 더 낫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할 것이며 더 인상깊게 될 것이다. 우리는 기회가 있다면 이 양쪽을 다 떳떳하게 출입할 수 있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가나에 있는 친구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시는 가 하면, 베다니에 있는 친구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시기도 하였다.

아마 우리는 잔치집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선을 행하며 유익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주 헛되고 물거품 같은 존재이다. 또 매우 교만하고 안심하기 쉬우며, 육에 탐닉하기 쉬운 존재이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우리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낫다." 장례식의 화려함을 보러 가는 게 아니라 그 슬픔에 동참하고, 자기의 먼 집으로 떠나는 죽은 자와 길거리를 배회하게 되는 조상객들로부터 좋은 교훈을 얻으러 가는 것이다.

 

1. "초상집" 으로부터 얻어 낼 수 있는 유익한 점은 다음 두 가지이다.

 

(1) "모든 사람의 종말은 이것이다" 라는 것을 알려 준다.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한 "사람의 종국"이며 이 땅에서의 생을 끝맺는 시기이다. 그는 자기 집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죽음은 모든 사람들의 끝이다." 모든 사람이 "범죄" 하였으므로 "사망은 모든 사람에게 통용된다."

우리는 조객들처럼 우리 친구들에게서 버림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고, 또 죽은 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우리 친구들을 버려두고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타인들이 당하는 경우가 또한 우리의 몫이 될 것이다. 잔은 한 순배씩 돌아가고 있으며 곧 축배를 들 차례가 우리에게도 돌아올 것이다.

 

(2) "산 자는 이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라고 훈계해 준다.

인간들은 이 점을 마음에 둘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다.

영적으로 살아 있는 자들은 "그것에 유의할 것이며" 다른 모든 점에 유의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의 잘못이다. 왜냐하면 타인들의 죽음을 염두 해 두는 일보다 더 쉽고 자연스런 것은 없는 까닭이다.

좋은 설교를 마음에 두지 않으려는 자들도 아마 "이 점은 마음에 둘 것이며 저들의 나중 결말을 곰곰히 생각할 것이다."

 

2. 그는 이 점에 대한 증명을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보다 상세히 보완시키기 위해 다음 사실을 둔다.

 

(1) "자기 마음을 초상집에 두는 것"은 지혜자의 특성이다.

현인은 슬픈 일에 매우 가까우며 이것은 그의 지혜에 대한 증거이고 촉진제가 되기도 한다. "초상집"은 지혜로운 자의 학교이다. 그는 거기서 좋은 교훈을 많이 배우며, 그 곳에 진지하게 임함으로써 자신의 활동영역 안에 있게 된다.

그가 "초상집에 있을 때" 그의 "마음"은 자기 눈앞에 전개되는 죽음의 광경을 보게 된다. 더구나 그가 초상집에 있지 않고 "잔치집"에 있을 때도 그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어서" 슬픔 중에 있는 자들을 동정하고 있다.

 

(2) "마음을 열락하는 집에 두는 것"은 우매자의 특성이다.

그의 마음은 온통 즐겁고 유쾌한 장소에 쏠려 있다. 그의 온 기쁨은 놀이와 환락에 있으며, 즐거운 얘기와 즐거운 노래에 있고, 또 즐거운 사교와 환락의 낮과 밤에 있다.

그가 "초상집"에 있을 때는 항상 구속당하고 있는 셈이다. 그 때도 역시 그의 마음은 "연락의 집에 있다." 이것은 그의 어리석음으로서, 그를 더욱 더 어리석게 하는 촉진제가 되는 것이다.

 

. 우리는 환희에 차 있고 기쁨에 들떠 있는 것보다 근엄하고 진지한 것이 더 나으며 그것이 우리를 위해서도 더 좋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흔한 속담으로 "일 온스의 환락은 일 파운드의 슬픔과 맞먹는 가치가 있다"고 하는 말이 있다.

