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그릇에 담긴 보배
성 경: [고후 4:7-15]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13)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15)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 보배 -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을 가리킨다.
▶ 질그릇 - 성경에는 질그릇에 대한 비유가 종종 사용된다.
가령 4:7에서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도공과 질그릇에 비유하면서 질그릇이 스스로를 빚을 수 없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고,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애 4:2에서는 질그릇의 깨어지기 쉬운 속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묘사되고 있으며,
(애 4:2 시온의 아들들이 보배로워 정금에 비할러니 어찌 그리 토기장이의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딤후 2:20, 21에는 금그릇이건, 은그릇이건, 나무그릇이건, 질그릇이건 간에 주인이 쓸 수 있도록 깨끗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딤후 2:20-21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이런 것들 가운데, 공통적인 것은 질그릇의 가치가 형편없다는 것이다.
본문에서도 질그릇은 앞에서 언급된 '보배'와 극명하게 대조되어 가치없는 것으로 비유되어서 바울 자신과 성도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표현은 인간의 육체가 갖는 한계성과 연약성을 나타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육체를 부정하거나 인간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복음의 무한한 영광과 숭고함에 비교된 인간의 상대적 무가치성을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복음의 존귀함과 그것을 전파하는 사람에 대한 대조는
(1) 복음의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게 하고,
(2) 인간의 연약성을 통해 하나님의 완전한 능력이 나타남을 보여주며,
(3) 인간의 교만과 자랑을 방지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고후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 '우겨쌈을 당하여도'는 `즙을 짜기 위해 포도를 짓누르다'는 뜻으로 바울을 비롯하여 당하는 고난이 얼마나 극심한 것인가를 말해준다.
성도들에게 고난이 있는 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앞 절에서 언급된 대로 성도는 질그릇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그릇 안에 있는 보배, 즉 '능력의 심히 큰 것'의 원천인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기 때문에 질그릇은 결코 깨어지지 않는다.
바울이 선교 활동을 하면서 자기를 지탱해 준 힘의 원천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추상적 이론이나 관념적 논리가 아니라 실제적인 그의 사역에서 전인격적으로 경험한 데서 기인한다.
(6:3-10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5)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전 4:9-13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15:30-31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실로 바울에게 있어 자신은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切感)하는 것이 그가 가장 강해질 수있는 비결이었다.
(1:8-9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이 은유적 표현은 군대에서 사용하는 전투적인 표현이다.
그 의미는 대적들이 포위하여 한곳에 몰아넣는다 하더라도 결코 움직일 틈이 없도록 궁지에 몰아넣지는 못한다는 것이다(Tasker).
[고후 4: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
바울이 계속해서 성도들이 당하는 혹독한 육체적 고통을 사실화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혹자는 이것을 영지주의와의 대결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Barrett).
즉 바울은 영지주의자들이 육을 무시하고 영적인 것에만 의미를 두는 것에 반대하여 육이 당하는 고통을 사실화하고 도리어 육의 고통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본절과 앞절을 통해,
(8절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바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그 어떠한 고난도 성도들을 궁극적으로 패배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주의 영이 있고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죽음으로부터의 자유가 있다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다.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 본절과 11절은 바울이 독특하게 사용하는 역설적인 표현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존재 양식이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고난을 통한 영광이고, 죽음을 통한 생명이다.
본문은 성도로서 신앙적 삶을 지켜나가고자 할 때 예수의 죽음과 같은 고난의 과정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바울은 이것을 육체로 경험했고 그의 실존에는 이런 십자가의 흔적이 남아있다.
(6:5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고전 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갈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여기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기꺼이 감내하는 성도들에게 부활을 통한 궁극적인 구원이 주어질 것이라는 예시가 나타나고 있다.
성도들은 주를 위한 고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종말론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부활함으로써 영원히 승리하게 된다.
(롬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골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패배의 표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승리의 표징이다.
(엡 3: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고후 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
'우리 산 자'라는 표현은 죽음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만약 성도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죽음에 넘기워 진다면 그것은 곧 그의 몸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고 있는 증거이다.
