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2일 금요일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신앙의 자유, 독립

갈라디아서 1 1-2 사람들에게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5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노릇 하라,


6 17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자유란 자기 멋대로 하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독립이란 아무것에도 의거하지 않고서 절대적으로 혼자 선다는 것은 아니다.

자유란, 하나님께 지배되고 사람에게 지배되지 않는 일이다.
독립이란, 의뢰해야 자에게 의뢰하고 의뢰치 않아야 자에게 의뢰치 않는 일이다.

문자만으로는 문자는 알지 못한다.
어떠한 문자도 의미를 말로 나타내는데 인류의 실험이 필요하다.
이것을 가장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 갈라디아서이다.

글을 연구치 않고서 우리들은 자유 독립을 말할 것이 아니다.

[사람으로서가 아니고 사람에 의해서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사도 바울](1:1)

서간의 모두의 말로서는 특이한 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데는 무언가 필요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필요는 확실히 이것을 보아 있다.

갈라디아 교회에 바울의 사도됨을 부인하는 자가 있었다.
그들은 말했다.

[바울은 스스로 사도라 하지만도 그는 직접 예수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자는 아니다.
그는 주의 직제자인 12사도에게서 사도됨의 직권을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스스로 사도라 하는 것은 참월된 일이다.
따라서 그가 전하는 복음은 정통 복음은 아니다]라고.

그리고 비난공격에 대하여 기록된 것이 갈라디아서였다.
따라서 어조문체는 발단서부터 변호적, 반박적이 아닐 없었다.

지금 원문에 따라 1, 2절을 조금 해석하기 쉽게 역한다면 다음과 같이 되리라.
[사도 바울 = 사도됨의 사명은 사람에게서 것이 아니다.
사람을 통하여 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사도 바울 나와 함께 있는 여러 형제,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 보낸다]


말하는 바는

[나는 사도이다. 그리고 나의 사도된 직권은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것은 교회의 수장이라 일컫는 사람의 유력자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아래 사람의 단체를 거쳐 전해진 것이 아니다.
나는 일에 대해서는 직접으로도 간접으로도 사람에게는 아무 힘입은 없다.
내가 사도됨이 권능은 만약 간접이라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해진 것으로서
직접으로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받은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예수를 다시 살리셨기 때문에
나는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에게서 사도직을 받은 것이다.
직권을 가진 바울 나와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함께
갈라디아의 제교회에 글을 보낸다] 하는 것이다.
실로 대담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예루살렘교회를 무시하고 수장(首長)으로서
예수의 형제였던 야고보 베드로, 요한, 마태, 빌립
12사도를 안중에 두지 않는 같은 말이다.

말을 발한 바울은 불손, 오만, 교격(矯激, 敎格?)으로서 문책된대도 답할 말이 없는 아닌가?

하지만 이는 바울의 확신임을 어찌하랴?

그는 공상을 말한 것은 아니다.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사연() 사도행전 9 22장에 자세하다. 찾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 바울 사람에 한하는 일인가, 그것이다.
모든 그리스도 신자 특히 복음의 신자는 가지로 하나님께서 사명을 받는 아닌가?

바울 이외에 구약의 예언자들은 모두 직접,
사람을 거치지 않고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것이다.

아모스는 벧엘의 제사장 암시아의 힐문에 답하여 말했다.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 예언자의 자식도 아니다.
나는 목자이다.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이다.
그런데 여호와 따르는 곳에서 나를 택하시고,
가서 백성 이스라엘에 예언하라고 내게 말씀하셨다](아모스서7:14-15).

기타 이사야, 예레미야 등의 예는 모두 가지이다.

그들은 바울과 가지로 모두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예언자로서 부르심을 입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언자 아니라, 어느 시대에 있어서도 대교사로서 세상에 파송된 자는
모두 분명히 실험을 가졌었다.

사람을 거치지 않고서 하나님께 부르신바 실험을 가졌던 것이다.
루터, 웨슬리, 브레이너드, 리빙스턴, 모두 그러하다.

그들이 교회를 존경했지만 어떤 중요한 일에 있어서
교회의 명에 따르지 않은 것은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냐 교회냐 어느 것을 택하지 않을 없는 경우에 때에는
베드로와 함께 말했다.

[사람께 복종함 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일은 일이다](사도행전5:29).

그들은 사람이 조직한 교회 이상의 권능을 인정했다.
그러므로 든든하고 강했다.
그리고 교회를 새로이 하고 세상을 새롭게 했다.

바울은 그렇게 높이 자기를 보아 자기를 미혹한 것은 아닐까?
많은 그리스도 신자 아닌 그리스도 신자가 하나님께 접했다든가
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든가 했다.

바울도 그들과 유를 같이 하는 자는 아닐까?
이것의 가부를 증명하는 것은 의론이 아니라 사실이다.
바울의 일이 그가 확실히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것을 증명한다.

무디가 언제나 말했다.

[성서가 하나님의 인스피레이션 됨의 증거는 그것이 나를 인스피레이션 하는데 있다].

갈라디아서 그것이 발단의 말의 거짓 아닌 증거이다.
이것은 결코 광인 또는 공상가의 것은 아니다.
안에 열심에 불탐과 동시에 상식에 차고 논리정연하여 움직일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바울 자신이 그가 미상가가 아닌 증거를 들고 있다.

그는 말하려고 하는 것을 끝내고 나서 최후에 말하고 있다.