그러나 전도자는 "슬픔이 웃음보다 더 낫다"는 정반대의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슬픔이 우리의 현재 상태에는 더욱 어울린다. 많든 적든 간에 매일 죄를 범하고 고통을 입고 있으며, 타인들의 죄와 고통을 날마다 보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가 눈물의 골짜기에 있는 동안은 그 풍토와 기후에 맞추어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그것은 우리에게 이득이 된다. "왜냐하면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은 더 좋게 되기 때문이다."

 

1. 우리의 영혼에서 가장 좋은 것이 우리에게도 최선의 것이며 그것이 우리 감각에게는 불쾌한 것이 될지라도 "마음은" 그것으로써 "좋게 된다."

2. 슬픔은 흔히 우리를 진지하고 심각하게 만들어 주는 행복한 방편이 되며, 건강이나 재산이나 가족을 해치는 고난도 마음을 개선시킬 수 있게 한다.

즉 인간은 고난을 통하여 아주 깊은 감동을 받게 되어 자기의 기질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고, 겸손하고 온유하게 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물러서고 죄를 참회하며 의무에 마음을 기울일 수도 있게 된다.

Vexatio dat intellectum - "번민은 지성을 예리하게 만든다.

perissem nisi perissem - "내가 만일 비참하게 되지 않았다면, 나는 망했을 것이다."

이 말은 반대로 얼굴의 명랑함과 희희낙락으로 인해 마음은 더욱 악화되며 공허하게 되고, 물욕과 정욕에 더 어둡게 된다는 것이다.

그 마음은 더 안도감을 느끼고 세상과의 사랑에는 더욱 깊이 빠져드는 반면 하나님과 영적인 것에서는 더욱 소원해져서

(21:12 그들은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14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

급기야는 아모스 65, 6절에 나오는 자들이나 에스더 315절의 "왕과 하만"처럼 "요셉의 고난"에 전혀 무관심하게 되고 만다.

 

. "어리석은 자들의 노래"로 우리의 부패한 마음을 충족시키기 보다는 "지혜로운 자의 책망"을 통해 우리의 부패를 정화시키는 것이 훨씬 더 낫다.

(5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지혜로운 자의 지식에 접하기를 매우 기뻐하고 그들의 권장이나 위로에는 더욱 솔깃해 하는 자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도 "그들의 책망을 듣는 일"은 좋아하지 않는다.

즉 아무리 지혜롭게 견책하더라도 사람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지적당하는 일은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이 못된다.

왜냐하면 "훈계의 책망은 생명의 길"이며(6:23), 책망의 소리는 "우매자들의 노래 소리" 만큼 듣기 좋지는 않으나 보다 유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자의 책망을 듣되" 인내와 즐거움으로써 듣는 것은 지혜의 표시오,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이다.

그러나 "우매자의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은 마음이 공허함을 나타내는 표적이 되며, 동시에 마음을 더욱 공허하게 하는 길이 된다.

"우매자의 웃음소리"와 같은 일시적 쾌락에 사람이 그토록 혹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이와 같이 덧없는 즐거움은 "솥 밑에 지펴놓은 가시덤불"에 비유하는 것이 적절하다. 가시나무가 탈 때는 소리만 요란하게 나고 화염이 잠깐은 크게 일어나지만 곧 꺼져 버리고 그 재를 흩날리게 된다. 그리고 발열량으로는 무엇을 끓일 정도의 열을 얻어내는 데에는 거의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정도의 열을 얻자면 계속 타오르는 불길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시끄럽고 순간적이어서 진정한 기쁨의 본보기는 아니다. "이것도 또한 헛된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기만하여 파멸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니 "그 환락의 끝은 비애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복된 구주께서는 우리 운명을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해석해 주셨다.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너희가 웃을 것임이다."

"이제 웃고 있는 너희에게 화가 있나니, 너희가 슬퍼하며 눈물을 흘릴 것임이다"

(6: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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