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0일 수요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2



스티그마

갈라디아서 6 17 :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스티그마도 또한 그리스어이다.
성서에 있어서는 다만 1, 갈라디아서 6 17절에 씌어져 있는 말이다.

[ 누구도 나를 괴롭히지 말라 그것은 몸에 예수의 낙인을 찍혔기 때문이다]라고 있다.

[낙인]으로 번역되어 있는 것이 말이다.

스티그마의 본래의 의미는 [찌르다](쏘다)이다.
그것에서 자문 또는 낙인의 의미가 나온 것이다.
노예가 소유주의 이름을 몸에 파던 같은
병졸에 대장의 이름을 몸에 태워서 흔적을 지니게 하던 같은
이것을 일컬어 누구누구의 스티그마를 몸에 지녔다(시트그마가 몸에 찍혔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몸에 소유주의 이름을 표하는 것은
치욕인 까닭에 스티그마는 [치욕] 의미를 통하게 되었다.

낙인찍힌 자는 사람에게 손가락질 받았기 때문에
스티그마는 좌절(꺼림) 의미도 가지기에 이르렀다.

[찌름]에서 옮겨 [자문], [낙인] 되고 그것에서 화하여
오욕, 악명으로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몸에 예수의 낙인을 찍혔다] 것은
자기는 예수의 노예라고 것과 같은 일이다.

그가 로마서의 처음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바울]이라고 것은 의미이다.

그리고 바울의 경우에 있어서는 예수의 노예 증거는 역력하게 그의 몸에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예수의 이름으로 인하여 그의 몸에 받은 많은 상처의 흔적이었다.

그가 다섯 유대인에게 사십에 하나를 가만 매를 맞은 상혼
또는 몽둥이로 맞은 상처의 흔적타기,
강의 , 도적의 , 동족의 , 이방인의 , 해중의 ,
거짓 형제의 난에서 받은 인고와, 기갈과, 동라의 흔적 이것 모두
그의 몸에 지닌 예수의 스티그마 낙인이었다.

그는 이러한 상혼에 의해 분명히 예수의 노예임을 나타냈다.
그는 특별히 낙인으로서 이것을 그의 육체에 태워 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적은 그가 예수의 충실한 종인 까닭에
그를 해쳐 그에게 괄제할 없는 상혼을 남겼다.

그가 예수의 것임은 의심할 것도 없었다.

그의 이마에 있어서 그의 등에 있어서 그의 손과 있어서
그는 예수의 노복인 틀림없는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가 몸에 지닌 예수의 낙인은,
그의 몸에 남은 상혼에 그치지 않았다.

그가 예수의 이름으로 인하여 몸에 입혀진(지워진)모든 치욕과 오명,
이는 그에게 있어서 명백한 예수의 낙인이었다.
이방인에게도 배척되고, 그가 스스로 말한 대로, 그는 끝까지,

[세상의 폐물, 만물의 찌꺼기 같이](고린도전서4:13) 사람에게 취급되었다.

오늘이야 말로 바울로 일컬어지며 만인에게 존경되나
재세 당시의 바울은 () 고독(孤獨) 가장 불쌍한 사람이었다.

세상의 스티그마는 그의 위에 모였다.
그는 [나사렛당의 괴수]라고 하여
역병 같이 사람에게 배척(꺼림)되었다(사도행전24:5).

하지만, 오욕, 오명,
이는 그에게 있어서는 그가 예수의 것임의 확증이었던 것이다.

세상의 스티그마는,
그에게 있어서는 명예의 스티그마이었던 것이다.
그는 세상에 꺼린바 되어(배척되어),
혐오에 있어서, 그가 예수의 것임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몸에 있어서 상혼을 지니고,
세상에 있어서 오명을 입어,
그는 확실히 주의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스티그마는 [낙인의 의미에 있어서도,
그가 몸에 지닌 예수의 ()이였던 것이다.

그러한 명백한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세에 이르러, 말에 대하여,
커다란 미신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것은, 여기서 말하는 스티그마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몸에 받은 상혼인 것으로,
바울이 예수를 믿는 심후한 결과,
자연히 그의 옆구리 아래, 예수가 입은 상혼과 같은 흔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의 육체에 있어서 나타난 것으로, 그는 그의 예수에 있어서의 신앙을,
그의 겨드랑 아래 나타난 흔적을 가리켜 보임으로서 나타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에게 흔적이 나타난 오랫동안 기적은 그쳤었지만,
기원 1224년에 이르러,
이탈리아국의 성인 아시지의 프랜시스(프랜쩨스꼬 7 154 역주 참조) 있어서,
인을 보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 천주교도가 이상으로 하는 바는,
인을 몸에 있어서 현출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두터운 신앙의 보상으로서,
인의 기적적 현출의 은혜에 참여한 자는 80인을 셈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은혜에 참여한 자는,
1883년에 세상을 떠난 베르기국의 루이자. 라토-라는 수도녀이었다는 것이다.

혹은 심리적 현상으로서 그러한 일은 실제로 있는 일이찌도 모른다.
하지만, 바울이 몸에 지녔다는 예수의 인이라는 것이 그러한 기적적인 것이 아님은
그의 관한 성서의 다른 기사를 보아도 분명한다.

그리고 인의 가치에서 평한대도,
박해의 결과로서 받은 상흔은,
명사의 결과로서 자연히 나타난 반점보다는 훨씬 귀한 있다.

오인은 스티그마에 관한 천주교도의 신념을 미신으로서 배척하지 않을 없다.
그리고 바울이 (찍힌)지닌 예수의 인은, 오늘의 우리도 역시 이것을 지닐 수가 있다.

옳다, 우리들도 이것을 지녀야(찍혀야) 것이다.

물론 개명(開明) 지보(持保) 오늘의 세상에 있어서는,
몸의 박해의 상혼을 지닐 일은 없으리라.

하지만, 세상의 혐오, 조롱, 탄지 등은,
우리도 바울과 가지로, 몸에 예수의 인을 지닐 수가 있다.

옳다, 지녀야 것이다.
옳다, 진실로 예수를 믿어,
우리들은 지금의 세상에 있어서도 이것을 지니지 않을 없다.

세상은 영구히 예수를 미워하는 자이다.
그는

[세상의 처음부터 죽임당하신 어린 ](계시록13:8)이시다.

그는 지금도,
불신자에게 아니라 신자에게도,
속세계에 아니라 교회에도, 증오되는 것이다.

그가 지금, 세상에 나타나실 것인가?
그를 제일로 박해할 자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세상에선 그리스도교회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상에 있어서,
돈독하게 그를 믿을 ,
우리들은 이르는 마다 조소,
매욕으로서 맞이될 수밖에 없다.

오명은 참된 그리스도 신자의 필연적 부수물이다.
이것이, 그가 지금 세상에 있어서 그의 몸에 지니는 예수의 스티그마 낙인이다.

이것 없이 그는 그리스도의 것은 아니다.
이것 없이는 그는 이세상의 것이다 [교회신자]이다.

산자의 진위를 구별하기는 극히 쉽다.

그는 몸에 예수의 낙인을 지니는가?
그는 세상에 증오되는가?
교회에 배척되는가?

배척되는 것은 참된 신자이다.
배척되지 않는 것은 거짓신자이다.

세상과 세상 교회에서 스티그마가 찍혀지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의 종은 아니다.

우리들은 히브리서 기자의 따라,

[예수의 수욕(당한 수치) 걸머지고서 영문 밖으로 나가] (히브리서13:13)

거기서 기꺼이 그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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