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신자의 단일
갈라디아서 3장 28절 :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한글개정개역성경)
[그러한
자중에는 유대인
또는 그리스도인
혹은 노예
혹은 자주,
혹은 남자
혹은 여자의
구별 없다.
그것은 너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유대인도 그리스(헬라)인도 없고
노예도 자주도
없고 남자도
여자도 없다.
너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체이다](갈라디아서 3:28)
이와 비슷한 말씀이 골로새서 3장 17절이다.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
혹은 할례
있는 자나
할례 없는
자나 혹은
미개인이나 스구디아인
혹은 노예
혹은 자주의
구별 없다.
대저 그리스도는
만물 위에
계시다. 또 만물
안에 계시다]
신자는 모두 신앙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도 될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된 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하면
그리스도에까지 침례 된 자는(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침례-한글역),
그리스도를 옷 입었기 때문이다(3:27).
그러한 자에게는 인종 또는 문화,
경우 또는 사회상의 지위,
다시 또 성의 구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일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대의이다.
이상을 전후의 관계에서 떼어 읽으면 [인간무차별]이라는 것이 된다.
인종의 차별 없다.
지위의 차별 없다.
남녀의 차별 없다는 것으로 된다.
러시아(소비에트)인의 공산주의 그대로인 것으로서
실로 두려운 가르치심으로 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렇게 그리스도교를 해석한다.
그리스도교는 인종,
상하,
노약,
남녀의 차별을 인정치 않는다.
사해동포를 가르치는 종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그러한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또 그러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차별은 있다.
차별은 하나님의 정하신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이에 따라 행하는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른 곳에 있어서 가르쳐 말한다.
[아내
된 자여
남편에게 순종하라.
남편 된
자여 아내를
사랑하라.
종 된
자여 주인에게
복종하라.
주인 된
자여 종을
측은히 여겨
인도하라] 의 일종으로 보는 것은 극히 천하게 이것을 해석하는 자이다.
아버지,
아버지이고 아들,
아들이고,
임금 임금이고,
신하 신하인 것은 유교에 있어서와 한 가지로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도 역시 사람이 밟아야 할 도이다.
바울은 또 인종 국민의 차별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사도행전 17장 26절에 이르기를
[또
이 하나님은
모든 백성을
한 피로
만드시고
모두 땅의
전면에 살게
하시고 미리
그 때와
사는 경계를
정해주시었다]고.
[한
피로 만드셨다]
그 의미에 있어서 사해동포이다.
[그때와
사는 곳의
한계를 정해
주셨다] 그 의미에 있어서 인종,
국가의 차별이 있다.
만민에게 공통한 것이 있다.
또 상이 하는 것이 있다.
이것을 묵과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에 의해 차별을 제거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바울은 단지
너희 유대인 또 그리스도인 야만인 또는 스구디아인,
노예 또는 주인은 모두 하나라고 하지 않는다.
너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한다.
이것은 중요한 조건이다.
사람으로서 태어난 것만으로 무차별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 있어서 일체라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무차별을 가르치는 것 아니다.
그리스도 신자 일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저것과 이것은 전혀 별문제이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맺어지고 또 상호 결합되는 것이다.
신자의 생명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자기에 죽고 그리스도 그에게 있어서 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라는 것은 서서히 없어지고 그리스도는 그 안에서 날로날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신자가 그러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라틴인 아우구스티누스도 독일인 루터도 미국인 무디도 그 점에 있어서는 변함없다.
고금동서의 모든 그리스도 신자가 그러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이다.
그들 사이에 인종,
국가,
교회 등의 차별은 없다.
차별을 인정하는 것은 신앙의 얕은 증거이다.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 깊이 자기를 던지면 던지느니 만큼
자기가 없어지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것이다.
생명은 다만 하나,
그리스도이시다.
그 생명에 의해 살 때 유대인 없다.
그리스도인 없다.
노예 없다.
주인 없다.
남자 없다.
여자 없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또는 일체로 되어서는 부족하다.
원어에 있어서는 [한 사람]이다.
영어의 One
man을 참조하라.
신자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이다.
고금을 통하여 전 세계의 신자가 한 사람으로 된다는 것이다.
실로 웅대한 사상이다.
그러나 공상은 아니다.
사실이다.
교회로 역된 에클레시아는 이것이다.
그리스도는 신랑,
에클레이사는 신부,
그리고 신부는 다만 한 사람,
그리고 그녀는 전세계의 백성 안에서 택해지는 신자로 이룩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의 한절로서 인종적 차별의 철폐를 주창할 수는 없다.
그것과 이것은 전혀 별문제이다.
그것은 정치문제 또는 문화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앙문제이다.
전자는 미결문제이다.
후자는 기결문제이다.
나는 그리스도 신자로 되었다고 해서
구미인에게 형제로서 취급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구미는 이름뿐의 그리스도교국으로서
참된 그리스도교국이 아닌 것은 누구도 알고 있다.
하지만 신앙을 가지고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이상
나는 또 전 세계의 신자와 함께 동일한 생명으로 사는 것은 다툴 수 없다.
성탄절의 깊은 의미는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가 태어나신 때 내가 태어난 것이다.
당신이 태어난 것이다.
에클레시아라고 칭하는 아름다운 세계인이 태어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이전에 있던 것 아니다.
그리스도 이외에 있는 것 아니다.
이것은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자로서 비로소 세상에 임한 것이다.
성탄절의 의미가 해득되는 데는
자기가 확실하게 그리스도의 생명의 분여에 참여치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성서의 문자나 역사를 아는 것만으로서 해득되지 않는다.
또 과학 철학으로서 설명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자기에게 그 생명이 임하여 이것을 실험하고 해득되는 일이다.
그리고 이 생명은 혈육을 통하여 주어지는 생명은 아니다.
[이러한
사람은 혈맥에
의하지 않고
정욕에 의하지
않고
사람의 뜻에
의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에
의해 난
것이다](요한복음1:13)라고 있다.
이 실험을 가지고 복음서에 있어서의 예수 강탄의 기사를 읽을 때
우리들은 조금도 이상히 여기지 않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