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자유,
독립
갈라디아서 1장 1-2절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5장 13절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6장 17절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자유란 자기 멋대로 하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독립이란 아무것에도 의거하지 않고서 절대적으로 혼자 선다는 것은 아니다.
자유란,
하나님께 지배되고 사람에게 지배되지 않는 일이다.
독립이란,
의뢰해야 할 자에게 의뢰하고 의뢰치 않아야 할 자에게 의뢰치 않는 일이다.
문자만으로는 문자는 알지 못한다.
어떠한 문자도 그 의미를 말로 나타내는데 인류의 실험이 필요하다.
이것을 가장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 갈라디아서이다.
이 글을 연구치 않고서 우리들은 자유 독립을 말할 것이 아니다.
[사람으로서가
아니고 또
사람에 의해서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사도
바울](1:1)
서간의 모두의 말로서는 특이한 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데는 무언가 필요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필요는 확실히 이것을 보아 알 수 있다.
갈라디아 교회에 바울의 사도됨을 부인하는 자가 있었다.
그들은 말했다.
[바울은
스스로 사도라
하지만도 그는
직접 주
예수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자는
아니다.
그는 또
주의 직제자인
12사도에게서
사도됨의 직권을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스스로 사도라
하는 것은
참월된 일이다.
따라서 그가
전하는 복음은
정통 복음은
아니다]라고.
그리고 이 비난공격에 대하여 기록된 것이 갈라디아서였다.
따라서 그 어조문체는 발단서부터 그 변호적,
반박적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원문에 따라 제1절,
제2절을 조금 해석하기 쉽게 역한다면 다음과 같이 되리라.
[사도
바울 = 그 사도됨의
사명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
또 사람을
통하여 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
그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나 사도
바울 나와
함께 있는
여러 형제,
갈라디아 교회에
글(편지)을 보낸다]
말하는 바는
[나는
사도이다. 그리고 나의
사도된 직권은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것은 교회의
수장이라 일컫는
한 사람의
유력자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또 그
아래 선
사람의 단체를
거쳐 전해진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일에 대해서는
직접으로도 간접으로도
사람에게는 아무
힘입은 바
없다.
내가 사도됨이
권능은 만약
간접이라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해진
것으로서
직접으로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받은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예수를 다시
살리셨기 때문에
나는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에게서
내 사도직을
받은 것이다.
이 직권을
가진 나
바울 나와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함께
갈라디아의 제교회에
이 글을
보낸다]고 하는 것이다.
실로 대담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예루살렘교회를 무시하고 그 수장(首長)으로서
예수의 형제였던 야고보 및 베드로,
요한,
마태,
빌립 등
12사도를 안중에 두지 않는 것 같은 말이다.
이 말을 발한 바울은 불손,
오만,
교격(矯激,
敎格?)으로서 문책된대도 답할 말이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는 바울의 확신임을 어찌하랴?
그는 공상을 말한 것은 아니다.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사연(일)은 사도행전 제9장 및 22장에 자세하다.
찾아 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 바울 한 사람에 한하는 일인가,
그것이다.
모든 그리스도 신자 특히 복음의 신자는 한 가지로 하나님께서 사명을 받는 것 아닌가?
바울 이외에 구약의 예언자들은 모두 직접,
사람을 거치지 않고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것이다.
아모스는 벧엘의 제사장 암시아의 힐문에 답하여 말했다.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
또 예언자의
자식도 아니다.
나는 목자이다.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이다.
그런데 여호와
양 따르는
곳에서 나를
택하시고,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
예언하라고 내게
말씀하셨다](아모스서7:14-15)고.
기타 이사야,
예레미야 등의 예는 모두 한 가지이다.
그들은 바울과 한 가지로 모두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곧 예언자로서 부르심을 입었던 것이다.
그리고 옛 예언자 뿐 아니라,
어느 시대에 있어서도 대교사로서 세상에 파송된 자는
모두 분명히 이 실험을 가졌었다.
즉 사람을 거치지 않고서 곧 하나님께 부르신바 된 실험을 가졌던 것이다.
루터,
웨슬리,
브레이너드,
리빙스턴,
모두 그러하다.
그들이 교회를 존경했지만 어떤 중요한 일에 있어서
교회의 명에 따르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냐 교회냐 어느 것을 택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 선 때에는
베드로와 함께 말했다.
[사람께
복종함 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일은 할
일이다](사도행전5:29)고.
그들은 사람이 조직한 교회 이상의 권능을 인정했다.
그러므로 든든하고 강했다.
그리고 교회를 새로이 하고 또 세상을 새롭게 했다.
바울은 그렇게 높이 자기를 보아 자기를 미혹한 것은 아닐까?
많은 그리스도 신자 아닌 그리스도 신자가 곧 하나님께 접했다든가
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든가 했다.
바울도 그들과 유를 같이 하는 자는 아닐까?
이것의 가부를 증명하는 것은 의론이 아니라 사실이다.
바울의 한 일이 그가 확실히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것을 증명한다.
무디가 언제나 말했다.
[성서가
하나님의 인스피레이션
됨의 증거는
그것이 나를
인스피레이션 하는데 있다]고.
갈라디아서 그것이 그 발단의 말의 거짓 아닌 증거이다.
이것은 결코 광인 또는 공상가의 쓴 것은 아니다.
그 안에 열심에 불탐과 동시에 상식에 차고 논리정연하여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바울 자신이 그가 미상가가 아닌 증거를 들고 있다.
그는 말하려고 하는 것을 끝내고 나서 최후에 말하고 있다.
[이후
누구도 나를
괴롭히지 말라.
