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11일 월요일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성령의 열매

: [ 5:22-26]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성령의 열매 - 여기 "열매" 말은 신자의 여러가지 덕행(德行) 성령의 단일하신 역사로 말미암아 여러 방면으로 나타난 것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모든 덕행을 "열매"라고 것은, 그것들이 사람의 노력을 주로 하고 성립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모든 것들은 성령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사랑 - "사랑" 믿음과 함께 있는 사랑인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고전 13:13 말하기를,

"믿음, 소망, 사랑,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였다.

신자의 사랑은 그가 하나님의 속죄의 사랑을 믿는 데서 반영된 사랑이니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원천으로 하고 나온다고 있다.

* (요일 4:10-11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희락 - "희락" 언제나 성령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열매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희락(喜樂) 있나니, 사랑하는 자도 기쁘고 사랑을 받는 자도 기쁜 법이다.

언제든지 남을 미워하는 자의 얼굴에는 수심과 번민과 고통의 그늘이 있지만,
남을 사랑하는 자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속에서부터 솟아난다.

희락의 필요성은 육체의 건강을 위한 의미도 있지만, 보다도 신앙을 건전하게 하려는 것과 하나님께 감사를 많이 하려는 것이다.

희락이 있어야 신앙이 자라나고 감사가 넘친다.

화평 - 이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열매인데,

(1) 서로 사과함으로 이루어지며

( 5:24-26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2) 서로 용서함으로 성립된다.

( 4:2-3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가지 방법으로 화평이 이루어지지만, 그것도 하나님께서 사모하는 (힘쓰는 , 12:14)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 3:17-18 오직 위로부터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참조 : ( 5:9; 9:50)

오래 참음 - 이것은 '따가움을 멀리함'이란 뜻이다.

사람은 대인관계(對人關界) 있어서 혹은 무엇이 마음대로 때에 심령이 따갑게(안타깝게) 되기 쉽다.

이런 때에 이기는 방법은 신앙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림이다.
우리가 인력으로 없는 떼에는 침착하여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좋다.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기다림이 우선 안식의 복이 아닌가!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잡으려고 홍해까지 따라 떼에 모세는 말하기를,

"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14:13)하였고,

모압과 압몬 족속이 무리로 유대에 육박하였을 떼에 여호사밧 왕이 말하기를,

" 전젱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대하 20:17) 하였다.

10:36 말하기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하였고,

6:9에는 말하기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하였다.

자비. - "자비" 남에게 주는 '친절' 의미한다. 그러므로 "친절"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친절은 행실로만 아니라 말로도 나타난다. 우리의 말은 중요하다.

12:18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良藥) 같으니라"하였고,

15:1에는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하였고,

15:4에는,

"온량한 혀는 생명 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하였다.

영시(英詩) 말하기를,

"노여운 한마디가 친절한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부지중에 나온 실언(失言) 앞날을 캄캄하게 만들고,
찌르는 가시를 일평생 남겼도다.

그러나 친절한 마디가 슬펐던 마음에 광명을 주고,
동정의 미디가 영혼을 살려 놓고,
기쁨의 한마디가 캄캄하던 앞길을 광명하게 만든다.

남의 마음을 섭섭케 만드는 것은 네가 발표한 말뿐이 아니다.
네가 말하지 아니하는 때에 많은 마음들이 아픈 상처를 받는다.
네가 말했더면 많은 아픈 마음이 풀어졌으리라.

사림들이 언필칭(言必稱) 공평을 부르짖으며 사람에게 사납게 행한다.
그러나 격분된 말로 () 말할진대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다.

양선. - "양선" 자선 행위를 말하는데 성령께서 주신 것이니 만큼, 질적으로 선하다.

세상에는 자선 사업이나 적선(積善) 말하는 자들도 많고 실행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흔히 질적 선미(善美) 지니지 못한 외부적 행동에 그치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자선이 아니라 생명 없는 사업 혹은 외식(外飾) 불과하다.

진정한 자선은 끝날의 심판 때에 그대로 드러낼지라도 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 되도록 행해지는 것이다.

충성. - 이것은 진실하게 주님의 부탁을 지킴이다.

우리는 구원의 소식을 전함에 있어서 우리 자신이 어떤 새로운 공의(功義) 기증할 필요는 없다.

만일 그럴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루신 구원이 불완전하다는 뜻이 된다.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그러면, 우리의 "충성"이란 것은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구원의 복음을 그대로 전함이다.

충성하는 자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자들이다.


(1) 주님을 두려워하는 약한 .

주님께 충성하는 자는 반드시 영웅적 기질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겁약한 자라도 주님만을 두려워하게 되면 주님께 충성하는 자가 된다.

세상에 속한 충성을 살펴보면, 생래적(生來的)으로 영웅적 기질을 가지고 국가에 충성한 자들이 있다.
예를 들면, 헬쿨라네움(Herculaneum) 함락당할 때에 로마 파수병이 죽기까지 자리를 옮기지 않고 자리에서 임무를 다한 것과 같다.

예를 들면, ()나라의 충신 장흥(張興) 역적(逆賊) 안록산(安祿山) 부하에게 잡혀서도 항복하지 않고 톱에 키워 죽으면서 끝까지 원수를 꾸짖은 등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력을 가지고 썩을 것에게 충성한 것이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은 반드시 호걸이어야 있는 것이 아니다.
이유는 , 호걸은 자기의 잘난 때문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2) 주님 앞에 진실한 .

