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의의 대요
갈라디아서 1장 1-5절 :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갈라디아서 1장 1-5절은 이 서간의 인사의 말이다.
그리고 그 안에 전서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바울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사도임은 제1절로서 언명되었다.
그리고 그가 전하도록 명해진 복음이 무엇인가,
그 대요가 이들 수절 안에 명기되어 있다.
우리들은 이것을 읽고서 의외로 느낀다.
하지만 그 의외인 곳에 복음의 복음 된 소이 있는 것으로 믿는다.
나는 [교의의 대요]라고 한다.
교의란 교회가 교권으로서 신자에게 과하는 신앙개조는 아니다.
신자의 신앙을 간단명료한 문자로서 나타내 말한 것,
그것의 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다.
우리들의 신앙이 모호해서는 안 된다.
일목요연해야 한다.
세상이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우리들이 개의하는 바 아니다.
[예,
예, 아니, 아니,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있다.
교의를 내세우는 것을 좁다고 하는 자는 아직 신앙의 단순성을 모르는 자이다.
그리고 바울이 잡고서 동하지 않았던 교회의 하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아버지]라고 한다.
바울은 지상에 생존한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사도된 사명을 받은 것은 아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다메섹 도상에 있어서 이방전도의 직을 받았던 것이다.
부활이 무엇인가는 별문제로 하고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 지금은 하늘에 계시면서
지상의 만사를 지휘하시는 것을 전연 의심치 않았다.
그는 죽은 예수의 유훈에 의해 움직이는 그 숭배자는 아니었다.
살아계시는 구주에게 쓰이는 그 종자였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로서
그에게 사도됨의 직을 주셨다고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지자는 말하리라.
이는 황당무계한 말이라고.
하지만 이 의외인 말 안에 바울의 복음의 세력이 깃들여 있는 것으로서
이것 없이 그의 전도는 없고 또 당시의 문명세계를 구원한 그리스도교는 없었던 것이다.
(고린도전서15:1-11).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시고
지금은 살아 계셔서 아버지와 함께 만물을 주장하신다.
그것이 교의 첫째이다.
바울은 다시 이어서 말한다.
[너희는
원컨대 아버지이신
하나님, 및 우리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총과 평강을
받으라](3)
이것 또한 의외의 말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아울러 같이 일컬어야 할 동등한 분이시라고 하는 것이다.
어떠한 사람이 이 지위에 설 수 있으랴?
세상에 성인은 있었으나 하나님과 동등의 성인은 없었다.
석가의 제자도 공자의 제자도 그 스승을 하나님으로서 찬양치 않았다.
그런데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것을 가장 싫어했던
히브리인의 한 사람인 바울은 여기서 은총과 평강의 출처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앙모한 것이다.
광신인가,
미신인가?
어느 것이든 바울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서 섬긴 것은 확실하다.
특히 그리스도 신성을 말한 것 아니다.
하지만 그가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서
하나님으로서 이에 쓰인 것은 이것 또한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셋째로,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죄 위해
몸을 버리셨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고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죄
위해 죽으셨다]고 한다.
우리의 죄가 그의 죽으심의 원인됨은 분명하다.
그는 그 자신 위해 죽으신 것 아니다.
또 자기의 주의를 지키기 위해 하는 수 없이 된 것 아니다.
우리들의 죄가 그를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쫓아버리신 것이다.
가령 속죄의 죽음이 아니었다 해도 대속의 죽음이었음을 확실하다.
그에게 있어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53:5한글개역)라고 있는
예언자의 말이 실험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 죽음이 속죄의 죽음이었음은 성서의 다른 곳에 의해서도 분명하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 죄를 없이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그 외아들로 하여금 사람의 죄를 짊어지게 하시고
사람에 대신하여 속죄의 죽음을 취하게 하셨다는 것은
바울이 다른 사도들과 함께 말한 바이다.
복음이 복음 됨은 여기에 있다.
초대의 신자는
[그리스도
우리 죄
위해 몸을
버리셨다]고 듣고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잘 알았던 것이다.
바울은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교의 교사들이 하는대로
사회개조 또는 도덕적 노력을 일컬어 복음이라고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아직 연약한
때에
그리스도 정하신
날에 이르러
죄인 위해
죽으셨도다](로마서 5:6)는 것은
그의 복음의 근저였다.
사죄의 필요조건으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을 인정하지 않는 곳에
바울은 복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넷째는
[이
약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기 위한 죽음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악한 세대]라는 것은
바울 재세(在世)당시의 세상을 일컬어 말한 것은 아니다.
현세 전체를 말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근대인의 의외로 하는 바이다.
만약 이 세상이 악한 세상이라면 선한 세상은 어디 있는가?
이 세상에 악이 있음은 의심치 않으나
그러나 좋게 할 수 없는 세상으로서 실질적으로
악한 세상이라는 것은 근대인 및 이 세상 사람들이 전연 승낙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믿었다.
예수도 또 그렇게 가르치셨다.
예수 및 사도들은 이른 바 낙천주의자는 아니었다.
인류는 죄의 손에 팔리 운 자,
세상은 하나님의 저주아래 있는 자이다.
악마는 [이 세상의
주]로서
이 세상은 그 논적으로 악한 세상이라는 것은 성서의 교시이다.
그러므로 말한다.
[이
세상 혹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
사람이 만약
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랑,
그 중에
없다]고,
이 세상은 사람이 실시하는 교화운동 정도로 좋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개조를 기다리지 않으면 도저히 선하게 될 가망 없는 자이다.