그것은 내
몸에 예수의
낙인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몸에 그리스도 직전의 사도됨의 확실한 낙인이 찍혀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고래로 많은 주해자의 재능을 시도케 한 문제였다.
성 프랜시스(프란찌스꼬)는 행위가 점점 성결해짐과 동시에 그 몸에 십자가의 낙인(흔적)이 멍처럼 나타났다고 한다.
바울의 몸에 지닌 낙인도 역시 그러한 것이나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러한 기적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그가 신앙 때문에 받은 박해의 상흔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섯 번,
유대인에게 40에 하나를
감한 매를
맞고
세 번
몽둥이로 맞고
한번 돌로
맞았다](고후11:24-25)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그의 신체에는 그가 그렇게 하여 받은 몇 개의 상흔이 남아 있었으리라.
그리고 그는 이것을 일컬어 [예수의 낙인]이라고 하고 이것을 가리켜
그가 틀림없는 예수의 사도임을 증거했으리라.
그가 사람에 의하지 않고서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증거했으리라.
그가 사람에 의하지 않고서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는 것은
자신 외에 아는 사람 없는 그의 영적 실험이었다.
그러나 (심령)안의 실험은 밖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것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
그 박해의 뒤가 상처로서 남았다.
이것이 틀림없는 그리스도의 사도됨의 증거라고 한다.
그리고 누구도 그의 이 증명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리고 사도 또는 대교사에 한하지 않는다.
모든 참된 그리스도 신자에게 하나님과의 이 접촉이 있다.
그들은 모두
[사람에게서
아니고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아버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신자로 된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 신자의 자유가 있다.
또 독립이 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는 직접이다.
간접이 아니다.
법왕도 감독도 또 어떠한 권위 있는 교회도 이자 사이에 끼어들어
이 신성한 관계를 조금이라도 방해할 수는 없다.
중개자는 다만 한 분,
하나님이 정해주신 중보.
즉 그리스도이시다(디모데전서2:5).
이 실험 없이 그리스도 신자일 수는 없다.
그리고 갈라디아서는 벽두제일로 이 말을 실어 신앙자유의 나팔소리를 울렸던 것이다.
사람의 영혼이
사람의 지은 제도,
생각한 사상,
인물숭배,
기타 온갖 이 세상의 속박으로 괴로움 당할 때.
갈라디아서는 도움의 천사로서 그에게 임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주는 자유란,
멋대로의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행하는 자유이다.
즉
[형제여
너희는 부르심을
입어 자유를
얻은 자이매
그 자유를
얻은 것을
기회로하여 육에
따르지 말라
다만 사랑으로서
서로에게 쓰이도록
하라](5:13)고.
갈라디아서가 제공하는 자유는 건전한,
거룩한,
힘찬 자유이다.
나 자신에게 있어서 갈라디아서 제1장 1절은 특히 귀한 바 있다.
이것은 나의 신앙의 채새라고 일컫는 것이다.
만약 내가 나의 입장을 지킬 수가 있다면 바울의 이 말에 의해서이다.
제군이 아는대로 나는 어느 교회에도 속하지 않았다.
나를 신자로서 인정한 교권은 어디도 없다.
따라서 나는 누구에게서 전도의 허가를 얻고 있지 않다.
[사람에게서
아니고 사람에
의하지 않는다]고
내 경우에 있어서는 문재대로 그러하다.
그러므로 성공회 같은 데서는 나의 그리스도 신자 됨을 인정치 않는다.
그 선교사 중 어떤이는 나를 불신자 취급하여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나는 그들에 대하여 굳이 나의 입장을 변명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신자로서 인정받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바울의 교적이 갈라디아에 있어서 한 것 같이
나에 의해 신자로 된 사람들의 신앙을 어지럽힌다면
나도 또 나의 신앙과 입장을 증명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과연 신자가 아닌가?
나의 전도는 과연 무효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나도 또 바울과 한 가지로 두 가지 일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 첫째는 하나님이 나로서 행하신 사업이다.
그 둘째는 내가 몸에 지닌 예수의 낙인이다.
이것을 제외하고 달리 나는 사람 또는 사람으로서 조직된 교회에서 받은
아무런 증명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신자로 되어 금년으로 46년이다.
나의 공적이라고 하는 것 아니다.
그러나 몇 백 또는 몇 천이라는 사람이 나를 통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그중 많은 사람이 신앙을 버렸으나
또 적지 않은 사람은 지금도 그 신앙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저술 몇 십종 신앙잡지를 계속하는 일 25년,
이것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지 않은 자가 할 수 있는 일일까?
이러한 것은 내가 사람에게 향하여 나의 신앙을 변명하기 위해 필요할 뿐 아니라
그것보다 훨씬 이상으로 내가 내 신앙에 대하여
의심을 일으키는 때에 스스로 자기를 설복하기 위해 필요하다.
둘째로,
나도 또한 몸에 예수의 낙인을 지니고 있다.
나도 또 예수의 이름으로 인하여 많은 수모를 받았다.
나의 사랑하는 나라에 있어서 20년 남짓,
베개할 곳이 없었다.
기타 골육에게서 동신의 사람들에게서 퍽 쓰라린 취급을 받았다.
낙인이라고 하여 육체에 상흔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내 마음에는 닦아버리려 해도 닦아버릴 수 없는 상흔이 남아 있다.
나도 또 바울과 한가지로 내 반대자에게 향하여
[이후
누구도 나를
괴롭히지 말라
그것은 내
몸에 예수의
낙인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할 수가 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나의 생애의 실험이다.
*내촌감삼의 글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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