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구출과 애굽의 심판
출애굽기 7-12장
출애굽기 7장에서 12장까지에 있어서는, 모세와 아론이 애굽 왕 바로 앞에서 행한 10대 이적이 기록되어 있다.
강물을 피로 변하게 하여, 전국에 피가 있게 한 것이 그 하나이다(7:19-참조).
개구리가 올라와서 땅을 덮은 그것은, 그 둘째이다(8:6-참조).
땅의 티끌이 모두 이가 된 것은, 그 셋째이다(8:17-참조).
심한 악질이 생축에게 생겨, 가축 모두 죽은 것은 그 다섯째이다(9:6-참조).
재를 날려 인축에게 독종이 발하게 한 것은, 그 여섯째이다(9:10-).
전국에 미중유의 우박이 내려, 소산물을 해친 것은 그 일곱째이다(9:25-).
동풍이 일어, 메뚜기를 불어 보내고, 그로 인해 땅이 어둡게 될 뿐 아니라, 땅의 푸른 것은 말라죽게 한 것은, 그 여덟째이다(10:15-).
조밀(촘촘하고 빽빽)한 흑암이 삼일 동안 전국을 덮은 것은, 그 아홉째이다(10:22).
그런데 이런 재난이 계속 잇달아 임하는데도, 바로는 마음을 강퍅히 하여,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므로, 최후에 나라 안의 장자 모두가 친 바 되고, 애굽 온 땅에 큰 곡성이 일어난 것은, 즉 그 열째이다(12:30-).
이런 이적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역사이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므로, 보통 천연의 법칙으로서 다루어서는 안 될 것임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그 어느 것이나 애굽에 있을 수 있는 종류의 사건으로써 전연 절무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첫째로, 전국의 물이 붉게 되었다고 한다.
애굽은 사막 사이에 가로놓인 띠 같은 토지로써 여기를 흐르는 강은 다만 한, 나일(Nile)있을 뿐이다.
나라 안의 음용수도, 관개용수도, 모두 이 강물이 붉어진다면, 전국의 물도, 또한 피처럼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지방에 있어서, 강물이 붉은 빛을 나타내 보이는 원인을 상상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다.
저 홍해같은 것은 때때로, 일종의 작은 벌레가 떼 지어 모여들어, 여러 곳에 진홍의 집단을 나타내 보이며, 이 때문에 해수를 붉게 물들임으로 말미암아, 그 이름(즉 홍해라는 이름)이 있는 것이다.
그처럼 나일 강에도, 또한 어떤 하등 동물이 발생하여, 유사한 현상을 내는 일이 있었으리라.
둘째 이하의 개구리라든가, 이, 파리 및 메뚜기의 내습, 수역의 창궐, 또는 우박도 이를 상상할 수 있고, 재의 날림 같은 것도 모름지기 사막에서 불어오는 가는 모래 섞인 먼지 같은 것이었으리라.
맨 끝의 장자에 관한 것만은, 특별한 사건이지만도, 기타의 아홉 가지의 이적은 어느 것이건 애굽에서 있을 수 있는 현상이다.
다만 현저하게 그 도수가 세차지고, 또 잇달아 임했기 때문에 이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적을 이렇게 해석함은, 결코 하나님의 능력을 감소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적이 행해진 참된 이유를 알기 위해 무요한 곤란을 제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들 이적이 행해진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하심에 있어서, 다른 길이 있었을 수 있지 않은가?
이 문제에 대답하기 전에, 우리들은 먼저 당시의 사정을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애굽은 당시의 최대 강국이었다.
그 나라는 부했고, 그 백성은 번영했다. 그 동안에 있어서 사역된 근근 수십만의 이스라엘은, 실로 약하고, 비천한 국민이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몸소 바로 앞에 나아가,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우리들이 우러러 모시는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게끔 하라’고 했던 것이다.
만약 일본 국 지배하에 있는 소수의 대만 토번이 갑자기 그런 태도를 취했다면, 어떠했을까?
일은 실로 무모하기 그지없을 뿐이다.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일일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마침내 구출되어 가나안에 이르고, 더욱 더 발달하여, 오늘에 미쳤다. 유대인의 오늘이 있는 그것 자체가 근본에 있어서 이미 대 이적이다.
그렇다면, 즉 당초 애굽 땅을 떠나던 때에, 어떤 이적이 행해졌다는 것은, 가장 합당한 일이 아닌가?
그리고 이들 이적을 행한 것은, 물론 모세는 아니었다. 일은 모세 대 바로가 아니고, 여호와 대 바로였다.
하나님께서 바로와 싸우신 것이다. 모세가 위대하다지만, 이스라엘의 구출은 도저히 그의 힘에 닿는 일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명령에 따른 것뿐이었다.
여호와, 그에게 명하신다.
‘너는 바로에게 가서 말하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다…’
즉, 모세는 가서, 그대로 바로에게 전했다.
여호와께서는 또 명하여 말씀하셨다.
‘네 지팡이를 들라’
즉, 모세는 그 지팡이를 들었다.
그가 한 일이란, 불과 일거수일투족의 수고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기에 대신 양과 용기가 있었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하찮은 자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거만한 강대국의 제왕 앞에 나아가, 멸시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멸시받는 백성을 위해 말함은, 실로 지난한 일이었다.
