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의 보상
갈라디아서 6장 9절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그것을 만약
한결같이 하노라면
우리는 때에
가서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갈라디아서6:9.일본어역)
선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룩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인지는 우리들 인간으로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언젠가 하나님의 뜻에 합의한 때
반드시 사실로 되어 이 세상에 나타나 오는 것은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을 행한다]란 본장의 6절에 있는
[도를 가르치는]이라는 말을 받아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는 선행 중에서 가장 큰 것입니다.
사람에게 영생을 주는 일,
이것이 선행의 지극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선행,
특히 생명의 말씀을 사람에게 부여하는데 낙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낙심하기 쉬운 일로서 이 사업 같은 것은 없습니다.
사람은 쉽게 선을 받지 않습니다.
아니,
허다한 경우에 있어서는 조소,
매리로서 이것을 물리칩니다.
가령 또 받는다고 해도 좀처럼 감사한 마음으로서 이것을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같은 것은 있어도 없어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의사를 우대하고 정치가를 환영하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다주는 전도사를 맞이하는 데는 극히 냉담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몇 번이고 실망하고 몇 번이고 낙담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때는 생각합니다.
선을 행함,
무슨 유익 있으랴?
도를 전함,
무슨 소용 있으랴?
내게 실익 없는 것은 내 능히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도 내 근로에 의해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하는 것 아닌가?
나는 하나님의 도를 말하여 무익하게 내 생애를 소비했다.
나는 수중에 씨앗을 뿌렸다.
모래위에 묘종을 심었다고.
그리고 그렇게 탄성을 발하고 전도를 폐지하여
상업 또는 정치에 들어간 전도사는 결코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는 무익한 탄성입니다.
이는 무지한 실망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것은 만약 한결같이 꾸준하면 우리가 때에 이르러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어떠한 사업이라 해도 그 성효를 보기에는 많은 인내를 요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특히 사람의 영혼을 구원함을 목적으로 하는 전도사업이
그 효를 울리기까지에 많은 시일을 요함은 물론입니다.
하나의 은행을 일으키고 하나의 정당을 세우는 것 마저 많은 세월을 요합니다.
그리고 그 얻은 바는 무엇인가하면 불과 수십백만의 재산이든가 혹은 일국의 정권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전도로서 사람의 영혼을 영원에까지 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에게 무궁한 생명을 줄 뿐 아니라
자신도 하나님 앞에 서서 자기가 받은 관에 귀중한 보석을 더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전도에 대하여 실망하는 것은
우리가 전도는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일개의 금강석을 얻기 위해서는
가령 그것이 팔 크기의 것이라 해도 이것을 얻기 위해서
수년간 일해도 싫어하지 않는 것 아닙니까?
하물며 영구히 빛나는 사람의 영혼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하나를 얻기 위해
일생애를 소비한대도 결코 싫어할 것 없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죽어서 우리들의 재산 및 훈장을 가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죽는 때의 위자로서 또 사후의 유일한 보배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낳은 영혼입니다.
이 재산을 가지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무일물의 빈자입니다.
우리들은 영구한 아들을 낳기 위해 전도를 돕고 이에 종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때가 되면 반드시 우리들의 노동의 결과를 거두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관한 성서의 다른 말씀을 보십시오.
[네 양식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너는 다시 이것을 얻을 것이다](전도서11:1)
[하늘에서 비 내리고 눈 떨어져 또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땅을 적시어 식물을 내게 하고 싹을 내게 하여 심는 자에게 씨를 주고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준다.
이렇듯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기뻐하는 바를 행하고 내가 명하여 보낸 것을 이루리라](이사야55:10-11)
[형제여 참아 주의 오심을 기다리라.
보라 농부 땅의 귀한 소산을 얻기를 바라서 전과 후의 비를 얻기까지
길이 참아 이를 기다린다.
너희도 참으라.
너희의 마음을 굳게 하라.
그것은 주의 오시는 일 가까웠기 때문이다](야고보서5:7-8)
이 밖에도 같은 위로를 주고 있는 성서의 말씀은 많이 있습니다.
[형제여 항상 힘써 주의 일을 하라.
그것은 너희가 주 안에서 그 행하는 바 일이 헛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고린도전서15;58)라는 것은
바울의 이 말에 관한 애절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것과 틀립니다.
문학이라든가 철학이라든가 하는 것은 이에 귀를 기우리는 자는 많습니다만
그러나 일단 이것을 들으면 곧 잊어버립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일단 이것을 귀에 들으면
양날의 칼과 같이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 이것을 제거하려 해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씨앗 같은 것이므로
때가 오면 꼭 돋아납니다.