그것은 죽을 육체가 영적인 몸으로 변화되는 것을 뜻한다.
(고전 15:35-49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여기서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모습으로 그날을 맞아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육체적 생존'이 주의 재림에 확실히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주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재림에의 확실한 참여를 보장한다.
[고후 4: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
본절에서 바울은 '죽음 가운데서의 생명'이라는 논지를 1:6, 7에서 언급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받는 고난'과 관련시켜 말하고 있다.
(1:6-7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곧 바울이 당하는 고난이 심할수록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더 좋은 영적 상황이 전개된다는 것이다(Harris).
바울은 자신의 고난이 메시야적 고난을 감내(堪耐)했던 예수의 십자가의 삶을 본받는 것이라고 이해했음에 틀림없다.
예수께서 만인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감내하셨던 것처럼 바울 자신의 고난과 시련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유익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골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고후 4:13]13)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같이 - 이 문구는 시 116:10의 인용이다.
(시 116:10 내가 믿는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그런데 시 116:10의 히브리어 본문은 다음 세 가지로 해석된다.
(1) 나는 믿었다. 고로 나는 말할 것이다.
(2) '나는 굉장히 고난 받고 있다'고 말했을 때조차 나는 나의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3) 나는 믿는 고로 말하였다.
이상에서 바울이 의도한 것은 (3)의 해석으로 여겨진다.
(3)은 본절의 맛소라 본문(Massora Text)에 해당하는 70인역(시 115:1)에 대한 해석으로서 '내가 믿는고로 말하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 '에피스튜사 디오 엘랄레사'의 의미를 그대로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I be-lieved;therefore I have spoken.", NIV).
결국 바울은 본절에서 70인역의 시 115:1을 인용했다고 볼 수 있다.
(시 115: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옵소서)
시편 기자는 절망적인 질병과 그에 수반되는 낙담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헤아리며,
(시 116:1-1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2)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3)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4)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6)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7)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9)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10) 내가 믿는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11)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장이라 하였도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가장 적절하게 헌신할 수 있을까를 고려하였다.
(시 116:12-19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13)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14)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16)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17)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8) 내가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을지라
19) 예루살렘아, 네 가운데서, 여호와의 전 정에서 내가 갚으리로다 할렐루야).
바울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여서도 복음을 굳게 믿었고 항상,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16)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믿는 바 복음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Harris).
▶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 혹자는 본문의 '같은 믿음'이 고린도 교인들과 같은 믿음을 뜻한다고 보지만(Calvin) 그보다는 시편 기자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시편 기자가 가졌던 믿음, 즉 어떠한 고난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구원해주신다는 믿음이 바로 바울 자신의 믿음이며 그것이 그로 하여금 어떠한 상황에도 절망하지 않고 사도직을 계속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단지 바울 자신을 구원해 주신다는 개인적 차원의 믿음을 넘어 만인을 구원하는 복음에 대한 믿음이다.
[고후 4: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 바울의 사도적 삶은 철저히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다.
예수께서 대속의 고난을 당하셨던 것처럼 바울도 십자가의 고난을 본받았다.
바울이 온갖 죽음의 위협과 시련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일으켜진 것처럼 바울 자신도 죽음에서 일으켜진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엡 5: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골 1: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 종말론적 구원의 날 바울과 그의 성도들은 함께 구원의 기쁨을 나누며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날 바울을 비롯하여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하게 되겠지만 불신자들에게는 정죄(定罪)의 심판대가 기다리게 될 것이다.
바울은 이 영광스러운 미래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열어주기 위해 온갖 비방과 오해와 육체적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바울은 이런 사실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이해되어지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고후 4:15]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
바울은 다시 1:6의 주제로 되돌아간다.
(1: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모든 고난 뿐만 아니라 그의 믿음과 전도, 이 모든 것들이 오직 고린도 교인들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게 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것이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분명한 자의식이다.
여기에는 바울이 자신의 이익을 생각할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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