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12일 화요일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성령으로의 믿음

갈라디아서 5 5 :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바울의 말은 간결로서 유명하다. 그는 말을 아꼈던 것일찌.
혹은 사상에 가득차서 이것을 나타내기에 족한 말을 가지지 못했던 것일지?
아마도 후자가 사실이었으리라.

실로 후세에 주해자를 괴롭히는 것으로서 바울 같은 이는 없다.
유명한 갈라디아서 3 20 같은 것은 일례이다.

(3 20 중보자는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분이시니라)

일절에 대하여 430여종의 주해가 있다고 한다.
이로써 그것이 얼마나 난해의 일절인지를 있다.
만약 그가 여기에 일어 또는 이어를 더해 두었더라면 주해자는 얼마나 도움받았으랴!

실로 바울은 심술궂을 만큼 간결했다.
우리들이 지금 여기서 연구하고자 하는 일절은 전의 일절 만큼 난해는 아니다.

대체의 뜻은 명료하다. 다만 아주 간결한 점에 있어서는 전연 바울식이다.
중에 일언의 무용은 없다.
그중에 대명사 하나 동사 하나, 명사 있는데 어느 것이나 중한 말로서 하나도 소홀히 수는 없다.

유명한 주해자 알베르트 벵겔(8202역주),
절에 다음의 6절을 합쳐 그리스도교의 전부는 2절에 있다고 것도
반드시 과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는 일언일구에 구정의 무게가 있는 것이다.

일역 성서는 일절을 역하여 이렇게 하고 있다.

[우리가 바라는 바의 , 신앙으로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을, 성령에 의해(힘입어) 기다린다].

원문의 대의를 나타내는데 틀리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세참과 깊이는 훨씬 역문 이상이다.

일절의 경우에 있어서도 깊은 의미를 찾는 지름길은 원문 그대로의 직역에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다.
[우리는 (그것은), 성령에(의해), 신앙을 가지고서, 희망을 의의, 대망하므로 이다]

[그것은 하므로 이다]
전절과 관계있는 소사이며 주해상, 편의 위해 이것을 생략한다 해도, 일절 중에 여섯이나 되는 중요한 말이 있다.

우리, , 신앙, 희망, , 대망, 이것이다. 어느 것이나가 중요한 말이다.

바울은 여기서 불과 여섯 개의 말로서 그리스도교의 육대교의를 이어 맞춘 것이다.

[우리는]다른 사람은 모른다.

(다만) 우리는. 이방인은 모른다. 유대인은 모른다. 유대주의의 그리스도 신자는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 이라고.

바울은 여기서 그와 그와 동신앙의 사람들을 다른 사람에게 판연히 구별하여 말했던 것이다.

율법으로서 스스로를 의롭다함 얻고자 하는 , 도덕으로 자기를 성결케 하려는 ,
의례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는 , 현세에 있어서 완전을 기하는 ,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것으로 구원되려 하는 . .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자기와 자기 동지들을 구별하여 말했던 것이다.

[우리들은]이라고.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 단순한 대명사로 고조하여 읽을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자기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그리하여 남에게 오해받지 않기를 힘썼던 것이다.

그는 여기서 바울당이라는 것이 있음을 말하여 꺼리지 않았다.
신앙의 근본의의 관계되는 대문제이다.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 자기와 동지와의 입장을 애매하게 하여 광량대도 결당으로서 비방된대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타인은 모른다. 신자는 모른다.

[우리들은]이다.

타인은 모른다. 우리들은 이단과 (관계:합세) 수가 없다.
우리들은 이렇게 믿는다. 세계는 통틀어 편에 서려거든 서라.
우리들은 그렇다.
소수인 우리들은 편에 것이라고.
바울식의 공경하고 사랑해야 독립적 태도를 나타낸 대명사이다.

[](성령) 경우에 있어서는 특별한 영으로서 성령이다.
그리고 성령은 사람을 돕는 때의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은 성령으로서 사람의 영에 임하신다.
성령으로서 빛을 주시고 성령으로서 능력을 더하게 하시고
성령으로서 만사를 풀게 하신다. 성령에 의해서이다.

신자는 성령에 의하지 않고서 무슨 일도 수가 없다.
그는 성령에 의해 기도하고
성령에 의해 만사를 찾아 안다.

하나님의 능력이신 성령에 의해 하나님께 이르고
하나님의 빛이신 성령에 의해 하나님을 안다.

바울은 역설하여 말했던 것이다.
타인은 모른다.
우리는 우리 당은 자기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다.
수양에 의해서가 아니라 탐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례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로부터의 능력이신 성령에 의해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크리스천은 원래 타동적이다. 자동적이 아니다.
위에서 구해진 자로서 아래에서 구한 자가 아니다.
그의 신앙 그것마저 성령에 의해 생겨진 것으로서
스스로가 구하여 생긴 아니다.
성령에 의해서이다. 우리들은 성령에 의한다고 바울은 역설했다.

[신앙] 하나님은 성령으로서 우리에게 임하고 우리는 신앙으로서 이에 응한다.

