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세 획득의 필요
고린도후서 4장 17절-5장 10절
바울의 전도가 위대했음을 아는 사람은 대개는 그는 태어날 때부터 강의의 사람이었던 것으로 상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정반대였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본래(생래) 소심한 사람(겁쟁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가 쓴 서간을 보아 잘 알 수 있다.
특히 고린도 후서를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고린도 후서는 바울이 쓴 서간 중에서 가장 잘 그의 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글이 보여주는 바울은 결코 강의(剛毅), 용감(勇敢)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이 어느 쪽인가 하면 여성적인, 신경과민의 사람이었다.
그는 친구를 잃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친구의 사랑을 계속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방법 수단을 다 했다.
그는 울었다. 노했다. 분개(원망)했다. 호소했다.
그는 그의 친구가 그의 적의 술수 중에 빠져 그에 대하여 오해하기에 이른 그 오해를 풀고자 하여 누누이 그의 심정을 그들 앞에 피력하여 마지않았다.
만약 유자의 소위
[군자, 무게 없으면 즉 위엄 없다]는 표준으로서 헤아린다면 고린도후서에 나타난 바울은 결코 군자는 아닌 것이다.
바울은 죽음을 무서워했다. 그 점에 있어서 그는 결코 용자는 아니었다.
죽음을 경히여긴 점에서는 여순(중국요동반도서단의 군항으로 노일전쟁 당시 요지)공격에 있어서 그 산야에 뼈를 드러낸 무수한 일본 병사는 훨씬 바울 이상의 용자였다.
우리는 이 장막에서 신음하며 하늘에서 주시는 우리의 집을 옷 같이 입기를 깊이 원했다. 실로 입는 것을 얻으면 벌거숭이 되는 일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장막에서 무거움을 지고서 신음한다. 이것을 옷 같이 벗기를 원치 않고 그것을 옷 같이 입기를 원한다. 이는 생명에 죽을 것이 삼킨바 되기 위해서이다](5:2-4).
이것 확실히 죽음을 무서워하고 이것을 싫어한 이가 발한 말이다.
바울은 죽음의 고통을 경과하지 않고서 하나님 나라에 태어나기를 절망했던 것이다.
육의 생명은 이것을 싫어했으나([이 장막에서 신음한다]고 했다),
그러나 영의 몸(하늘에서 주시는 집)을 입는 일 없이 육의 몸을 벗기를 싫어했다.
마치 겨울의 추운 아침, 어린아이가 잠옷을 벗기는 일을 싫어하는 것과 같다.
잠옷은 이것을 벗는대도 벗음과 동시에 온포가 곧 그에게 입혀지기 원한다.
그같이 바울도 또 육의 옷을 벗음과 동시에 영의 옷이 입혀지기를 원했다.
그는 죽음의 쓴 경험을 거치지 않고서 하나님 나라에 태어나기를 원했다.
거의 무리한 요구라 해도 좋은 정도이다.
그러나 그는 많은 실험에 의해 그의 이 요구가 채워지지 못함을 깨달았다.
그는 그도 역시 모든 사람과 한가지로 죽음의 쓰라린 경험을 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지각하여 실망치 않았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이것을 안다. 우리가 땅에 있는 장막(육체) 만약 무너지면 하나님이 주시는 집(영체) 하늘에 있다(5:1)고.
이 일절에 있어서 주의하여 읽어야 할 것은 [만약]이라고 짧은 말이다.
[가령 내 소망 같이 되지 않고 만약 만일 보통 일반의 사람 같이 육체패괴의 경험을 거치지 않는다 해도 그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집 즉 영체는 우리 위해 예비되어 하늘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죽음을 싫어했다. 싫어했기 때문에 이것을 피하려 했다.
그리고 그의 재세(在世) 중에 일어날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해 죽음의 고통을 면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이 종내 면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자, 그는 무덤 저편에서 재생 부활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는(하나님) 성령을 질로서 우리에게 주셨다](5:5)고 했다.
*참조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개역한글)
즉 하나님은 지금 이미 우리들이 육체에 있는 동안에 성령의 질을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우리들이 육체를 떠난 후 그 전부를 받을 것은 조금도 의심할 것이 아니라고 했다.
바울의 내세욕은 매우 강한 것이었다. 그는 자기의 사후의 생명을 확인할 수 있기까지는 만족할 수는 없었다.
