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1일 토요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부활의 활살력

 

고린도후서 212-17: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17)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대개의 사람은 생각한다.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으로서 반드시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고, 실로 그러하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는 것이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매우 비통스러운 일이지만 그러나 부득한 일이다.

 

밀을 녹이는 태양광선은 점토는 이것을 굳게 한다.

태양이 나쁜 것 아니다. 이것을 받는 자가 나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명약과 한 가지이다. 그 공험이 저대한 만큼 그 해독도 또한 따라서 격심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한 것이다.

멸망하는 자 위해서는 죽음의 향기로서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구원되는 자 위해서는 생명의 향기로서 그들을 생명에 이르게 한다(2:16).

 

같은 복음은 생명의 원인으로도 되고 또 죽음의 원인으로도 된다는 것이다.

같은 것을 늙은 시므온은 아기 예수께 대하여 그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야기해 말했다.

이 아이는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사람들의) 반대를 받을 표징으로 세워졌다(누가복음2:34).

 

예수는 많은 사람의 멸망의 터로 되신 것이다.

이 의미에 있어서, 그는 사람의 구주는 아니다.

그 퇴망자(頹亡者)이다. 실로 악귀는 그에 정면으로 맞대고 말했다.

 

'아아, 나사렛의 예수여, 당신이 와서 우리들 멸합니까'(누가복음 4:34)

 

그리고 예수는 지금도 많은 사람을 멸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복음은 반드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증명이다. 하나님이 무엇인지를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공받아 사람의 운명은 결정되는 것이다.

 

이것을 받을 것인가? 그 사람은 구원되는 것이다.

이것을 물리칠 것인가? 그 사람은 멸망될 것이다.

 

실로 복음에 접하는 것은 누구에게 있어서나 그 사람의 위기이다.

멸망되거나 흥하는 것은, 이에 대하여 그의 태도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

 

세상에 악인은 많다.

그러나 아직 복음에 접한 일이 없는 사람 중에 극악한 사람은 없다.

복음은 사진술에 있어서의 현상제 같은 것으로서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나타내는 것이다. 선인(善人)의 선도 나타내고 동시에 악인(惡人)의 악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에 의해 악이 탄로되고, 이 악이 제거되는 일 없이 그대로 복음을 버리는 자는 실로 화 있을 진저이다.

 

그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서 극악한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비 그리스도교국에 있어서 상상할 수도 없는 악인이 그리스도교국에 많이 있는 것은 전혀 이것 때문이다. 무서운 일이면서 동시에 또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오인은 아는 것이다. 오인 복음 전파를 직으로 하는 자는 반드시 사람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오인이 아주 충실하게 결여됨이 없이 부활을 전파한대도 그 결과로서 반드시 오인에게 듣는 자는 모두 구원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사실은 그 반대여야 할 것이다.

만약 오인의 복음 전파로서 결여하는 데가 없다면 그 결과로서 많은 타락 신자를 낼 것이다.

 

사람의 죄를 드러나게 할 수 없는 복음은 거짓된 복음이다.

만약 살리는 것이 아니면 죽이는 정도의 복음이 아니면 그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은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고 있다.

 

우리는 많은 사람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란케 하지 않았다. 성실에 의해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이다(17)라고.

 

혼란하다는 것은 [위화한다]는 뜻이다.

우유에 미즙을 섞고, 사탕에 백아를 타는 것 같은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도를 [위화한다]는 것은 그대로를 말하지 않고서 이것을 꾸미고 또는 이것을 완화하여 듣는 자의 소망(기대)에 맞도록 하는 일이다.

 

이렇게 하여 혹은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가 있는지도 모른다.

즉 그들을 교회의 회원으로 하고 구원되었다. 구원되었다. 평안할지어다. 평안할지어다라고 하여 그들의 마음을 달랠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인 동시에 또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말씀 그대로를 전할 것을 구하신다. 이로 인하여 우리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않고 또 반드시 그들을 구원하려 않고,

 

성실로서,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 안에서(17)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실로 고통스러운 직분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우리들은 사람에 대해 이 엄정한 태도로 나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물론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란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마음인 것은 성서가 명시하는 바이다.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들은 사람의 친구로서의 우리들과 다르다.

 

우리들이 성서를 손에 들고서 서는 때는 사람의 사사로운 벗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복이다.

 

우리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굽힐 수는 없다.

 

양날의 칼보다도 예리한 말씀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또 죽이기도 한다.

의지의 자유를 부여받은 사람은 이 위기에 처하여 죽임당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 있어서 그가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우리들은 물론 하나님이시라 해도 간섭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의 최대의 영예는 그 의지의 자유에 있어서이다.

그가 천국에 오를 수 있는 특권과 함께 그가 지옥에 떨어지는 위험이 있다.

 

모든 선사(善思)에 그 반대의 악사(惡事)가 함께 한다.

그리고 복음은 은혜와 함께 그 중에 저주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아 주의하여 복음을 들으라.

옛말을 듣는 마음으로 함부로 이에 오지 말라.

경솔하게 이것을 듣고서 견딜 수 없어서 이것을 버리고 깊은 타락의 심연에 빠진 많은 사람을 보라.

 

복음을 듣고서 살라.이것을 버리고 그 죽임 당하는 바 되지 말라.

 

*내촌감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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