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15일 금요일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선행에 대한 권고 2

: [ 6:6-10]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가르침을 받는 - 이는 원래 '이해하게 하다', '귓가에 울리게 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때로는 '좋지 않은 소리를 귀에 따갑도록 반복해서 알리는 ' 의미하기도 하였다.

( 21: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24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것이라).

혹자는 본절에 언급된 자들이 유료(有料)교사들의 집단일 것이라고 추측한다(Boice).

그러나 본절 '카테쿠메노스' 어떤 특정한 단체나 조직 속에 있는 자들을 가리키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교훈 아래 있는 '들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할 같다(Boice, Cole).

말씀을 가르치는 - '가르침을 받는 '들의 신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듯이 '가르치는 '들의 신분도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이들은 '말씀' 가르치는 자들로서 다른 서신서에서는 '디다스칼로이'라고 표현되었으며 '교사'라고 번역되었다.

(고전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다음은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4: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들 '교사들' 본절에 기록된 '가르치는 '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인지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둘로 나뉜다.

본절에서 '가르치는 '들은 보다 초기의 직분자들로서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과 바나바와 디도같은 사역자들과 교회가 임명한 장로들을 가리킨다(Huxtable).

( 14:23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이들은 '교사'들과는 달리한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 이라기보다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전도 여행자들을 뜻하는 같다.



[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 - '속이지' 해당하는 헬라어 '플라나스데' 3절에 '프레나파타'와는 차이가 있다.

'플라나스데' '길을 잃게 하다', '진리에서 벗어나도록 하다', '잘못되게 유인하다','미혹하다' 등을 뜻하는

'플라나오' 현재 수동태 명령법으로 '어떤 유혹에 미혹되어 믿음을 잃게 되다' 뜻이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 '만홀히 여김' 해당하는 헬라어 '뮈크테리제타이' '바보 취급당하다'(to be fooled,NEB)라고 번역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의 그릇된 본성과 연관되어 있다.

인간의 이기적 본성에 의하여 저질러진 행위는 결국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등한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본절에서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 것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꿰뚫어 보시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께서

( 139:1-6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11:5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렇게 말하였도다 너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아노라)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공의로운 심판을 하실 것을 의미한다.

본절에서 바울은 율법을 지킨다고 자부하며 할례를 행하는 자들이
오히려 진정한 율법의 정신인 사랑과 선행을 무시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는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교훈하고 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 바울은 인간의 행위를 자연 법칙에 비유한다.

이렇듯 행위와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뿌리고 거두는 비유를 사용하는 것은 혤라 문화와 성경에서 자주 발견된다.

( 7: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4:26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19: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고후 9:6 이것이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바울은 고후 9:6에서 적게 심는 것과 많이 심는 것의 차이 대하여 설명하였으나
본절에서는 심는 것과 거두는 것의 '' 대하여 논한다.

'심든지' 인간이 지속적으로 행하는 각각의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그것을 어떻게 실생활에 실천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가 미래의 심판대 앞에서 어떠한 결과를 거둘 것이냐 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

'심은 대로 거둔다' 일반적인 법칙은 서로 다른 가지의 경우에 적용된다.

바울이 앞장에서 육체와 성령을 비교한 논리(5:16-18)와는 차이가 있지만

(5:16-18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세상 끝의 추수를 바라보는 시간은 동일하다.

타락한 육체의 본성을 따라 규모없이 생활한다면 육체적 부패와 도덕적 타락을 초래하게 되며 영적인 성품들을 잃게 것이다.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 것은 자기의 삶을 성령에게 맡기고 성령의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러한 삶은 인간 내면세계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부터 '영생' 얻게될 것이다.

이는 육체적인 생명전체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부활 후에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영화(榮華)로운 생명을 의미한다(Ridderbos).



[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 구절은 마지막 추수의 때가 지연된다는 것을 염두에 표현이다(Ridderbos).

임박한 종말을 눈앞에 두고는 누구든지 긴장하게 마련이지만,
간사한 인간은 '지연'으로 인하여 스스로 피곤해 하며 넘어지게 것이다.

한편 본절의 내용은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살후 3:13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 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그러므로 - 이는 앞에 기술된 사실들을 결론적으로 다시 반복하여 강조하고자 자주 사용되며 구약을 인용하고 나서 부연 설명을 시작할 사용되기도 한다.

본절에서는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기회 있는 대로 - '기회가 있는 동안', 또는 '기회 있는 대로' 등의 뜻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Lenski, Ridderbos, Huxtable).

본문은 개인의 생애 가운데 제한되어 있는 기회의 제한성을 나타낸다.

착한 - 이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베푸는 자비와 동정심을 가리킨다.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 바울이 이처럼 믿는 자들에게 특별히 잘해주라고 권면하는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 속에 있는 거짓 교사들과 유대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가정들'로는 신약에서 바울 서신에만 나타난다.

(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악한 자니라).

바울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무리들은 신앙 공동체의 불가분리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이처럼 바울이 성도들을 하나의 대가족 단위로 파악한 것은

성도들을 '이웃'보다 긴밀(緊密) '형제'(아델포스)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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