바울의 내세관이 과연 진실한 것이냐 아니냐는 별문제로 하고서 생래 소심한 그가 세상에서 유례없는 용자로 된 그 이유는, 전혀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내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던 일에 있었음은 의심 없는 일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의해 내세 존재와 그 영광을 확인할 수 있어서 겁나(怯懦)를 버리고 강의(剛毅)해 졌던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강하다](5:6)고 하였다.
이 확신이 생겨서부터 그에게 무거운 것이라고는 전혀 없어졌던 것이다.
그는 위험 많은 이 세상에서 강의 용감한 사람으로 되었다.
그가 즐겨 몇 번이고 쓴 그리스어의 Parresia는 잘 그의 이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 보인 것이다.
[파르레-시아]는
[담대히 말한다](고린도후서3:12)로 되고
[용기](디모데전서3:13 - 한글개역은 담력)로도 역되고
[거리낌 없이](빌레몬서 8절 - 한글개역은 담력)로 도 역된다.
이 세상의 거예 포폄에 태연하게 됨을 말한다.
전혀 자유롭게 되는 일, 어깨를 펴고서 대로를 활보함의 뜻 자유 자제로 장해 많은 이 세상을 무인지경을 가듯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는 말이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게 됨으로서 이 자랑스러운(부러워할 바)상태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사람은 종교가 내세적이 되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현세적 종교를 말하고 종교로서 현세에 있어서 실익 있는 것이 되게 하려고 힘쓴다.
물론 희망을 내세에만 둘 때 그 폐해야 말로 결코 적지 않다.
하지만 종교를 현세적이 되게 하는데 비하여 그 해란 계수할 것 못된다.
사람은 본래 현세적이다. 그는 내세의 것은 이를 생각하지 않기를 원한다.
그에게 현세적인 것을 권함의 필요는 조금도 없다.
물이 낮은 데로 처하듯 사람은 땅에 속하는 자이다.
그리고 종교는 사람을 땅에서 하늘로 향해 끌어올리기 위해 필요하다.
종교로서 명백하게 내세적이 못될 때 세상에 내세를 보여주는 것은 달리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종교의 본령은 내세이다.
정치 경제의 본령이 현세이듯 종교의 본령은 내세이다.
내세를 명백히 보이지 못하고 여기에 들어가는 길을 명백히 가르치지 못하는 종교는 종교라고 하기에 족하지 못한 것이다.
불교 그렇다. 회교 그렇다. 그리스도교 그렇다 이다.
예수의 복음, 바울의 복음, 베드로의 복음, 요한의 복음은 모두 분명히 내세와 이것을 이어받을 길을 보여준다.
내세를 분명히 하지 못하고서 종교는 현세를 구원할 수는 없다.
종교는 정치 경제와는 달라 현세로서 현세를 구하지 않는다.
종교는 사람을 현세의 밖으로 인도하여 그에게 내세 획득의 도를 제공하여 간접으로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현세를 구하는 것이다.
지금의 교회 신자의 그리스도교는 이름은 종교이나 실은 문명교이다.
왈(曰) 교육, 왈 자선, 왈 윤리, 왈 도덕이라고.
그들은 내세에 대하여 아는 것은 아주 적은 바 있다.
그들은 내세에 대하여 깊이 알고자 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세를 말해도 이는 사자를 위로 하는데 있어서 하는 수 없이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세를 알아 이에 들어갈 특권을 얻어 기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자는 아니다.
그들의 지망은 세인의 그것과 한가지로 현세에서 진보 개량에 있다.
오늘 그리스도교라고 하면 자선을 의미하고 가정을 연상한다.
그들은 천국 그것을 구하지 않고서 다만 주로 지상에서 천국을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렇게 종교를 오해하여 그들은 천국도 보여줄 수 없고 또 그들의 목적인 지상에 천국을 볼 수도 없다.
세상에 미숙한 자로서 소위 현세적 종교 같은 것은 없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영생과 그 영광에 참여할 길을 확고히 할 수 있어 생래의 소심한 바울은 강의 비류 없는 자로 되었다. 그리고 다만 바울에 한하지 않는다.
종교가라는 종교가로서 신앙을 가지고 세상을 인도하고 가장 확실한 의미에 있어서 이것을 구원한 자는 먼저 현세에서 이탈하여 적을 내세에 옮긴 것이다.
[우리의 나라는 하늘에 있다]고 한 바울이 땅에 있어서 가장 강한 자였다.
우리나라의 호넹 같은 이도 또한 그 한 사람이다. 그 같이 본래 유화의 사람도 극락왕생의 확신을 얻고서부터 혼약자제의 사람으로 되었다.