"충성"으로 번역된 말은 진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중심에 진실함" 주님께서 원하신다.

( 51:6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주님께 사로잡히지 않은 지식인이나 모사는 하나님의 교회에 해를 끼치지만,
무식하여도 주님의 복음을 그대로 진실해 전하는 자는 주님의 일에 유익하다.

사람이 거짓되게 행하기는 어려워도 진실히 행하기는 쉽다.
거짓되게 행하는 자는 계속적으로 거짓을 꾸미며 그렇게 처신하게 된다.
그것은 양심에 괴로움을 주는 어려운 길이다.

그러나 사람이 진실히 행하면 양심이 평안하고 길도 단순하다.


(3) 주님을 위한 의로운 생활(, 사업) 변절하지 않는 .

그는 언제나 한결같으며 유종의 (有終之美) 있다.

누구든지 선미(善美) 길을 가다가 변하면 그는 썩은 뒤에 그들의 존재는 교회에 해가 된다.
그러나 썩기 시작할 때에 서둘러 치료하면 회복할 있다.

그것은 시급히 회개함이다. 회개는 신자의 부패를 막는 유일한 치료제이다.
인류 역사는 부패로 이어져서 보기도 싫은 역사이다.

그러나 니느웨의 회개 역사는 모든 부패를 막아 역사를 미화(美化) 시켰다.
역사는 보기 싫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부패했던 적이 없었던 역사보다 하나님 앞에서 기쁨이 되는 역사이다.

우리는 변절로 인한 허물된 인격이 되지 말아야 한다.
교역자들이 처음에는 하다가 점점 잘못한 () 얼마나 많은가?

혹은 명예심, 혹은 물질에 대한 탐심, 혹은 시기심, 혹은 정욕, 혹은 혈기 등으로 잘못되어 타락하는 경우가 많이 본다.



[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온유와 절제니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온유" 말은 특히 대적에게 복수하지 않고 부드러운 인격으로 이기는 덕을 가리킨다.

위대한 지도자들은 덕을 소유하였다.

모세는 시대에 가장 온유의 근본이시다.

(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멍에는 쉽고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12:17-21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18) 보라 내가 택한 마음에 기뻐하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영을 그에게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크렌머(Cranmer) 대한 후세(後世) 속담은,

"캔터베리의 감독 크렌머와 충돌하여라. 그리하면 네가 영원히 그의 친구가 되리라" 하였다.

중세대의 성자 버나도(Bernard) 눈이 비둘기 같은 온유한 인물이었고,
보나벤츄라를 보면 아담이 범죄하지 않은 같다" 하였다.

오리겐(Origen) 말하기를,

"우리는 남을 위해서 지음이 되었고, 남을 저주하기 위함은 아니라" 하면서 논쟁에 있어서도 온유를 주장하였다.

키프리안(Cyprian) 교회 정치가로서 권위를 존중히 여기면서 온유를 실천하였다.

"절제" '자기 자신을 붙잡음' 의미한다.
이것은 죄를 범하지 못하게 자기를 제재함이다.

바울은 자기를 " 복종하게"한다고 하였는데(고전9:27),

그것이 바울의 자기 제재라고 생각된다.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말씀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율법이 서로 충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 신앙으로 행하는 자의 행실(사랑으로 행하는 모든 행실) 율법을 이루는 것뿐이다.

(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참조 : (13:8-10)

점에 대하여 다음 귀절이 더욱 밝혀준다.



[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박았느니라
- 본절부터 26절까지는

부분(13-23 "육체"대로 범죄하지 말고 사랑을 행하라고 보든 말씀) 대한 결론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속죄하여 그의 소유로 삼으신 백성을 가리킨다.

"육체" 인간의 부패성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모든 죄악의 근원이다.

"" 의지적(意志的)으로 하려고 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죄악의 심리를 가리키고,

"욕심" 따갑게 일어나는 되는 욕구를 말한다.

"십자가에 박았" 함은,

(1)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떼에 그들과 정욕 사이의 관계는 원칙적으로 끊어졌다는 것이고(고후 5:14-17),

(2)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음으로 인하여 그들이 받은 영적 생명은 부단히 정욕과 싸워 정욕이 주장하지는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정욕을 "십자가에 박았" 함은, 그것을 현세에서부터 아주 없애버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현세에 기독신자에게서 정욕이 아주 없어진다는 교리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도 없다.

(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일 1: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

"성령으로 "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님의 역사가 신자들을 중생케 하며,
그들로 하여금 거룩하게 살도록 함을 가리킨다.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성령으로 행할지니." - 여기 "행함"이란 말은 행렬(行列) 지어 서거나 가거나 함을 의미한다.(Greijdanus).

이것은 신자들이 단체의 행렬처럼 성령님의 인도대로 규율 있게 순종함을 가리킨 듯하다.

( 2:12-13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 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

교회생활에 있어서 분쟁은 허영을 구함에서 일어난다.
교회의 단체 생활에서 누구든지 높아지기를 원하면, 그것은 허영심이다.

이유는,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을 언제든지 헛된 까닭이다.

(벧전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천국에서는 낮아지는 것이 실상 높아짐인데,
그와 반대로 높아지기를 원함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바리새인이 아니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서로 격동함" 서로 노엽게 함이고,

"서로 투기함" 남의 잘됨을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방해하는 악독한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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