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율법
갈라디아서 3장 15-20절 :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복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길이다.
율법은 사람이 하나님께 구원되려는 길이다.
그리고 이자 어느 것이 먼저인가 하면 복음이 먼저이고
율법은 후에 임한 것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전해지고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다](요한복음1:17)고 있으므로
율법은 먼저이고 복음이 뒤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바울은 여기서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으로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기업을 언약하신 때
복음은 세상에 임한 것이다.
율법이 모세에 의해 전해진 것은 그 후 430년의 일이었고
이것은 복음에 대신하기 위해 주어진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가령 인간의 경우에 있어서도 일단 정해진 약속은
문자대로 실행되어야 할 것으로 누구도 이에 개삭을 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세의 율법의 진화한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계약의 계속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이르려 하면 모세의 율법에 의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야 할 것이다.
할례를 받아 모세의 제자가 되었다고 해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될 수는 없다.
[만약
너희가 복음을
믿음으로서 그리스도에
속한 자로
된다면
너희는 아브라함의
후예 즉
약속에 따라
사자로 된
것이다. ](29)라고 있는 대로이다.
그리하여 복음에 대해서는 율법은 침입자이다.
복음은 아브라함에게서 그리스도까지 연면하여 계속하는데
그 사이에 율법이 끼우게 된 것이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죄 때문이다.
사람이 죄 때문에 복음을 믿지 않게 되었으므로
그들에게 죄의 죄됨을 알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모세로서 율법을 주신 것이다.
복음은 목적이고 율법은 수단이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으로 의롭다함을
얻게 하려고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사부로
되었다](갈라디아3:24참조)고 있음은 이것이다.
율법은 우리를 복음에로 몰아 보내는 채찍 같은 것이다.
우리는 율법의 요구에 견딜 수 없어 마침내 복음에로 달려가는 것이다.
율법의 소용은 여기에 있다.
율법은 우리들을 죄로 정하여 죄의 사유(사죄)의 복음에로 우리들을 몰아 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복음은 보다 완전한 율법은 아니다.
오늘의 말로서 한다면 그리스도교는 보다 높은 도덕은 아니다.
구약성서가 진화하여 신약성서를 낳은 것은 아니다.
복음과 도덕은 그 근본의 정신을 달리한다.
그리고 복음은 처음에 있었고 지금 있는 것이다.
도덕은 복음의 부록이다.
복음은 영구적인 것 율법은 잠시적인 것이다.
이것을 [영원한 복음](묵시록14:6)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은 이것을 잊어버리고서
영구적인 것은 도덕이고 복음은 그 일시적인 변태라고 생각한다.
이는 복음이 쇠해져 도덕까지가 쇠퇴하는 이유이다.
또 많은 사람은 복음과 도덕을 구별하지 못하고
복음이란 사랑의 가르치심(교훈)이고,
보다 높은 도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는 것이다.
복음은 신앙의 길이고 도덕은 행위의 길이다.
사람은 도덕에 의해 죄로 정해지고 복음에 의해 의롭게 되는 것이다.
죽이기 위한 도덕이다.
도덕으로서 족하게 여기는 자는 언제나 자기를 책하고 남을 책하여 마지않는다.
복음을 믿을 수 있어
비로소 자기에게 평화가 있고 또 쉽게 남을 용서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감사해야 할 것은 복음이 영원한 길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율법 없는 때는 있었으나 복음 없는 때는 없는 것이다.
[처음에
하나님 처지를
지으셨다](창1:1)
그때에 복음은 있었던 것이다.
말을 바꾸어 한다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때는 없는 것이다.
노(怒)를 포함하는 율법 또는 도덕은
경우의 필요에 응하여(따라)
하는 수 없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이란
사람을 본래의 사랑으로 되돌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 두신 때에 사랑의 복음이 있었을 뿐이고
계명의 율법은 없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생육하라.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이것을 복종케
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보라, 내가 온
지면에 있는
모든 풀과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는 너희의
식물이 될
것이다](창세기1:28-29)라고.
이것은 최초의 복음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명을 거슬려 죄를 범한 때에
계명에 따르는 저주가 있었다.
그것이 최초의 율법이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반역을 계속하는 까닭에
그들은 율법 있음을 알고 복음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은 무서운 분
도덕은 행하기에 어려운 것,
하지만 도덕 이외에 하나님의 아들 되는 길은 없다고 생각하고
공포와 전률로서 인생의 험한 언덕을 올라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요구하시는 길은 아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길은 복음이지 율법은 아니다.
거역한 아들을 복음에로 불러 돌아오게 하기 위한 율법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 따라 촌각이라도 빨리 율법을 떠나 복음에 속할 것이다.
아브라함,
이사야,
예레미야,
예수,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이것이 신앙의 계통이다.
우리들은 지금 그리스도를 믿고 곧 아브라함의 아들(자녀)로 될 수가 있다.
*내촌감삼의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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