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18일 월요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마지막 권고와 인사

: [ 6:11-15]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글자로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 6:11]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글자로 것을 보라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글자로 것을 - 바울은 이제 서신 전체에 대한 결론을 맺는다.

(11-18 오늘의 본문).

본절은 '' 헬라어 '펠리코이스' '' 헬라어 '에그랖사' 시제를 어떻게 취급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이해할 있다.

(1) '펠리코이스' '' 또는 '많은' 등의 개념으로 이해할 경우 바울이 지금까지 많은 내용의 편지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Calvin, Luther).

(2) '펠리코이스' 시각적으로 '' 의미한다고 경우 바울이 글씨체를 가리킨다.

이렇게 본절은 바울이 오랜 여행 기간 둥안의 박해와 노동으로 인하여 적당한 글씨체로 글을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호소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Deissmann).

(3) 혹자는 바울이 글쓰는 사람에게 대신 쓰도록 하고 바울은 자신의 서명만 스스로 했다는 (고전 16:21.; 4:18;살후 3:17) 착안하여

(고전 16:21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4:18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살후 3:17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

구절에서 바울 자신이 직접 쓰는 부분이 시작된다는 것을 강조한다고 한다.

견해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바울 자신이 본서신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직접 펜을 들었으며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특별히 강조해야 부분이 있었음을 있다(Ridderbos).

한편 ''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랖사' 본절에서는 현재적인 의미로 '쓰고 있는'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 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전통적인 유대주의자들이라고 말할 없다.

그들은 율법을 진실하게 지키려는 유대인이라기 보다는 이기적인 욕심을 따라 사는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말할 있다.

'모양을 내다' '좋은 모양을 낸다'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로 봐서 그들은 인간적인 겉치레만을 일삼는 자들이며 겉과 속이 다른 자들이다.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 그들은 할례를 행함에 있어서도 언약적인 관계로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외형적인 모습만을 갖추기 위해 행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할례는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께서 행하셨던 할례나

( 2:21 할례할 일이 되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또한 디모데에게 할례받게 했던( 16:3) 바울의 할례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 16: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앎이러라)

그들은 단지 육신의 유익을 위해 할례를 행하였다. 본절의 '육체' 부패한 인간 본성과 이웃을 경멸하는 종교적 자만심을 뜻하기도 하며

인간의 신체 중에 할례받은 부분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말로서
그들의 자랑이 얼마나 편협되고 초라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가를 지적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뿐이라 - 할례를 요구하는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이 그리스도를 선생이나 선지자 중의 사람으로는 인정하고 있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기피하고 싫어하였다.

율법주의자들이 십자가를 싫어하는 이유는 크게 가지이다.

(1) 십자가는 유대주의자들이 스스로 세워놓은 율법적인 의의를 부인한다. 그래서 자신들을 죄인으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저주받은 자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문제 때문이다(Boice).

(2) 갈라디아의 율법주의자들이 십자가를 전파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사역과 효력을 증거해야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할례를 부인해야만 한다.
만약 그들이 할례를 부인한다면 그들은 전통적인 유대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십자가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박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십자가를 회피하고 할례의 정당성(正當性) 언급하였을 것이다.



[ 6: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할례 받은 저희라도 - '스스로 할례를 받은' 또는 '할례를 좋아하는'이라는 의미이다.

이미 할례를 받은 거짓 교사들을 선명하게 지시한다(Ridderbos)

혹자는 본문이 현재 갈라디아 교회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자들, 다시 말해서 율법주의자들에 의하여 할례를 받은 자들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제를 현재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Huxtable, Howard).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 고의적인 율법 파기를 의미한다.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할례를 행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율법준수를 도외시하는 거짓 무리들에 불과하였다.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그들은 유대교를 따르는 자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며
자기의 육체를 자랑하기 위해 모든 진리들을 마음대로 변질시키는 자들이었다.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 그들은 진리를 따른다거나 율법을 행한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지 않았다.

단지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자했다.

그들은 자아 중심적인 교만에 빠져 육체의 흔적을 신뢰하는 거짓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 자신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기뻐하며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통하여 자기들의 유익을 찾고자 하는 이기적(利己的) 사람들이었다.



[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 이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면서 할례를 자랑하는 율법주의자들의 삶의 태도와 대조를 이룬다.

세상이 보기에 십자가는 연약함과 불행의 상징이었지만 바울에게 있어서는 자랑이었다.

(고전 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이러한 역설적인 표현은 바울이 가졌던 진리의 본질과 삶의 동기와 목적을 선명하게 대변한다.

한편 '내게는'이라는 표현은 온갖 불의를 무릅쓰고 끝까지 진리를 사수하는 바울의 열정을 나타낸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자신에게 적용시킨다.

그도 한때 세상의 영광들을 구하며 인간적인 성공을 바라보며 살았던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다.

( 3:3-6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할례파라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이제 그는 냉철하게 세상과 자신을 구별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새생명을 자랑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히고'라는 절대적인 표현 속에 나타나 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자아(自我) 절대로 세상적인 방식을 따라 살아갈 없다.

여기서 '세상'(코스모스)이란 인간들의 자기 주장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불신앙적인 요소와 악의 총체를 의미한다.

바울이 '세상' '' 배타적인 관계로 여기고 십자가에 박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유일한 구원과 생명의 근거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 바울은 구원의 조건으로 무할례를 강조하지 않는다.

할례와 무할례는 상대적인 요소들로서 절대성을 지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고전 7: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바울이 앞절에서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다가

'새로 지으심을 받은 ' 관심을 돌린 것은 매우 흥미있는 전황이다.

말은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Ridderbos).

'지으심을 받은' -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은 삶의 동기와 목적도 새로운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 성도는 현재의 속에 미래에 이루게 종말의 삶을 도입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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