신앙 그것이 성령에 의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일으키신 것이라 해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은혜에 대하여 사람으로부터의 응락으로서 이에 응하는 것은 신앙이다.

신앙은 신수이다. 신뢰이다.
신종이다. 부모에 대한 갓난아이의 태도이다.
다만 맡겨드리는 일이다. 조금도 자기의 의를 말하지 않는다.
조금도 의례의 의를 구하지 않는다.

스스로 자기를 성결케 하고서 그런 후에 하나님의 수납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믿는 것이다.
죄의 그대로 무지무학을 감싸지 않고 아버지 부르시면

나는 갑니다. 하고서 없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는 태도이다.
타인은 모른다.

그들은 무류의 교의와 신학과 심원한 성서 지식과 정통적 전설과 없는 제도와 의식에 의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하지만

우리들은 우리들 동신의 무리들은 승려, 교직, 신조, 의례 등에 아무 구애를 받지 않는 우리들은
다만 신앙에 의해. . 서라고 바울은 역설했던 것이다.

[희망] 신자의 생애는 모두가 성령에 의해 신앙을 가지고서한다.
그리고 모두가 희망이다.

[우리는 여기에 있어서 언제나 가질 도성 없도다. 다만 장차 도성을 구한다](히브리서13:14).

[우리들은 약속에 의해,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바라본다. 가운데 있다](베드로후서3:13).

신자는 세상에 있어서 자기의 나라에 있는 아니다.

[우리의 나라는 하늘에 있다](빌립보서3:20) 있다.

그는 구원되었다고 해도 아직 완전히 구원된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희망 속에 구원되었다](로마서8:24) 있다.

[우리는 지금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지만 뒤에 어떻게 될까?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요한제1 3:2) 있다.

만사가 희망 속에 있는 것이다.
신자는 세상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얻은 것은 아니다.
최선을 받을 아니다. 모든 것과 최선을 약속받은 것이다.

[너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 감추어져 있다](골로새서3:3) 있어서
생명 그것까지도 희망의 목적물로서 지금의 우리의 눈에서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바울은 지금의 많은 신자처럼 세상에 있어서 황금시대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이미 얻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바랐다(빌립보서3:13).

그는 바라는 것이었다. 대망하는 길이었다.
그는 만사를 걸고서 미래의 영광에 참여하고자 했다.
그는 생애는 전연 희망의 생애였다.

세상에 있어서 모든 것을 잃고서 오는 세상에 있어서 모든 것을 얻고자 바란 생애였다.

사람은 희망의 동물이라고 하는데 바울 , 그의 동신(童身) 친구만큼 희망뿐인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만사만물을 희망 속에 가졌던 것이다.
그들의 구원도 생명도 보상도 모두 이것을 희망으로서 가졌던 것이다.
꿈꾸는 자들이여 하고 세상 사람들은 그들에 대하여 말하리라.

[] 이것 역시 대문자이다.

인생의 10분의 9 정의이다 라는 것은 영국의 유명한 사상가 매듀 -놀드 말이다.

의는 내적이다. 외적이다.
마음의 의로운 상태이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의로운 관계이다.
하나님의 정도에 기초한 내외의 조화이다.

세상에 사모할만한 것으로서 같은 것은 없다.
천국이라 하여 별다른 아니다.

[ 가운데 있다] 하여 의가 완전히 행해지는 곳이다.

나도 의인 있고 남도 또한 모두 의인 되어 의가 자유자재로 행해지는 곳이다.
의의 반대는 죄이다.

그리고 죄의 결과는 안에 있어서 오예이다.
투기이다. 구한이다. 분노이다. 창질이다.
밖에 있어서는(밖으로는) 분쟁이다.
경쟁이다. 전쟁이다.
세상이 싫은 것은 때문이다.

천국이 사모되는 것은 때문이다.
의는 신자의 최대목적물이다.
미보다도 이보다도 그는 의를 사모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미는 의의 표현이다.
이는 의의 원리이다.
그는 자기가 의롭게 되기를 바라고
인류가 의화 되기를 기도한다.

그는 의에 기초하지 않은 사랑을 믿지 않는다.
이에 기초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면서 사랑이 아니다.

의가 무너질 것인가. 우주 인생의 근저가 무너지는 것이다.
구원도, 영생도, 영광도, 모두 의에 기초하는 것이다.
다만(오직)이라는 일자이다.
인생의 10분의 9라고 해서는 족하지 못하다.
전부가 한자 중에 포함되어 있다.

[의의 희망] 신자의 생애는 희망의 생애이다.

특히 의의 희망의 생애이다. 의의 실현을 대망하는 생애이다.
자기의 의의 완성을 대망하고
물이 대양을 덮음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땅을 덮기에 이르기를 대망하는 생애이다.

[ 구원이 가까웠고, 의가 나타날 것이 가까웠다](이사야서56:1)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시는 그대로이다.

