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1일 목요일

갈라디아서를 소개한다





갈라디아서 전부의 통독을 요한다


그리스도교는 어떠한 가르치심인가?
중심적 진리는 무언가?
사람은 어떻게 하여 그리스도 신자로 되는가?
그가 걸어야 (해야 )길은 무언가?

이러한 근본문제에 대하여 명백하게 간단하게 필요가 있다.
우리들의 연구가 정세에 걸치는 결과로서,
우리들이 전체를 그저 보고서 놓칠 위험이 있다.

그리스도전을 연구하여 주의 생애를 배움과 동시에,
우리는 생애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때로 연구 방면을 바꾸어,
우리들의 신앙을 새로이 함의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원시적 그리스도교이다.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하여 생겨났는가? 그것을 ,
우리들은 종종 자기의 신앙을 다시 수가 있다.

그리고 그것 위해서는 서간의 연구가 필요하다.
얼핏 보기에는, 복음서가 원시적 그리스도교를 전하는 것이고,
서간은 설명인 듯이 생각되나, 사실은 반대이다.

기록된 순서에서 말한대도, 서간이 먼저 집필되고, 복음서는 후에 집필된 것이다.

먼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생겨나고,
후에 그의 생애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나,
신앙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전, 복음서가 저술된 것이다.

예수를 알고서 그를 믿기에 이르는 경우도 없는 아니다,
그러나 가장 허다한 경우는, 먼저 그를 믿고 그런 후에 그를 알아,
신앙을 강하게 하려는 경우이다.

사람인 예수를 알고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신자가 실제로 취할 길은 아니다.

먼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에게 이끌리고,
다음에 사람으로서 나타나신 그를 알고자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근대인이 비판적으로 예수를 연구하고 신안의 길로 들어서려 하다가,
언제나 실패로 끝나는 것은, 이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신약성서가 기록된 순서를 살펴본다면,
첫째로 기록된 것이 데살로니가 서간이었으리라.
다음에 기록된 것은 고린도 서간이 아니면 갈라디아서 였으리라,
4복음서 같은 것은, 빨라도 그것보다는 10, 늦게는 40 후에 기록된 것이다.

그리고 가장 간명하게 초대신자의 신앙을 전하는 것은 갈라디아서이다.
() 나타난 신앙으로서 그리스도교는 생겨난 것이다.

극히 간단하다. 그리고 심원하다.
듣는 것만으로, 해득되는 자에게는 있는 신앙이다.
별로 깊은 학문에 의한다고 하는 아니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밝히 눈앞에 나타나심](갈라디아서3:1) 의해
믿었다는 것이다.

간단명료한 신앙을 전하는 것이 갈라디아서이다.
그러므로 실로 귀한 글이다.

글에 의해, 복잡한 사상 중에 헤매는 신자가,
신앙의 단순으로 돌아올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글이기 때문에, 갈라디아서는 오늘까지,
세계의 신앙의 역사에 있어서,
번이건 인류의 신앙을 부흥케 하는 역할을 했다.

다른 예는, 두고서라도,
16세기에 있어서의 루터로서 시작된 구주의 종교개혁은,
글로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루터의 손에 있어서, 갈라디아서는,
구주인을 사도시대의 신앙으로 돌아가게 하는 기관으로 되었다.

안간은 의식에 의해 구원되는 아니라,
철학, 기타 정교 복잡한 사상에 의해 구원되는 아니고,
죄멸 위해 하는 난업, 고행에 의해 구원되는 아니고,
다만

[ 위해 자기를 버리신 ,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서] 구원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듣고서 구주전체가 각성했던 것이다.
과거 400년간의 구미의 진보 번영은,
원천을 루터의 신앙에 발했다고 하여 조금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실로 사람을 괴롭히는 병적사상의 거미집을 털어버리게 하는 것으로서
바울의 서간 같은 것은 없다.
단순한 신앙 앞에, 의식도 교권도, 교회가 과하는 신앙개조도,
교회를 변호하는 변쇄철학도, 와록처럼 부서졌다.

하나님은 실로 바울로서 선한 무기를 신자에게 남겨주셨다.
신자는 이것으로서 시대의 미상에서 벗어날 수가 있고,
자기를 성결케 하고, 사회와 교회를 근저에서 다시 서게 수가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의 축도(縮圖)라고도 또는 대요(大要)라고도 칭할 수가 있다.

양에 있어서, 전자는 후자의 거의 3분의 1이다.

로마서가 16, 433절인데 대하여,
갈라디아서는 6 149절이다.

갈라디아서는 로마서 같이 의론이 세밀치 않다.
요점을 보이는 것으로 그친다.
따라서 간결하다. 준열하다.

로마서를 읽고서 중심적 진리를 놓치기 쉬우나,
갈라디아서를 읽고서, 그것이 무엇인지는 일목요연하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의 길잡이로서 수가 있다.
복습용으로 수가 있다.

설하는 바는 동일하다.
사람이 구원되는 것은 신앙에 의하는 것이고,
행위에 의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설명하는 방법이 다르다.
그리고 갈라디아서는 단도직입적으로,
성령의 검으로서, 사람의 영혼의 진수에 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불과 6장이다. 이것 시간이면 읽을 있다.
이것을 장씩 3부로 나눈다.

1부는 바울의 자기변명이다.
1, 2장이 그것이다. 정신을 표명하는 것이 유명한 발단의 말이다.

[사람으로부터(사람에게서)아니고 사람에 의해서(사람 통하여서)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고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사도 바울](1:1)이라고.

