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4일 일요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혈육과 의논하지 않고 아라비아로 가다

갈라디아서 1 11-24 :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동족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나보다 먼저 사도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21)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바울은 자유 독립의 전도사라는 것은 그가 서간의 벽두 제일로 말한 바이다.
그가 전한 복음도 또한 자유 독립의 복음인 것은 그가 이제부터 말하려는 것이다.

사도된 자신의 직분과 그가 전파하는 복음은
가지로 사람에게서 나은 아니고
사람을 거쳐 주어진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와 하나님의 아들을 가지고서
그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자유독립의 사람에 의해 자유독립의 복음이 갈라디아인에게 전해졌다는 것이다.
번거러운 되풀이 같으나, 이때 바울의 입장을 변명하는데 있어서
필요 불가결의 방식이었다.

바울은 여기서 전과 거의 같은 어조로서 말한다.

[형제여, 내가 너희에게 전한 바의 복음은 사람에 의한 아니다.
그것은 내가 이것을 사람에게서 받지 않고 배운 아니라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묵시에 의해 받은 것이다](1:11-12)라고.

[내가 다시 너희에게 알려준다] 한다.

이것은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과 함께 있을 종종 그들에게 말이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변신에 처하여 다시 말하지 않을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문제이다.
그에 대해 이것을 인정함 없이 그가 사도됨의 권리를 인정할 수는 없다.

[ 복음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한다.

원어의 Kata anthropon [사람에 준하지 않는다] 뜻이다.

인적이 아니라 신적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 복음은 세상의 방식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역하여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내용,
실질에 있어서는 물론의 , 수수의 방법에 이르기까지
세속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오늘의 말로서 한다면

[형제여 내가 다시 너희에게 알려준다.
내가 일찍이 너희에게 전한 바의 복음은 세속적이 아니다]라고 하여

아주 바울의 뜻을 통하리라고 생각한다.
바울의 복음은 무엇이었다 해도 세속적은 아니었다.
이것은 전연 비세속적이었다.

세상은 사람들의 눈으로서는 도저히 이것을 해득할 수가 없다.
그리고 갈라디아 사람은 영의 사람이기를 그치고
다시 본래의 육의 사람, 세상의 사람으로 돌아간 까닭에
바울과 복음을 오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내용은 뒤로 돌리고 먼저 수수의 방법에 대하여 말한다.

[나는 이것을 사람에게서 받지 않고 배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묵시(계시) 의해 받았다] 한다.

사람을 거쳐 전해지지 않고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
점에 있어서 이미 비세속적이다.
복음의 근본적 진리를 전하는데 대하여 바울에게 세상의 선생은 없었다.

그는 그것에 있어서 전연 자유이고 독립이었다.
그는 복음을 예루살렘의 ()교회에서 받지 않고

베드로 요한 등의 사도들에게 배우지 않고
이것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았다.

그것도 차근차근 배운 아니고 직각적으로 계시에 의해 받았다고 한다.
실로 대담하기 그지없는 고백이다.
만약 진실이 아니라면 최대의 허위이다.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없다고 그의 반대자들은 말했을 것이 틀림없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사실 그대로를 말하여 그의 말이 망언이 아니라 진실임을 증명했다.
[지금 내가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 아니다](1:20라는 것은

그가 자기 양심에 호소하여 종종 되풀이 하여 말이리라.

그리고 사실은 1 13절에서 2 말절(末節) 이르기까지의 그대로였다.

이것은 바울의 개신(改信) 그의 후에 사정에 관한 그의 자서전으로서
그의 생애를 아는데 있어서 가장 귀중한 기사이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생애에 대하여 기록하는 것이 아주 많다 해도
정확한 것에 있어서는 그가 남긴 서간에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서간 중에서 가장 사실적인 것은 갈라디아서이다.

사람을 아는 자는 사람 자신이다.
특히 바울 같이 내적 실험을 서술함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의 자기 묘사는 전기문학의 경전이라 칭하여 가한 것이다.

문자 그것이 속이지 않는 사실의 증명이다.
만약 있었던 일이 아닌 것을 그렇게도 여실적으로 서술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사람은 실로 사기사의 괴수이다.
그러나 세상에 아직 이때까지 바울의 진실을 의심한 자는 없다.

