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3일 일요일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염려 2

: [ 4:12-20]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 4: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와 같이 되기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네스데 호스 에고' 직역하면 '계속 나와 같이 되기를'이라는 의미이다.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 몇가지의 견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혹자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사랑과 정직으로대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너희도 앞에서 솔직하라' 의미로 본다(Cole).

(2) 혹자는 바울이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주의의 모든 의식주의(儀式主義) 폐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가 것을 상기시키면서 '너희도 나와 같은 자유자가 되라'고했다고 본다(E. Huxtable).

(3) 혹자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입장에 것을 상기시키면서 '너희도 입장에서 나를 이해하라' 권면했다고 본다(NEB, Boice).

이상의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지만 문맥상 (2) 견해가 가장 타당한 같다.

왜냐하면 바울은 계속해서 율법과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지위와 유대인이 갖는 우월감을 초라한 것들로 인식하고 참된 자유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가르치고 있다.



[ 4: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

바울은 처음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때를 구체적으로 회상하고 있다.

'너희가 아는 바라'에는 사적(私的) 역사의 배경을 설명할 때에나

(고전 16: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아가야의 열매요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4: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또는 이미 확정된 교리들을 진술하려 때에 자주 사용되었다.

( 2: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우리가 아노라;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딤전 1:8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본절의 배경이 되는 13:13, 14 의하면 바울은 2 전도여행 바보와 버가를 지나 속히 갈라디아 지방으로 올라갔다.

( 13:13-14 바울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 그들은 버가에서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당시 버가는 저지대로서 해안의 습지로 인한 유행병들이 많이 돌았는데 특히 말라리아가 심했다. 바울은 여기서 얻은 유행병으로 인하여 하루 속히 버가를 떠난것 같다.

그러나 혹자는 바울이 루스드라 지방에서 겪은 육체적 핍박으로 인하여( 14:19; 딤후 3:11)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갈라디아에 오래 머물렀다고 추정한다(Boice).

(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딤후 3:11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모든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어쨋든 바울의 계획에 차질을 주었던 그의 질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수는 없지만 그가 상당히 '약한 몸으로'(고전 2:3) 갈라디아에서 목회했음을 있다



[ 4: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버리지도 아니하고 - 이는 ' 퇴짜 놓다', ' 뱉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70인역(LXX)에는 나타나지 않고 신약성경에서도 본절에서만 사용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병자를 만나면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침을 뱉는 관습이 있었다(Lightfoot).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에게 존경과 사랑으로 대했다.

과거에 바울은 신과 같이( 14:12, 13) 환영받았지만 자신이 신처럼 존경받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 14:12-13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13)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반면에 본절에서는 자신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환영받은 사실을 긍정적으로 보고 갈라디아 교인들을 칭찬한다.

이처럼 자신을 후대(厚待) 갈라디아 교인들을 칭찬한 이유는 갈라디아 교인들이자신에게 보여준 사랑과 환영이 참된 것이었기 때문이고,

갈라디아 교인들의 상태가율법주의적인 경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을 염려하여 과거의 상태를 기억나게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4: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 '' 해당하는 헬라어 '마카리스모스'
'축복'(blessedness), '행복'(happiness), '기쁨'(joy) 등을 뜻한다.

그래서 본절은 '너희들이 갖고 있는 축복된 내용들(앞에서 언급한) 어디 있느냐?'라는 의미이다(Longenecker).

증거하노니 - 이는 바울 서신에서 항상 칭찬할 사용되었다.

(5:3 내가 할례를 받는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10: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4:13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언하노라).

신중하고도 엄숙한 표현은 뒤에 나오는 구체적인 내용의 진실성과 사실성을 강조한다.

본절에서는 바울 자신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해주기를 원했던 갈라디아 교인들의 헌신적인 생활을 생생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 4: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참된 말을 하므로 -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본절과 4:15에서만 사용되었는데
4:15에서는 참말을 신실하게 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거룩한 삶과 하나님의 진리를 열심을 다해 지키고자 하는 생활 습관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그리스도라)

실제로 바울의 삶에 있어서 진리는 단순히 속에만 남아 있지 않고 그의 모든 삶의 모습과 습관에서도 반영되었다.

(고후 4: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딤후 2: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원수가 되었느냐 - 구절은 바울 자신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원수가 되겠느냐는 반어법적 문장이다.

