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4일 월요일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종의 아들과 자유자의 아들

: [ 4:21-3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여자들은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하갈이라
25)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자녀들과 더불어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때에 육체를 따라 자가 성령을 따라 자를 박해한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4: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 - 주의 계명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지키려는 자들이 아니라 외식에 치우쳐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려는 갈라디아 교회의 변절자들을 가리킨다.

특히 '...고자' 과거에 율법을 따랐던 적이 있는 사람을 가리키지 않고 현재 의도적으로 율법주의를 따르며 지지하고 있는 자들을 구체적으로 지시한다.



[ 4:22] 기록된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아들이 있으니 - 실제로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 외에도 후처 그두라를 통한 여섯명의 아들들이 있었다.

( 25:1-2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
2)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자녀만 언급한 것은 그들의 탄생에 관계된 사건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서로 판이한 출발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약속과 관계된 반면,

(3:6-14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알지어다
8)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다른 하나는 약속과 관계없이 육신을 따라 것이다.

계집 종에게서 - '계집 '에는 신약성경에서 언제나 '노예로서의 여자' 뜻하는 단어로 쓰였다.

( 12:45 만일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18:17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사람의 제자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2: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본절에서 단어는 사라의 여종인 '하갈' 지시하며 나아가 그녀에게서 '이스마엘의 신분' '율법의 신분' 암시한다.



[ 4: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육체를 따라 났고 - '육체를 따라' 수태의 방법이 육체의 질서와 법칙으로 인해 태어났음을 보여주고 아들을 잉태한 어머니의 신분을 시사한다.

여기서 '육체' 보통 ''이라는 말과 대조되어 사용되는데 그것은 때때로 평범하고 자연적인 과정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육체' 영적이며 비가시적인 세계와 대조되는
세상의 현실적 삶을 묘사할 사용되었다.

( 1: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후 1:17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본절의 '약속' 이삭이 태어난 원인이며 수단이다.

출생의 신비는 초자연적인 것이며 인간이 구할 없는 가운데서 얻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 4:24] 이것은 비유니 여자들은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하갈이라

이것은 비유니 - 바울은 역사적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과거의 교훈을 현재상황에 적용시켜 하나님의 섭리의 일관성을 논증하고 있다.

이렇듯 현재를 포함하여 모든 시대의 사건들은 하나님의 계시 역사를 살펴볼 ,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 4:25]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자녀들과 더불어 노릇 하고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 본절에서 이름과 연관지어 논쟁이 되는 것은 '하갈' 시내 산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때문이다.

수많은 주석가들이 '하갈'이라는 이름의 지명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본절을 바울이 사용한 우화로 푼다면 의미는 보다 쉽게 상징화된다.
시내 산을 하갈 산이라고 불렀든지 '하갈'이라는 자체가 시내산을 의미하는 단어인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바울이 본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하갈과 시내산 지상의 예루살렘이 동일선상에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있는 예루살렘 - 말은 당시에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이 본부로 삼고 있던 예루살렘을 상징한다.

예루살렘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은 혈통적으로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누구보다도 순수한 사라의 후손임에 틀림이 없으나,

그들은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시고 율법을 완성시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함으로 여전히 율법 아래 있는 종의 신분을 갖게 되었다.

이들의 됨은 이방인들이 믿음을 통하여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우리 어머니라

위에 있는 예루살렘 - 이는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대조를 이루는 천상의 예루살렘을 상징한다.

그곳은 율법에게 종노릇하는 자들을 해방시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영적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새로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 12:24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아벨의 피보다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현재적으로 이루어지는 거룩한 도성이기도 하다.

(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모든 시대에 걸쳐 현재적으로 예루살렘의 백성이 되며 성령이 친히 일을 증거할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된다.

( 21:2 내가 보매 거룩한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같더라).



[ 4:27] 기록된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기록된 - 바울은 본절에서 54:1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 54:1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이사야는 구절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인한 화해를 선포하고 영적인 평화의 상태가 도래할 것을 묘사하면서

'많은 주의 '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가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였다.

바울은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새로운 섭리로 인하여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것과 믿음의 자녀들이 핍박자들의 고난을 물리치고 믿음의 자녀들이 궁극적으로 승리한다는 것을 증거 하고자 한다.

홀로 사는 - 이는 '과부된 '라는 뜻으로 남편 잃은 고부의 고독하고 불행한 상태를 나타낸다.

구절이 이사야서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을 비유하는 , 바벨론에 포로된 유다를 가리킨다.

바울은 이러한 의미의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90세가 넘어 도저히 아기를 가질 없는 사라에게 주어졌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서술한다.

사라에게 주어졌던 약속이란 직접적으로는 자손에 대한 것이지만, 이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손의 어머니 사라(26) 통하여 복음을 주시며, 복음으로 교회가 크게 확장된다는 계시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다.

교회의 확장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인 것이다.

( 14: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한편 말이 이방인만을 상징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유하는 여인이 낳은 아들 중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구분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태어난 모든 양자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 4: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너희는 약속의 자녀라 -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비유에 적용시키고 있다.

약속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작정과 섭리를 통하여 주신 선물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자의적(自意的)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부르시는 이의 뜻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는 육체의 족보를 따르지 않는다.

( 9:8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위에 있는 예루살렘' 자녀들은 믿음을 통하여 태어나며, 성령의 침례를 통하여 새롭게 거듭나는 자들이다.

바울은 '자유하는 여자' '이삭' '약속의 자녀'들과 갈라디아의 교인들을 동일선상에서 취급하면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사에 포함될 모든 자들을 약속의 자녀로 선포하고 있다.



[ 4:29] 그러나 때에 육체를 따라 자가 성령을 따라 자를 박해한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핍박한 것같이 - 바울이,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힌 것을 계속적인 사실을 현재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핍박의 현실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21:9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다' 사실을 묘사한 히브리어 '차하크' '경멸하며 비웃다', '희롱하다' 뜻으로 이스마엘의 시기는 단순한 조소에서 그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바울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에 대한 핍박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사라가 하갈을 내쫓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공동체 속에서 거짓된 이복형제들,

율법주의자들을 멀리하라고 권고한다.



[ 4: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 유업을 이을 자는 오직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뿐 임을 강조한다.

이는 율법과 믿음이 공존할 없으므로 불가피하게 믿음이 선택되어야한다는 것이다(Lightfoot).

유대주의자들은 유업을 이을 자가 유대인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방인들을 핍박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입장을 반전시킨다.
유업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믿는 자들에게만 해방되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 자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라는 것이다.

(7 그러므로 네가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율법의 정죄 아래 계속 머물러 있는 자들은 육신의 신분을 따라 죄의 종으로 머물게 되며,

(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아래에 팔렸도다),

결굴 아버지의 유업으로부터 제외된다.



[ 4: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그런즉 - 바울은 21절부터 서술한 하갈과 사라에 관한 이야기의 비유적인 재해석을 결론짓고 있다.

결론은 앞서 3:6-9에서 제기되었던 '누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녀이며 상속인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귀결된다.

(3:6-9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알지어다
8)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특별히 바울이 지금까지 사용한 '너희' 또는 '저들'이라는 대신에

'우리'(에스멘)라는 1인칭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모든 자들은

누리는 약속의 자녀임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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