바울은 세상에서 이르는 인텐스 캐릭터다.
무슨 일은 하는데도 철저하지 않으면 마지않은 성격의 사람이었다.

그는 유대교에 있어서는 유대교에 철저하고
그리스도교에 반대하는 때는 철저적으로 반대하고
잘못을 고치는 때에는 철저히 고쳤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자 같이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것은 그의 견딜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한번 그의 구신앙이 잘못되었음이 명시되자

그는 [ 혈육과 의논하는 일을 않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명에 복종했다고 한다.

[혈육]이란 부모, 형제들, 혈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실 또는 이익 몸에 관계되는 모든 고락 또는 이해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혈육과 의논하지 않고]

누구와도 의론치 않고
자기 이해를 돌아보지 않고
일의전심,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행동했다는 것이다.

철저한 사람이다. 독립의 사람이다.
용감한 사람이다.
과격한 사람이라고 하면 못할 것도 없으나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용기결심이 없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충실할 없는 것이다.

만약 바울이 이들 혈육과 의논했더라면 어떠했을까?

만약 그가 부모 형제에게 상담했더라면 그들은 물론 그에게 반대했으리라.

만약 스스로 헤아렸더라면 어떠했을까?
자신의 이해관념이 그로 하여금 그러한 무모한 사업에 들어가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으리라.

만약 예루살렘교회의 12사도들에게로 달려갔더라면 어떠했을까?
그들은 먼저 제일로 그의 성의를 의심하고
그에게 따져 묻는데 많은 질문으로서 하고
그의 열심을 냉각시키고
그의 용기를 꺾고 많은 유대적 사상을 지우게 하고
그가 직접으로 하나님에게서 받은 계시의 자유를 방해했으리라.

사람은 그의 임의 행동을 책할 것이지만
그에게는 그가 지켜야할 거룩한 비밀이 있었다.

그러한 경우에는 혈육은 모든 형태에 있어서 돌아보지 않는 것이 지혜이며 의무이다.

사람에게 의론하지 않고 자기를 돌보지 않고
다시 하나님께 배우기 위해 바울은 아라비아로 갔다.
이르기를

[하나님, 뜻에 있어서 선하게 여기시는 때에
내가 모태에 있을 때부터 나를 택해 두시고
은혜로서 나를 불러 주신 나로 하여금
이방인에게 전도하게 하시기 위해 아들을 내게 나타내시기를
좋게 여기신 그때 나는 혈육과는 의논하지 않고
나보다 먼저 사도되어 예루살렘에 있는 이에게도
올라가지 않고서 떠나 아라비아로 갔다.
그리고 다메섹으로 돌아왔다](1:15-17).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고 반대로 아라비아로 내려갔다] 것이다.

사람에게 배우려고 교리의 소재지인 예루살렘에 가지 않고
하나님에게 배우기 위해 무인의 땅인 아라비아로 갔다는 것이다.

말이 있다.

[영국인의 역사는 바다를 떠나서 말할 아니다]라고 같이
이스라엘인의 역사는 사막을 떠나서 말할 없다.

이스라엘인은 최선의 것을 모두 사막에 있어서 얻었다.
모세는 애굽인에게서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가고 거기서 하나님의 자신의 교육을 받았다.
엘리야도 호렙산으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고요한 가는 음성을 들었다.
침례 요한도 유대 산지의 황야에 거하여 거기서 주의 앞에 길을 예비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마음에 하나님의 아들을 명시 받아
이방인의 사도됨의 직에 오르려고 사람인 교사에게 달려가지 않고서
사람 없는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갔다.

사막은 모세, 엘리야, 요한, 바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교육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최량의 학교였다.

말씀마시라. 사막은 경제적으로 무가치하기 때문에
인류에게 소용없다고 인류에게 모세의 율법과 바울의 복음을 제공한 것만으로도
1,200 마일의 아리비아 사막의 존재의 이유는 충분히 인정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지구면 위에 많은 불모의 땅을 남겨두신 것은 이유 없는 일이 아닌 것이다.
땅은 모두 농원이거나 공업지여야 것은 없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 의한다] 있으매

사람 없는 사막교각의 땅도 역시 사람위해 필요하다.

사막 없는 곳에 하나님의 사람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막을 구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은 임하지 않는다.