여기서 다섯째의 교의가 생기는 것이다.
즉 사람은 이 세상에서 구원됨의 필요가 있다.
구원,
다름 아니라 구출이라는 교의이다.
신자는 이 세상을 개조하여 하나님의 나라 되게 하려는 자가 아니다.
그는 이 세상을 부인하고 즉 근본적으로 악한 세상이라고 인정하여
그 안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소돔과 고모라,
신자는 롯 같이 하나님께 인도되어 그 안에서 탈출해아 할 자이다.
염세주의라면 그것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성서의 인생관임을 어찌하랴?
그리스도교는 결코 이 세상을 선한 세상으로는 인정치 않는다.
또 그것이 진화하여 마침내 천국이 될 것이라고는 가르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는 악은 악이라 일컫고 사람에게 거짓된 희망을 제공하여 그를 속이지 않는다.
바울은 명백하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에게
복종하여
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내시려고 우리 죄
위해 몸을
버리셨다]고 하여
그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명시하였다.
속죄,
구원,
그리스도의 재림,
만물의 부흥 등의 교의가 이 일절 내게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상은 갈라디아 서간의 인사의 말 안에 담겨져 있는 바울 창도의 교의의 대요이다.
그리고 문제는 이것은 오인이 신봉하는 교의일까,
그것이다.
지금 그리스도교라고 하면 사랑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사랑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부활,
그의 신성,
속죄,
구출의 교의에 나타난 사랑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를 천박하게 쉽게 해석하여
나는 그리스도교를 요해했다고 칭하는 자 많음을 슬퍼한다.
그러한 사람은 갈라디아서를 읽고서 그 발단의 말에 실족하는 것이다.
특히 이 세상을 일컬어 악한 세상이라 하고
구원은 이 세상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서 구출되는 일이라는 것을 듣고서
그들은 의외로 느껴져 자신 복음의 신자가 아님을 인정하든가,
아니면 바울의 신앙을 비난하고 이것을 유대교의 감화를 벗어나지 못한
바울 독특의 인생관으로서 그리스도의 그것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그리하여 자기의 불신을 변호하고자 한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갈라디아서는 흥미 지극히 적은 글이다.
다만 바울 연구의 좋은 재료로서 또 종교역사의 좋은 재료로서 진중되는데 그친다.
오늘 제16세기의 대개혁을 일으키게 한 이 글이
그리스도교회에 있어서 필요불가결의 시로서 중요시되지 않음은
교세쇠퇴의 무엇보다도 좋은 증거이다.
지금의 사람은 말하리라.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났거나 살아나지 못했거나,
사람이거나,
하나님이거나
그것은 실제생활에 아무런 상관없는 문제이다.
사람은 다만 그리스도 같은 인격을 갖추면 좋다.
기타의 신학문제 같은 것 오인은 이것을 불문에 붙여 가하다.
특히 우주 및 인생에 관해서는 오인은
근대의 진보된 과학 및 철학에 배울 것이다.
낡은 옛 바울에게 배울 필요 없다.
만약 그러한 일에 있어서까지 오인은 성서에 듣지 않으면 안 된다면
오인에게 지식의 진보도 없고 활동의 자유도 없는데 이르리라.
신학문제의 공구라든가 고대 신화의 천착은 이것을 한인에게 맡겨 가하다고.
그렇지 않은 것이다.
우리들의 구주는 죽어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과 같으신 이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약한 죄인인 우리들에게
구주로서의 소용을 다하지 못한다.
그리스도 신자는 죽은 성자의 자취를 더듬어 가면서
자기의 완성을 꾀(도모)하는 자는 아니다.
살아 계시는 구주에게 몸을 맡기고 하나님을 닮으려 하는 자이다.
그리스도 신자는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하여 행하는(살아가는)
자가 아니다.
그는 곧 인도되는 자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
만약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신앙은
헛되고 우리는
아직 죄에
있다](고린도전서15:17)는 것이다.
그리스도 부활의 신앙은 그리스도 신자에게 있어서 실제상 가장 필요하다.
이 세상은 악한 세상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는 설도 아니려니와 신학도 아니다.
인생을 깊이 맛본 자가 누구나가 인정하는 바의 사실이다.
세상은 학술의 진보와 함께 점점 좋아진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 반대가 사실이다.
세상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
예수가 가르치신 대로 바울이 여기서 말한 대로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악한 세상이다.
이것을 인정치 않고서 이 세상을 좋게 하려고 하는 까닭에
우리들은 한 없이 잘못을 행하는 것이다.
적을 모르고서 적에게는 이길 수는 없다.
병을 모르고서 병을 고칠 수는 없다.
불치의 병인을 고치려 하는 까닭에 무익한 노력을 하는 것이다.
이 세상 인력으로서는 도저히 구원할 수 없는데 까지 썩은 세상이다.
그러므로 전능의 하나님의 개조를 요구하는 세상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자기를 전연 하나님께 넘겨 드리고(내어 맡기고),
그의 그릇으로 되어 그 성업에 참가함이 허용되는 것이다.
멸망하도록 정해진 세상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으로서 남는 동안은
자기도 구원되지 못하고 세상도 구원할 수가 없다.
사람은 거룩(성결)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즉 하나님의 것이 되기 위해 세상에서 떠나지(성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세상의 사람이면서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고자 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리스도 신자는 세인의 눈으로 볼 때 괴짜 아닐 수 없다.
*내촌감삼의 갈라디아주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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