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7일 수요일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안디옥에서의 베드로

갈라디아서 2 11-15 :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초대의 그리스도교에 이대중심이 있었다.

하나는 물론 예루살렘이었다.
이것은 12사도의 본거지로서 복음의 발상지였다.

기타의 것은 안디옥이었다.
이것은 이른 이방적 그리스도교의 근거지로서 이방전도의 발족지였다.

안디옥은 예루살렘을 북으로 멀리 350마일, 사이는 거의 도쿄와 오사까와의 거리가 있었다.

예루살렘이 산상의 성읍인데 대하여
안디옥은 대하에 임하고 지중해에서 불과 20마일 거의 임해의 도시였다.

지위에 있어서 인종에 있어서 제도문물에 있어서 2도는 전혀 별세계의 모습을 나타내 보였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의 복음의 적응적인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가르치심은 순식간에 안디옥에 깊은 뿌리를 내렸다.

사적은 사도행전 11 19 이하에 상세하다.
그중 특히 주의해야 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크리스천이라고 불린 것은 안디옥에서 시작된 일이다.

그리스어의 Christianos chrestianos 전화로서 크레스티아노스는 [선량한 사람]
[호인]이라는 반조소의 말이었으리라는 것이다.

어쨌거나 복음이 이방인의 도시인
안디옥에 근거를 두어서부터 성질이 일변했던 것이다.

그때까지는 그리스도교라면 유대인이라든가 아니면
유대교에 들어간 이방인에 의해서만 신봉되던 교가
이제는 유대교를 거치지 않고서 이방인의 받아들이는 바로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에 명백한 2대파가 있게 되었다.
예루살렘을 본거로 하는
유대파와 안디옥을 새로이 일으킨 이방인파가 그것이었다.

2대파의 관계, 절충, 협력 등을 아는 것은
초대 그리스도교의 진상을 아는데 있어서도 중요하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2 후반부 같은 것은 하나이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는 12사도들에게서 아무 배우는 바가 없었다.

그리고 안디옥에 있어서도
사도들의 수장인 베드로의 오류를 바로 하고 면전에서 그를 책했다.

하나님 앞에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차별 없음이 계시되어
이것을 실행한 이는 베드로이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와서 인종적 차별을 행동으로서 보인 것이다.
이는 용서할 없는 일로서 만약 이것을 불문에 붙일 것인가?
복음을 근저에서 엎어버릴 위험이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뭇사람 앞에서 베드로를 면전하게 책하지 않을 없었던 것이다.

인종적 차별이 나쁘다는 것은 오늘 누구도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것 쉽게 제거할 있는 일은 아니다.

유대인이 지금도 의연히 이것을 실행할 아니라
국민으로서 어느 정도에 있어서 이것을 실행치 않는 자는 없다.

인도인 같은 것은 국민에 향하여 이것을 실행할 아니라
견고한 계급제도를 만들어 가지고서 동포상호에 대하여 이것을 여행한다.

백인종은 유색인종을 배척한다.
백인종은 상호를 배척한다.
세상은 배척의 세상이다.

어느 미국의 정치가가 요즈음 나라의 배일(排日)법을 논하여 말했다.

[모든 인종은 평등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일지나 일에 있어서만은 오인은 하나님께 반대하는 것을 용서해 달라고 하지 않을 없다].

실로 인종차별이 그치는 국제적 전쟁이 그치는 때이다.

사람은 인종차별의 철폐는 쉬운 일로 생각하여
사람이 차별의 약사임을 알고서 평등을 실행하면
그것으로 일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에 실은 이렇듯 어려운 일은 없는 것이다.
인종적 차별의 근거는 자기 존중에 있다.

자기가 특히 존귀하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남이 하찮게 보여 이것을 배척하는 것이다.
자기의 가치를 알기까지는 사람은 남을 존경치 않는다.
그리고 자기의 가치를 자기에 의해 정하는 동안은
사람은 자기를 높이 보아 마지않는다.

일본인이 일본인인 동안은 지나인이나 조선인을 낮추보아 마지않는다.
일본인이기를 그치고 자기 이외에 자기를 발견하는
그는 모든 국민을 자기와 동등하게 수가 있는 것이다.

유대인이 유대인을 표준하고
이방인이 이방인을 표준하는 동안은
그들의 융합은 불가능이다.

이자가 자기 이외에 동일한 표준을 발견하고
안에 자기를 던지는
그들은 절로 일체로 되어 상호를 존경하는 것이다.

미국인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
자기의 () 의뢰치 않고서 하나님의 아들의 의를 자기 의로 하는 때에
여기서 미국인으로서 자랑하지 않고서 그리스도로서 자랑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인도 또한 같은 일을 하여 여기서 일미융합이 성립하는 것이다.
사람이 신앙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다는 것은
자기 이외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이다.

미국의 백성이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의 가치를 자기 가치로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인종적 차별은 근저에서 제거되는 것이다.

안디옥에 있어서의 바울 베드로의 문제는 문제였다.
사람의 가치는 자기에 있는가 자기 이외에 있는가 문제였다.

유대인의 가치는 유대인 됨에 있다고 베드로 유대파의 신자는 말했다.
그렇지 않다. 유대인에게도 이방인에게도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있다고 바울은 주장했다.

문제는 실로 세계적 인류적 최대 문제였다.
바울은 후세 만민 위해 그의 주장을 가지고서 동하지 않았다.

위대한 바울이여
안디옥에 있어서의 바울 베드로의 논쟁은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의 결정장,
워털루 이상의 대결장이었다.

워털루-Waterloo 1815 6, 앨바섬 탈출 후의 나폴레옹 1세가
영국, 화란, 프로이센 연합군에 패배한 싸움,
워털루는 벨기에의 한적한 성읍이다.

*내촌감삼의 주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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