이것은 바울의 자기소개로서 동시에 갈라디아서간 전체의 소개이다.

바울은 같은 사람, 갈라디아서는 같은 글이다.
진정한 저술은 저자라고 하는데 갈라디아서는 바울이라고 하여 틀리지 않는 것이다.

2부는 바울이 전한 복음의 기초적 진리의 선언이다.
3, 4장이 그것이다.

진수는 로마서에 있어서와 같이 예언자 하박국의 말이다. 이르기를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갈라디아서3:11).

그리고 요의를 바울의 체험으로서 부연설명한 것이 유명한 2 20절의 말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박혔다. 이미 내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시는 것이다.
지금 내가 육체에 있어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위해 자기를 버리신 ,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서 사는 것이다]

나를 쯔노하즈의 집으로 찾아온 프랑스의 신학자 모군이 말했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갈라디아서 2 20절에 확실 부동의 기초를 갖는다].

3부는 5, 6장으로 이룩되고 그리스도교 도덕의 천명이다.
로마서 12 이하에 필적하는 것이다.
요지를 말하는 것이 5 16절의 말씀이다.

[나는 말한다. 너희는 영에 의해 행하라. 그리하면 육의 욕을 채우려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17 이하가 근본의의 부연주해이다.
그리스도교 도덕은 이러한 ,
세상의 도덕과는 근본정신을 달리한다.
이같이 하여 갈라디아서는 간단한 글이다.

그리고 간단한데 능력이 있다.
크리스천 됨은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다.
그가 구원되는 것은 신앙에 의한다.
그의 선행은 그의 신앙에 따라 하나님에게서 주어지는 성령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간단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이는 누구도 받을 있는 신앙이다.
듣고서 믿을 있는 신앙이다.
특별히 연구를 쌓을 필요는 없다.

[이튿날, 바울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갔다. 성에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을 제자로 했다](사도행전14:20-21) 있다.

사도들은 하루 동안에 많은 신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복음이 간단하지 않으면 효과를 나타낼 수는 없다.
사도들은 갈라디아서에 기록된 같은 간단한 신앙을 전했기 때문에
단시일 동안에 로마제국 전체에 걸쳐 허다한 신자를 일으키고
유력한 교회를 건설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인에게 보낸 서간이다.
갈라디아의 갈라는 프랑스 고대의 사람의 이름 갈리 또는 가을과 가지이다.
아일란드인으로서 대표되는 켈트인종에 속하는 인민이다.
(켈트-게르만 민족보다 이전에 유럽 중앙부에서 살았던 민족. 지금 영구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이란드 등지에 후손이 살고 있다).

일파가 기원전 230년경, 지금의 소아시아, 터기 본국의 중보에 이주했다.
지금의 터기 정부를 앙고라 정부라고 한다.
앙고라는 옛날 앙쿠라로서 갈라디아인의 수도였다.

켈트 인종의 기질은 지금도 옛날과 다름없다.
쾌활하고, 성급하고, 신사상을 받는데 쉽고, 버리기 잘한다.
진취의 기성에 부하고 보수의 능력 부족,
그러므로 돌격의 용기에 부해도 근소한 장해를 만나도 좌절하기 쉽다.

지금의 아일란드인이 그러하다.
옛날의 갈라디아인이 그러했다.

1 6절에 있어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은혜로서 너희를 부르신 것을 너희가 그렇게 속히 떠나
다른 복음에 옮긴 것을 의아하게 여긴다]

말이 켄트민족의 기질을 나타내는 틀림없다.

그들이 처음 바울에게 들을 그를 열애, 경모해 마지않고

[ 눈이라도 뽑아내어 내게 주려고까지 했다](갈라디아서4:15 참조).

그로 하여금 말하게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근소한 이유 때문에 열심은 없어지고,
그들은 바울을 떠나 그에게서 받은 복음을 버렸던 것이다.
바울의 실망이란 형언하기 어렵고 실망에 격노되어 것이 갈라디아서이다.

갈라디아인의 이반이 얼마나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인지는
서간 이외에 있어서 그가 일언도 그들에 대하여 말하지 않은 것으로 있다.

그의 친구인 누가에 의해 기록된 사도행전이
갈라디아에 대해 기록하는 것이 아주 빈약한 것으로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만사를 지배하여 갈라디아인의 이반과
바울의 실망이 원인, 동기로 되어 갈라디아서가 이루어지고
인류는 신앙갱신에 관한 대경전을 받게 것이다.

갈라디아인의 치욕, 바울의 명예, 인류의 행복이다.
그리하여 배교자까지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릇으로서 쓰인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그리고 우리들 일본인에게 갈라디아인의 약점 없을까?
마음 변하기 쉬운 것은 일본인의 특질이다.
아침에 믿고 저녁에 버린다.

[ 생명은 내게 생명의 빛을 전해준 선생에게 바친다] 맹세한 일본인으로서

벌써 이미 나를 떠나고 내가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버리고 일본인,
특히 일본의 청년 남녀는 들어 말할 수도 없다.
뿐만 아니라,
단순한 신앙에 머물러 있기 어려운 점에서도 일본인은 아주 갈라디아인에 흡사하다.

일본인은 켈트인의 피를 섞은 프랑스인에 흡사하여 종교를 예술화하고자 한다.
어느 점으로 보나 갈라디아서의 연구는 일본 신자에게 있어서 특히 필요하다.

*내촌감삼의 갈라디아서 주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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