다시 말해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 '너희와 원수되기 위함인줄 아느냐'라는 뜻이다.

그런데 원수 관계는 서로 조화될 없고 연합할 없는 관계이다.

따라서 바울이 본절에서 의도하는 바는 내가 너희와 그토록 감격스러운 기쁨과 사랑을 나누었는데 어찌하여 원수의 관계가 있겠느냐는 의미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 4: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하는 거짓교사들의 간사함을 지적한다.

'열심 내는' '시기, 증오, 진노의 감정으로 가득 차다', '열렬히 바라다' 의미이다.

본절에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위장된 열심을 폭로하고 자신의 선하고 아름다운 열심을 증명하려 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열심은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고, 접붙임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지체를 이루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거짓교사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고 와해(瓦解)시켜서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된 것을 파괴시키려고 열심을 다한다.

바울이 유대주의자들의 열심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자세히 있었던 것은
자신 역시 거짓된 진리에 지나친 열심을 가진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13-14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동족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 4: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

열심으로 사모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본절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

(1) 열심의 주체가 바울일 경우,
바울은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에나 지금이나 언제든지 선한 열심으로 서로 돕기를 소원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있다(Burton).

(2) 열심의 주체가 갈라디아 교인일 경우,
갈라디아 교인들이 처음 복음을 받았을 좋은 일에 열심을 내었듯이 지금 진리를 말하는 (16) 자신에게도 다시 좋은 열심을 보이기를 소원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있다(Cole).

(3) 열심의 주체가 율법주의자들일 경우,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답게 율법주의자들의 열심을 어느 정도 용납하겠다는 겸손과 사랑의 뜻으로 해석될 있다.

다시 말해서 율법주의자들의 열심이 선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언제든지 환영한다는 뜻이다(Lightfoot, Ridderbos).

견해 우선 (2) (3) 해석이 타당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본절의 '사모함을 받음은' 해당하는 헬라어 '젤루스다이'(*) 수동태나 중간태로 취할 있기 때문이다.

, 수동태로 경우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주의자들의 '환심을 샀다' 것이되며, 중간태를 취할 경우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예전처럼 지금도 열심으로 선한 일을 추구하기를 사도 바울이 바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단지 문법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2)(3) 해석이 타당성을 갖지만,
전후 문맥상으로나 본절의 내용상으로 볼때 (3) 해석이 많은 지지를 받는다.

, 앞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한 거짓 교사들의 간사하고 교활한 특징을 기술하였고 계속하여 본절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그들의 섬김의 동기가 선하지 않은 있음을 역설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사실상 본절에서 바울이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복음의 () 그들에 대해 바울이 연속적인 비난을 가하고 있는 것은

본절의 '좋은 일에 대하여' '언제든지'라는 반어적 의미를 가진 부사어에 드러난다(Longenecker).



[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나의 자녀들아 - 이는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신에게서 양육 받았음을 나타내고자 같다.

바울은 서신에서 말을 처음 사용하여 교회를 존속시키려는 자신의 헌신적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Ridderbos).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 '해산하는'에는 단순히 임신해 있는 오랜 기간보다는 분만하는 고통에 역점을 두고 있다.

,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양육하는 것을 어머니가 아기를 출산하는 고통에 비유하고 있다.

이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시 중생의 체험을 해야 한다는 의미라기 보기는 중생한 자가 가야 성화의 과정을 전제하고

바울이 그들을 계속하여 양육함의 수고가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 4: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언성을 높이려 함은 - 바울은 자신의 심정을 음성에 비유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강경한 어조로 말해 왔지만 갈라디아 교인들을 만나게 되면 부드럽고 온유한 말로 격려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이는 바울이 직접 그들과 만나서 말로 가르치는 것이 서신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고 인식한 때문일 것이다(Ridderbos).

의혹이 있음이라 - 이는 '당황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 뜻한다.

이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모르므로 당혹스럽다는 표현이며 그들을 직접 만나 의문을 풀고 싶다는 생각을 나타내는 말이다.

바울이 어떠한 일로 인하여 직접 갈라디아를 방문할 없었는지는 정확하게 없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깊은 사랑과 관심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흔들리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깊이 타락하지 않고 바로 돌아올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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