그도 일의 성공을 예기할 수 없었다. 나 같은 것을 가지고서는 아무리해도 안 된다고. 이렇게 생각하여, 그는 어디까지나 고사하고 수락치 않으려 했다.
그렇지만 여호와는 그가 믿는 하나님이었다. 이스라엘은 그의 사랑하는 백성이었다. 그래서 그 여호와께서 명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송영되기 위해, 자기 백성이 구원되기 위해, 모세는 그저 주저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드디어 신앙에 의해 일어섰다. 그는 대담하게 바로 앞에 나갔다. 그리고 가장 충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명하시는 대로 행하였다.
그리고 보라. 경이 할 바 이적은 잇달아 행해지고, 가망도 없던 대사업은 마침내 성취된 것이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자랑할 바 없는 자이다.
우리들은 약하고, 하찮고, 부정해진 자이다.
그렇지만 우리들에게도,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지워진 의무가 있다. 우리들은 주위에도 반드시 각각 애굽과 바로와 이스라엘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그 구출을 명하시는 것이다. 일은 지난하여, 도저히 우리들의 힘으로 될 바가 아니다.
‘아무리 해도 무용이다. 내 아버지에게 복음을 말해도, 아무리 해도 무용이다. 내 아내에게 회개를 촉구해도, 아무리 해도 무용이다. 내 은인, 내 지기(무 intimate friend), 그들은 아무리 해도 무용이다’라고.
이렇듯 절망하여 우리들은 거의 지혜 있는 침묵을 지키려고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뭐라고 명하시는가?
가서 복음을 만인에게 전파하라고. 이는 예수의 가르치심이 아닌가?
그들(희망 없이 생각되는 자들)도, 역시 하나님의 자녀이다. 우리들이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그들(무희망인)의 영혼을 사랑한다면, 어찌 단연히 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가!
모세는 꺼리는 일없이 바로 앞에 나선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의 명하심 따라, 주저하는 일없이 입을 열어야 할 것 아닌가?
우리들의 힘은 본래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누가 알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신앙에 의해 이적을 행하심을. 먼저 용기로써 이를 실행하는 일없이 헛되이 이적의 능부를 논함은 어리석음도 이만저만 심한 일이 아니다.
이적은 학리의 문제는 아니다.
신앙의 문제이다. 이적의 일이 정해지고서, 신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이 먼저 생기고, 이적이 이에 따르는 것이다.
신앙 없이 이적은 없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심에 있어서, 우리들이 신앙에 의해 용기로써 하나님의 명에 복종하는 때, 이적은 과연 행해지지 않을 것인가?
말을 그치라. 내 힘(능력)으로서는 아무리해도 가능하지 못하다고. 하나님께서 이것을 행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신앙과 용기로써 완고한 노인의 마음을 애통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 입에서 나오는 간단한 말로써, 골육동포를 회개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다만 주저하며(겁내며) 이것을 행하지 않는 까닭에 일은 언제까지도 성취되지 않는다.
이적이 행해질 기회는 많지 만도, 신앙과 용기를 결여하고 있는 때문에 이를 놓치는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지명한 목사 중에 여러 해 동안 오꾸마 백 저(邸)에 출입하면서 백으로부터 적지 않게 원조를 받은 이가 있다.
나는 어느 때, 그에게 물었다.
‘자네는 일찍이 (오꾸마) 백에게 죄의 회개를 촉구한 일이 있는가?’고. 그런데 그는 대답하여 말했다.
‘아니, 그것은 아무리해도 쓸데없어!’라고.
과연 그도 또한 불친절한 목사였다. 자기를 돕는 자의 영혼을 사랑할 줄을 모르는 것이다.
일찍이 켄터키(Kentucky 미국 중동부의 주)의 어느 지사가 이름도 없는 무명의 메도디스트 교회의 한 목사에게서 회개를 권고 받고, 처음에는 아주 노했지만도, 마침내 성실한 신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후에 그 지사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말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정계에 있으면서, 여러 목사를 만나, 그들의 사업을 도왔지만, 이때까지 한 사람도, 참으로 내 영혼에 대하여 걱정해 준 이가 없었다’고.
만약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대담하게 그 명령에 복종하는 자 있을 것인가?
(그럴진대) 한 개의 지팡이를 드는 것뿐으로도, 큰 이적은 행해지는 것이다.
그런 일이 없음은 이를 실행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번 대 전쟁(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 어떻게 하면 올 것인가?
만약 신앙과 사랑으로 충만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양군 사이에 서서,
‘너희 검을 거두라’고 외치는 자 있으면, 어찌 알랴, 이 참극도 오늘 혹은 종국을 고할지를.
다만 자기만을 돌아볼 때, 사람은 비겁해져 나아가지 못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간단하게 이를 전할 때, 하나님은 모름지기 큰 이적을 행하시리라.
모세의 일거수로 강대국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발흥이 동시에 이룩되었다.
‘너희도 가서 그대로 하라’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이다.
우리들의 바로는 가까이 우리들의 주위에 있다.
우리들의 집안에 있다.
적당한 기회에 기도로써 그들 앞에 나아가,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들을 인도하시리라.
성서는 우리에게 명백히 그것을 증거 하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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