사람의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접하기 위해 사막은 반드시 없어서는 되는 일이다.

바울의 실험이 문자대로 지금의 사람에게 거듭 되풀이 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근본정신에 있어서 모든 그리스도 신자는 그의 자취를 밟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자에게 사람인 교사는 없는 아니나,
마음에 하나님의 손을 나타내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사람은 성령에 의하지 않으면 예수를 주라 부를 없다] 바울이 말한 것은 그것이다.

이사야는 지금의 때에 대하여 예언하여 말했다.

[ 자녀들은 모두 여호와께 배우리라](이사야서 54:13).

사람에게는 사람이 도저히 가르칠 없는 것이 있다.
복음의 진리 같은 , 그것이다.

이는

눈으로 아직 보지 못하고 귀로 아직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이 아직 생각하지 못한 이다.

이는 하나님의 성자로서 사람의 영에 보여주시는 것으로서 명시에 참여하는 실험에 있어서 바울도 오늘의 일본의 그리스도 신자도 조금도 다를 없다.

일에 대해서는 나도 바울과 한가지로 제군에게 향하여 말할 수가 있다.

[형제여, 나는 지금 다시 제군에게 말한다.
내가 오늘까지 제군에게 전한 바의 복음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것을 사람으로부터 받지 않았다.
배우지 않았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묵시에 의해 받았기 때문이다]라고.

나는 클라크선생, 실리 선생 등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나,
그리스도를 마음에 나타내신 이는 이들 선생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리고 제군자신도 같은 것을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말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게도 아라비아가 있었다.
혹은 사지(死地) 사막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 없는 쓸쓸한 곳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나도 나의 생애의 어떤 때에 아라비아 사막으로 몰아 보낸바 되어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에 접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일본 같은 인구조밀한 나라에 있어서는
사막은 모래의 사막이 아니라 무정, 무자비의 사막이다.

냉혹한 지금의 사회,
옳다.
종교계 이는 사막 아니고 무엇이랴이다.

그리고 사람의 무정이 그곳으로 몰아붙일
우리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 신자는 참된 그리스도교를 신학교에서 배우지 않는다.
교회의 강단에서 듣지 못한다.
아라비아의 사막에 있어서 배운다.
거기서 울리는 하나님의 가는 고요한 음성에서 듣는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하나님께 배워 참된 형제자매 수가 있는 것이다.
참된 고독을 맛본 사람만이 참으로 일치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라비아의 해석

바울이 갔다는 아라비아는 어디였던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이설이 있다.
아라비아는 나라라기보다는 오히려 대륙이라고 해야할 지역으로서
단지 아라비아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어느 땅인지는 모른다.

바울은 이때에 어떤 사람이 말했듯이
그의 최초의 전도를 시도하기 위해 아라비아에 것은 아니다.
침사묵고하여 복음의 진리를 받기 위해 은닉했던 것이다.

그리고 넓은 아라비아 대륙 내에서 그의 목적에 가장 적합했던 곳은
말할 것도 없이 시내반도이다.
이곳은 모세가 애굽에서 피하여 40년간 침묵적 생애를 보낸 곳이다.

여기서 그는 여호와의 계시에 접하고 후일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이곳에서 머물고 산정에서 여호와의 (십계명) 받았다.

그러므로 진실한 이스라엘인으로서 잠시의 은닉을 도모하는 자는
회상할 사연 많은 땅을 택했을 것이 틀림없다.

예언자 엘리야가 여왕 이세벨의 노를 피한 것도 이곳이고
그가 하나님의 가는 고요한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시내반도 호렙의 산에 있어서였다(열왕기상19).

그리고 바울도 또한 이제 인생의 기로에 서서
그의 신앙의 기초를 정하고 하나님께 쓰임의 길을 명시 받아야
필요를 느끼기에 이르러 지리학자가 일컫는 아라비아 페트라의 땅을 택하여
여기서 3년간 기도와 연구와의 생애를 보냈다고 보는 것은
가장 적당한 견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1 17절에

[아라비아로 가서]라고 있음은 시내 반도 산악의 땅으로 갔다고 해석해야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모세의 율법과 가지로
바울의 복음이 시내 반도에 있어서
하나님에게서 사람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면
사막의 땅의 귀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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