사람은 내세를 알기까지는 아직 환희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여기에 참된 환희가 있는 것이다.
하늘은 불타 없어지고 땅은 타버리고 만물을 녹아버린대도
[우리는 그(하나님)의 약속 따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 기다린다. 의(義) 그 가운데 있다](베드로후서3:13)는 것을 알 때, 여기서 대우주는 내 것으로 되고 천상천하 대장를 방해하는 것 없음을 느끼기에 이르는 것이다.
의 그중에 있고 환희 그 중에 있고 자유 그 중에 있고 모든 선한 것은 그 중에 있는 것이다.
이 환희와 이 자유가 없어질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강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찬미와 영광, 시와 노래는 한없이 이 감사의 샘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하나님께 있어서 가장 깊은 것은 사랑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깊은 것은 신이다.
하나님은 사랑으로서 사람에게 임하시고 사람은 믿음으로서 이에 응답한다.
여기서 하나님과 사람과의 참된 화합이 행해진다.
하나님의 기쁨, 사람의 구원, 천지의 조환, 신인의 합일이란 이것이다.
하나님은 영생을 사람에게 주고자 하신다.
그리고 사람은 신앙으로서 이것을 받는다.
주시려는 사랑 받으려는 믿음. 종교라 하고 영생이라 하는 것,
결코 해득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의 신, 율법도, 예언도, 복음도, 신학도 이것으로서 다 그치고 있는 것이다.
[적은 무리여, 두려워 말라. 너희 아버지는 기꺼이 나라(천국)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누가복음12:32)라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로서 나라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우리는 이제 다만 감사하여 아버지의 호의를 믿어 이것을 받으면 그 나라는 우리의 것으로 되는 것이다.
로마서 1장 17절에
[하나님의 의는 이것(복음)에 나타나 신앙에서 신앙에 이르렀다]고 있다.
신앙에서 신앙에 이른다는 것은 유명한 신학자 프레테릭 C 바우르(10권 112역주)의 해석에 의하면
[신앙으로서 시작하여 신앙으로서 끝난다]는 것이라고 한다.
바울의 이 말의 가장 완전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철두철미 신앙으로서 배수해야 할 것이다.
신앙에 의해 의롭다함을 얻고, 신앙에 의해 거룩해지고, 신앙에 의해 영생의 은사를 받는다.
죄를 해탈되는 것도 신앙에 의한다. 성덕으로 나아가는 것도 신앙에 의한다.
최후에 나라(천국)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도 신앙에 의한다.
신앙에서 신앙에 이른다. 신앙으로서 시작하여 신앙으로 끝난다.
연구로서가 아니라, 덕행으로서가 아니라, 물론 난행 고행, 수양 연달로서가 아니라
단지 신앙으로서 단순한 신앙을 가지고서 영생 획득의 은혜에 참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내세는 소망하여 어쩔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영생은 구하여 얻어지지 못하는 것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데 믿음으로서 하여 내세도 영생도 이것을 내 것으로 할 수가 있다.
프랑스의 유명한 성자 페늘롱 이르기를
[너는 세상에 대하는 때 다리위에 서서 발아래로 흐르는 물을 보는 태도로 나가라 물을 마음대로 흐르게 하라 하지만 이것으로 하여금 네 심신에 닿지는(저축치는)말게 하라]고.
이 세상의 비평과 그 질투, 비평과 참해, 배제와 흉살 20세기의 오늘이라 해도 이 세상은 지금도 죄의 세상이다. 예토이다. 우리들 이것과 운명을 함께 하여 이것과 함께 멸망치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다리 위에서 서서 발 아래로 세상의 탁수가 흐르는 것을 보는 태도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헐뜯기고, 학대되며, 배척된대도 가령, 또 죽임을 당한대도 우리들의 영혼을 더럽히지 않는 지위에 몸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의 것이 아닌 자의 태도, 세상을 돕는대도 세상에 더럽혀지지 않는 지위에 몸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다리 위]란 무엇인가? 하늘 높은 곳이 아니랴?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 그곳에 영혼의 거처를 정하여 우리는 다리 위에 서서 지상의 요란에 처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옳다. 우리로 하여금 다리 위의 사람이 되게 하라. 천의 사람 되게 하라.
20세기의 오늘에 있다 해도 1세기의 바울처럼 12세기의 호넹(7권167역주)처럼
현세의 사람이 아니라 내세재주의 사람이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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