사람은 신앙에 의해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있음은 의로 인정된다는 것을 말함이고
그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 완전한 의인으로 된다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신자는 세상에 있어서 의인으로 인정되고(의인으로 취급되고),
내세에 있어서 의인으로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자녀이다. 후에 어떻게 것인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나타나는 때에는 하나님 닮을 것을 안다](요한제13:2) 있다.

의인으로 인정되는 것은 커다란 은혜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의인으로 되는 것은 은혜의 극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혹은 그날에 있어서) 완성하시는 것이다(빌립보서1:6).

의로 되는 것은 아직 희망으로서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희망이매 소기에 어긋남이 없는 희망이다.
반드시 실현될 희망이다. 실현되어야 의의 희망이다.
죄의 염오할 것과 의의 사모해야 것을 아는 신자에게 있어서는
희망에 지나는 희망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희망은 인류의 희망이다. 만물의 희망이다.
의가 우주에 행해지는 때에 조화의 목적은 달해지는 것이다.

신자는 자기에 관해,
사회에 관해,
인류에 관해,
우주와 만물에 관해,
의의 희망을 가지는 자이다.

[대망] 희망의 간절함.

이것을 대망이라고 한다. 혹은 교망이라고 한다.
발돋음 하면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는 상태이다.
혹은 학수라고 한다. 목을 길게 빼어 기다림의 뜻이다.

그리스어의 대망 이란 몸을 앞으로 굽히고 손을 펴서 무엇을 받으려함의 뜻이다.

절절한 희망이다.
발돋음하고, 하늘을 쳐다보고, 목을 길게 빼고, 손을 , 약속의 물건에 접하려는 태도이다.

그리고 신자 일상의 태도는 태도이다.

[우리의 나라(시민권) 하늘에 있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
그곳에서 오심을 기다린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있는
능력에 의해 우리 비천한 몸을 바꾸어 영광의 몸과 같은 모양이 되게 하실 것이다](빌립보서3:20-21)라고 있음은 태도이다.

초대의 신자는 언제나 태도로 서서 외쳐 말했던 것이다.

[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그들은 세상에 있어서 참무(), 궁핍, 박해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희망은 모두가 하늘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망했던 것이다. 절망했던 것이다. 교망했던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손을 펴서 다시 오셔서 은혜를 베푸시기를 대망했던 것이다.

아페크데호마이라는 일어는 초대신자의 심리상태를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특히 바울 특애의 말이다.

로마서 8 19, 23, 25, 고린도전서 1 7, 빌립보서 3 20, 히브리서 9 28 등에 있는 [기다림]또는 [대망]이라고 있는 것은 모두 아페크데호마이이다.

실로 통절한 일어이다. 이로서 바울이 얼마나 내세적인 사람이었는지를 수가 있다.

[의의 희망을 대망한다] 있어 안에 무언가 한마디 생략하고 있음을 있다.

약사법은 바울의 독특한 문법이다.
그는 문의 명료한 한은 문자를 생략하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물론 의의 희망의 실현을 대망한다는 뜻이다.
도구나 희망을 대망한다는 것으로 희망이 얼마나 간절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여기서 말했던 것이다.

우리들은 나와 동신(童身) 벗들은 바울, 소스테네, 디모데, 실와노, 실라, 누가등은, 발돋음하고 목을 길게 빼고 손을 펴서 하늘을 우러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약속하신 의의 희망이 실현되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들의 사상 또는 노력에 의하지 않는다.
성령에 의해 신앙에 의하는 것이다.
성령에 의해 도움 받아 신앙으로서 이에 응하고
이제 이미 의로 인정되고 뒤에 온전히 의로 되기를 대망한다.

성령, 신앙, , 희망 그리고 실현을 대망하는 절절한 , 우리들은 이것을 나타내 말하는데 달리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신앙을 표방하는 대문자를 벌이어 놓을 이라고.

그리고 바울이 간단하고도 심원한 말을 하게 이유는 달리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당시 이미 그리스도교 내에 행해진 갖가지의 이단에 대하여 말을 발했던 것이다.

인력을 주창하는데 대하여 신력, 성령을 말했던 것이다.
행위를 주장하는데 대하여 신앙을 주장했던 것이다.
구원의 완성을 현세에 기하는데 대하여 의의 희망을 고조했던 것이다.
그리고 현세에 만족하는데 대하여 대망적 생애를 선언했던 것이다.

그는 이들의 이신, 이설의 사람들에 대하여 자기의 입장을 분명히 말했던 것이다.

[우리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들은 이렇게 믿는다].

그는 이단을 배척하면서 참복음의 근본을 말한 것이다.

바울이 말한 복음, 그리고 우리가 오늘 믿는 복음, 그가 이것 이외에 복음 없다고 말한 복음,

(갈라디아서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내가 오늘 의거하여 서는 바의 복음,

그것은 갈라디아서 5 5절의 말씀이다.

(5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우리들은 성령에 의해 신앙에 의해 의의 희망을 절망한다는 것이다.
이것과 다음절에 있어서의 사랑의 일자를 더하여
벵겔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교의 전부는 안에 있다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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