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4일 화요일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새 언약의 영광

 

성 경: [고후 3:6-11]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고후 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새 언약의 일군 - '돌비와 심비'의 대조가 '율법과 복음'의 대비를 나타낸다는 것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3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바울은 자신을 '새 언약의 일군'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옛 언약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적대자들과 자신을 뚜렷이 구별시키고 있다.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 '의문'(그람마)은 본래 알파벳의 '문자'를 나타내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점차 `기록된 것' '문서'''을 의미하는 말로 발전되었다.

 

이 말이 본문에서 뜻하는 바는 '율법'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프뉴마)은 썩어질 육과 대비되는 '영혼', 혹은 '생명'을 뜻하며 본문에서는 '복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바울은 본문에서 '의문'''이라는 상징적 개념을 통해 '옛 언약''새 언약'을 대비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들을 다음과 같이 구체화 시킬 수 있다.

 

(1) 적응 대상에 있어서 - 옛 언약은 육적 이스라엘에 적용됨로써 민족적 한계를 갖는 반면,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새 언약은 영적 이스라엘, 즉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됨으로써 민족적 한계를 넘어선다.

 

(2) 언약의 성립 과정에 있어서 - 옛 언약은 하나님께 대해 순종을 맹세하고 피의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써 성립된 반면,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의 제물이 되심으로써 성립되었다.

 

(3) 언약을 수행하는 방법에 있어서 - 옛 언약은 행함으로 하나, 새 언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한다.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4)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언약의 결과에 있어서 - 옛 언약은 죽음을 낳지만, 새 언약은 생명을 낳는다. 따라서 옛 언약에 대해 새 언약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히 시간적인 차이를 넘어 완전한 질적 차이를 가진다.

 

한편 혹자는 본문의 '의문''''인간적인 것''신적(神的)인 것'의 대비로 이해하기도 한다(Barrett).

 

전자는 삶의 중심을 인간에 둠으로 인해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되고, 후자는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둠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이다.

 

또한 칼빈(Calvin)'의문'이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외적인 설교'를 뜻하고, ''이란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사람의 마음속에 실제로 작용하는 '생명력있는 가르침'을 뜻한다고 본다.

 

 

[고후 3: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의문의 직분 없어질 영광 - 바울의 논의의 주제가 언약에 관한 것에서 직분에 관한 것으로 바뀌고 있다.

 

본절에 묘사되고 있는 장면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이 새겨진 두 개의 석판을 수여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오는 출34:29-35의 장면이다.

 

(34:29-35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31) 모세가 그들을 부르니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32)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하고

33)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34)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그 논점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할 율법을 선포하는 직분을 부여받은 모세도, 그 직분으로 인한 영광 때문에 사람들이 그 얼굴을 보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영혼을 살리는 복음을 전파할 직분을 가진 바울의 영광은 더할 나위 없이 크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돌에 새긴 것' , '율법'이 본래는 선한 것이었고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으나 사람들이 범죄 하였기 때문에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는 설명이 없이,

 

(7:10-12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단도직입적으로 '의문'은 곧 죽게 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아마 고린도 교인들도 그런 정도의 이해(理解)는 되어 있었던 듯하다.

 

한편 본절의 '없어질 영광'은 바울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에 관한 유대교의 전승(Targum Ongelos)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유대교의 전승에서는 모세의 얼굴의 광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반박하면서 그 광채는 '잠시 있다가 없어질 잠정적인 것'이었음을 밝히고 있다(Martin).

 

 

 

[고후 3: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 의문의 직분에 주어지는 영광은 일시적이지만,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는 직분의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며 거기에 비취는 광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하는 빛'(4:6)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빛이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생명을 가져다 주는 빛이다.

 

한편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는 구절은 미래형이나 이를 시간적인 미래로 보아 주의 재림을 가리킨다고 이해해서는 안 되며 다만 논리적인 미래로 보아야 한다.

 

영의 직분이 현재적인 것 이듯이,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그 영의 영광도 현재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고후 3: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 - 본절에서는 '의문의 직분'(7)'정죄의 직분'으로 '영의 직분'(8)'의의 직분'으로 대체되고 있다.

 

율법은 하나님의 엄격한 요구 앞에 인간을 세워 율법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행위를 정죄한다.

 

(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나 복음은 인간의 죄를 사면해 주고 인간으로 하여금 의롭게 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정죄의 직분에 영광이 있다면, 의의 직분에 얼마만큼의 영광이 있느냐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한편 본문에 나오는 ''의 개념은 바울이 그 말을 사용할 때의 용법에 비추어 이해해야 하는 바, 윤리적인 무죄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의 성립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에 기인한다(Barrett).

의의 직분 속에는 그것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현존하는 것이다(Kasemann).

 

 

[고후 3: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더 큰 영광을 인하여 - 본절에서는 옛 언약에 대한 새 언약의 우월성이 극도로 부각되고 있다.

마치 태양이 떠오르면 달의 밝기가 소멸되어 버리는 것처럼, 율법으로 말미암는 모세의 영광은 복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인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바울으로 인해 율법의 직능이 무효화되었다고 하는 바울의 율법 이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사도들은 더 이상 구속력을 갖지 못하는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법 아래 있게 된 것이다.

 

(8:7-13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8)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9)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10)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11)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12)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고후 3: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

 

율법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지나간 시대에만 시한부적으로 존재 의의를 가질 뿐,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천국에는 없어질 것이었다.

 

그에 반해 복음은 영원한 것이고 다른 것에 의해 대체(代替)되지 않는 것이다.

 

(13:31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이미 지나가버린 것과 이제 시작되는 영원한 것의 영광을 비교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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