지금 목전에 곧 나지 않는 것은 아직 때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이것을 들은 사람의 나이가 모자라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혹은 또 그 사람의 일생의 경험이 얕아
이것을 충분히 알기에 이르지 못해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혹은 기타의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이 아직
그 사람 위에 내리지 않아
씨앗 또는 싹을 내어 땅을 가르고 돋아나기에 이르지 않는 것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심은 말씀의 씨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만약 만일 이 세상에 돋아나지 않는대도 다음 세대에 돋아날지 누가 압니까?
심지 않는 씨앗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심은 말씀의 씨앗은 반드시 돋아납니다.
만약 불행이 이것을 받은 자를 영생으로 나아가게 못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그를 심판하시는 때
그에 대하여 그의 죄의 증거로 되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로 비 같은 것입니다.
땅을 적시지 않고서는 다시 하늘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 선수가 쏜 화살 같은 것입니다.
쓸데없는 화살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한 유효물을 맡은 우리들은 그 사용에 대하여 결코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우리들의 수확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있어서 행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창고를 채우는 데는 주의 오시는 날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영생의 수획은 하나님의 재판의 날입니다.
그리고 그날이 결코 멀지 않음은 성서가 분명히 보여주는 바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노후 위해 예비할 뿐 아니라
또 이 주의 두려운 날 위해 예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세 위한 예비]라고 해서 이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인생의 의의가 어디 있는가를 깊이 살펴본다면
그 가공할 주의 재판날(심판 날)
위해 예비해야 할 것을 알 것입니다.
하지만 이 즐거운 수확의 전조는 이것을 이 세상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거둘 화곡의 맛을 미리 앞서
이 세상에 있어서 맛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상은 충분히 내세에 있어서 옵니다마는
그러나 그 일부는 현세에 있어서도 옵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파종사업에 있어서 실망치 않기 위해서
우리들의 종말수확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어서도 우리들의 노동의 결과를 주시어
우리들의 끊어지려는 소망을 회생시켜 줍니다.
세상에 즐거운 일로서 영의 결실을 목격하는 일 같은 것은 없습니다.
혹은 10년,
혹은 20년,
피와 땀을 쏟아 심은 결과로서
한 사람의 진정한 크리스천이 생겨남을 볼 때는
내 영혼은 하늘에라도 올라갈듯 기쁩니다.
한 사람의 동포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인이 그 발견을 재촉하는 기관으로 된 것입니다.
세상의 제왕이 그 신하에게 내리는 영예 중에도 이보다 나은 영예는 없습니다.
세상의 부호가 만금을 던져 얻고자 하는 쾌락도 이 쾌락에 비할 바 못됩니다.
환희의 극,
민족의 극이란
사람을 이 창조주께로 인도한 것을 안 때의 느낌입니다.
이 환희를 얻기 위해서는
10년 몸을 노고해도 결코 아까울 것 없습니다.
이 승천의 쾌락을 맛보기 위해서는
20년에 걸치는 세상의 조롱,
매리,
침방도 결코 슬퍼할 것은 아닙니다.
전도의 보수는 금전으로 되어 오는 것은 극히 근소합니다.
아니 어떤 때는 개무(皆無)입니다.
또 세상의 명예로서 나타나오는 것도 셀 것 못됩니다.
아니 진정한 전도에는 명예는 개무입니다.
세상에 우롱되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교회에까지 배척됩니다.
하지만 전도에는 전도 상응의 보수가 있습니다.
즉 산 영혼의 보수입니다.
만약 인생의 보배 중에 자기가
낳은 자식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하면
육체의 자녀 이상인 보배는
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낳은 영혼의 자녀입니다.
그러한 자녀를 한 사람 가지는 것은
전 세계를 가지는 것에 지나는 부입니다.
전도의 효과는 실로 위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곳에
우리에 의해 태어난 자녀를 감추어 두시어 우리를 놀라게 하십니다.
이 산속,
저 해변에 우리들이 뿌린 씨앗을 날려 보내어
거기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동안에 우리들의 영혼의 자녀를 키워두십니다.
그리고 기회를 얻어
우리들이 그것에 해후한 때
우리들의 환희와 놀라움은
이것을 표현하기에 족한 말은 없습니다.
내 사부여 내 형제여,
내 영의 자녀여 라고.
육체의 부자보다도 훨씬 친한 것은 영혼의 부모와 자녀입니다.
이 쾌락을 한번 맛보고서 전도는 종생 그만 둘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는데 낙심 말라.
그것은 만약 한결같이 하면 우리가 때에 이르러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
이대로 입니다.
이것은 실험의 말 입니다.
우리들은 선행에 지쳐서는 안 됩니다.
특히 전도에 지쳐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 정식으로 받은
전도의 직분을 가졌거나 가지지 못했거나에 관계없습니다.
아니 많은 경우에 있어서는
그러한 무익한 [직]은 가지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누구이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 위해 선을 행하여 그 위대한 보상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내촌감삼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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