[이후 누구도 나를 괴롭히지 말라. 그것은 몸에 예수의 낙인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몸에 그리스도 직전의 사도됨의 확실한 낙인이 찍혀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고래로 많은 주해자의 재능을 시도케 문제였다.

프랜시스(프란찌스꼬) 행위가 점점 성결해짐과 동시에 몸에 십자가의 낙인(흔적) 멍처럼 나타났다고 한다.

바울의 몸에 지닌 낙인도 역시 그러한 것이나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러한 기적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그가 신앙 때문에 받은 박해의 상흔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섯 , 유대인에게 40 하나를 감한 매를 맞고
몽둥이로 맞고 한번 돌로 맞았다](고후11:24-25) 말하고 있다.

아마도 그의 신체에는 그가 그렇게 하여 받은 개의 상흔이 남아 있었으리라.

그리고 그는 이것을 일컬어 [예수의 낙인]이라고 하고 이것을 가리켜
그가 틀림없는 예수의 사도임을 증거했으리라.

그가 사람에 의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증거했으리라.
그가 사람에 의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는 것은
자신 외에 아는 사람 없는 그의 영적 실험이었다.

그러나 (심령)안의 실험은 밖으로 나타나지 않을 없었다.
그는 그것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
박해의 뒤가 상처로서 남았다.
이것이 틀림없는 그리스도의 사도됨의 증거라고 한다.

그리고 누구도 그의 증명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리고 사도 또는 대교사에 한하지 않는다.

모든 참된 그리스도 신자에게 하나님과의 접촉이 있다.
그들은 모두

[사람에게서 아니고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아버지 하나님] 부르심을 받아 신자로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 신자의 자유가 있다.
독립이 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는 직접이다.
간접이 아니다.
법왕도 감독도 어떠한 권위 있는 교회도 이자 사이에 끼어들어
신성한 관계를 조금이라도 방해할 수는 없다.

중개자는 다만 , 하나님이 정해주신 중보.
그리스도이시다(디모데전서2:5).

실험 없이 그리스도 신자일 수는 없다.
그리고 갈라디아서는 벽두제일로 말을 실어 신앙자유의 나팔소리를 울렸던 것이다.

사람의 영혼이
사람의 지은 제도, 생각한 사상, 인물숭배,
기타 온갖 세상의 속박으로 괴로움 당할 .
갈라디아서는 도움의 천사로서 그에게 임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주는 자유란,
멋대로의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행하는 자유이다.


[형제여 너희는 부르심을 입어 자유를 얻은 자이매
자유를 얻은 것을 기회로하여 육에 따르지 말라
다만 사랑으로서 서로에게 쓰이도록 하라](5:13).

갈라디아서가 제공하는 자유는 건전한, 거룩한, 힘찬 자유이다.

자신에게 있어서 갈라디아서 1 1절은 특히 귀한 있다.
이것은 나의 신앙의 채새라고 일컫는 것이다.
만약 내가 나의 입장을 지킬 수가 있다면 바울의 말에 의해서이다.

제군이 아는대로 나는 어느 교회에도 속하지 않았다.
나를 신자로서 인정한 교권은 어디도 없다.
따라서 나는 누구에게서 전도의 허가를 얻고 있지 않다.

[사람에게서 아니고 사람에 의하지 않는다]

경우에 있어서는 문재대로 그러하다.
그러므로 성공회 같은 데서는 나의 그리스도 신자 됨을 인정치 않는다.
선교사 어떤이는 나를 불신자 취급하여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나는 그들에 대하여 굳이 나의 입장을 변명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신자로서 인정받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바울의 교적이 갈라디아에 있어서 같이
나에 의해 신자로 사람들의 신앙을 어지럽힌다면
나도 나의 신앙과 입장을 증명하지 않을 없다.

나는 과연 신자가 아닌가?
나의 전도는 과연 무효인가?

질문에 대하여 나도 바울과 가지로 가지 일에 호소하는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이 나로서 행하신 사업이다.
둘째는 내가 몸에 지닌 예수의 낙인이다.

이것을 제외하고 달리 나는 사람 또는 사람으로서 조직된 교회에서 받은
아무런 증명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신자로 되어 금년으로 46년이다.
나의 공적이라고 하는 아니다.
그러나 또는 천이라는 사람이 나를 통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그중 많은 사람이 신앙을 버렸으나
적지 않은 사람은 지금도 신앙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저술 십종 신앙잡지를 계속하는 25,
이것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지 않은 자가 있는 일일까?

이러한 것은 내가 사람에게 향하여 나의 신앙을 변명하기 위해 필요할 아니라
그것보다 훨씬 이상으로 내가 신앙에 대하여
의심을 일으키는 때에 스스로 자기를 설복하기 위해 필요하다.

둘째로,
나도 또한 몸에 예수의 낙인을 지니고 있다.
나도 예수의 이름으로 인하여 많은 수모를 받았다.
나의 사랑하는 나라에 있어서 20 남짓, 베개할 곳이 없었다.

기타 골육에게서 동신의 사람들에게서 쓰라린 취급을 받았다.
낙인이라고 하여 육체에 상흔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마음에는 닦아버리려 해도 닦아버릴 없는 상흔이 남아 있다.

나도 바울과 한가지로 반대자에게 향하여

[이후 누구도 나를 괴롭히지 말라
그것은 몸에 예수의 낙인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수가 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없는 나의 생애의 실험이다.

*내촌감삼의 글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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