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10일 월요일

우리는 낙담치 않는다. 우리의 겉 사람은 무너져도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

  

영혼의 독립

 

고린도후서 416

 

이 때문에 우리는 낙담치 않는다. 우리의 겉 사람은 무너져도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고린도후서4:16.일본어역).

 

 

사람은 이중성이다.

그는 겉 사람과 속사람으로 되어 있다.

육과 영으로 되어 있다.

옛 나와 새로운 나로 되어 있다.

 

어떻게 하여 하나의 내가 둘의 나로 되었는가?

이것을 설명할 수 없대도 그것 그러함은 명백하다.

 

사상으로서 단일성이야말로 바랄만한 일이지만도 실제로 나타난 사실로서는 이중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내게, 겉의 나와 속의 내가 있다.

 

그리고 나는 아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겉의 나는 잠시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속의 나는 영원적이라는 것을.

겉의 나란 나의 육체이다.

나의 가족이다. 나의 사회이다. 나의 나라이다. 나의 영혼 이외의 모든 것과 모든 관계와이다.

 

이것에 대하여 속의 나는 나의 영혼이다.

나의 의지이다. 나의 사상이다. 나의 영혼의 어버이신 영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이것에 형체 없고, 양 없고, 무게 없다고 해도 그것이 있음은 내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명백하다.

 

나의 영혼은, 나 자신으로서 그렇게 본 나는 이중성이 아니라 단일성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은 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속의 나는 있으나 없는 것처럼 생각되고,

겉의 내가 참된 나로서 영혼은 육체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바가 없는 것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물질주의인 것으로서, 요즈음 유행의 마르크스주의 같은 것은 그것이다.

그렇지만 공공연하게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제창하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대개의 사람이 물질주의자인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다.

 

즉 사람이라는 사람은 대개는 경우의 자녀이다.

그 생명의 중심은 육체와 그 경우에 있어서 있다.

문화라는 것은 경우의 개선이다.

 

겉을 선히 하여 인생 전체를 선히 하려는 것이 서양문명의 정신인 것으로서, 그 정신이 가장 명료히 나타난 것이 현대의 미국 문명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물질주의자는 아니셨다.

 

[사람이 만일 전 세계를 얻는대도 그 영혼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랴]고 그는 말씀하셨다.

 

그는 또 말씀하셨다.

 

[사람의 생명은 소유의 넉넉한데 있는 것 아니라](누가복음12:15).

 

그리고 그리스도뿐 아니라, 인류의 대교사로서 높임 받는 사람은 모두 물질주의 반대의 영혼주의 또는 이상주의의 지지자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단떼, 밀튼, 그리고 현대의 소크라테스로 불리는 평민 철학자 칸트(7141), 그들은 모두 사람의 귀함은 그 영혼에 있고 영혼이 육체와 경우를 지배하여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다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근대의 물질문명이 아무리 왕성하다 해도 이들 대교사의 확신을 뒤엎을 수는 없다.

 

그리고 제일 슬퍼해야 할 것은, 근대의 그리스도교까지가 물질화 된 것이다.

지금은 그리스도 교회까지가 영혼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외계의 어떤 것으로서 유지하는 것이 아니면 신앙을 유지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들이 교회, 제도, 의식의 필요를 고창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은 속사람의 독립을 믿지 않는다.

겉 사람에 의하지 않고서는 속사람은 설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신앙유지 위해서 갖가지 수단 방법의 강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그 신앙을 유지해 온 신자가, 일조에 어떤 사고 때문에 겉의 지지를 제거당하면 그는 홀로 설 능력이 없어서

하나님 없고, 희망 없고, 본래의 불신자 또는 그것 이하로 되어버리는 것이다.

 

다만 오로지 좋은 경우(환경)에 자기를 두어 영혼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까닭에, 교회를 떠나고 목사의 보호를 잃고서 혼자 이 세상과 상대하기에 이르면 곧 본래의 불신 상태로 귀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약한 자로서 사람을 만들지 않으셨다.

 

[사람의 속에는 영혼이 있다. 전능자의 기식이 이에 총명을 주신다](32:8)고 욥기에 말하는 대로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혼자 설 수가 있다.

그의 중심은 속사람인 것으로서 겉 사람은 아니다.

그러므로 겉 사람이 무너져도 속사람이 무너지지 않을뿐더러, 겉 사람이 무너지면 그 반대로 속사람은 날로날로 생장하여 날로날로 새로워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 안에서 사람만은 경우(환경)의 자녀가 아닌 것이다.

그만이 죽음에 이길 수가 있다.

 

하나님께 의지할 때, 사람은 경우의 지배자이고 그 노예는 아니다.

그는 선한 경우에 놓여 질 때,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것을 만들기에 노력하나 그러나 그 자신은 경우를 떠나 혹은 경우 이하에 관계없이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애당초 도덕이라 하고 종교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의 영성을 기르는 것이 아닌가?

즉 사람으로 하여금 물질세계를 떠나서 홀로 설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것을 하지 못하고서 영적 세력 이외의 힘을 빌어 사람의 영성을 키우려 한다.

이는 종교 도덕의 실력 부정이 아니고 무엇이랴?

 

사람은 약하다 약하다 하여 언제까지든 유지하려는 까닭에, 그러한 영혼은 그 건전한 발달을 이룩할 수 없어 마침내 하나님과 함께 설 수 있는 초대의 영예 특권을 얻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칸트는 이러한 사람을 일컬어 병적애라고 한다.

그리고 근대인 전체가 이 질병에 침범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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