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13일 목요일

유월절의 기원


유월절의 기원

출애굽기 11-12

유월절 무교절에 대해서는, 신약성서 중에도, 이를 기록한 데가 많다.

마태복음 26 17,
마가복음 14 12,
누가복음 22 7,
요한복음 2 13,
11 55 등은 주요한 것인데,

특히 주의해야 것은,

고린도전서 5 7, 8절이다.

그리고 깊은 의미를 탐구하는 것은, 신약성서 가장 중요한 가르치심을 아는 일이다.

구약성서는 대체로, 문자도 꾸밈새 없이 거친 편이고, 미적(美的) 아니지만도, 인심의 깊은 실험이 안에 담겨져 있다. 특히 그중에서도 유월절, 무교절 , 기원을 알아, 이를 우리들의 복음 상에 있어서 응용하는 때는, 영구한 진리로서, 한없이 우리의 위로가 되는 것이다.

유월이란, 남의 문전을 통과하는 일이다. ,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려는 , 아빕월 우리 구력 3월의 10일에, 집마다 마리의 어린양을 잡아 (만약 가족수가 20 못되는 때는 이웃집과 함께한다) 14 저녁에 회중 모두 이를 도살하고, 피를 취하여, 집문 출입구의 기둥과 상인방( 위에 가로지른 것을 상인방, 아래의 것을 하인방) 발라 두었는데,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애굽을 돌아다니며, 위로는 왕자인 바로에서, 아래는 맷돌질하는 미천한 자에게 이르기까지, 맏아들 자를 모두 죽였지만,

다만 이스라엘의 집만은, 출입구에 발라둔 어린양의 피가 표적이 되어, 사자는 집을 통과하여, 재앙을 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출애굽기 11, 12 사이에 번이나 거듭 기록되어 있다.

먼저 모세가 이를 바로에 대해 경고의 말로서 기록하고
다음 실행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을 시켜) 이스라엘 회중에게
그리고 특히 모세로 하여금 이를 장로를 시켜 이스라엘 회중에게 전하게 것이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어린양의 피가 표적이 되어, 아래 피한 이스라엘 백성만이 멸망에서 구원되었다고 하는 내용이다.

이는 살벌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다. 마치 프랑스혁명 감옥에 매인 자들 중에서 쵸크(Chalk) 방문에 표적 자가 모두 이튿날 단두대(guilotine) 올랐다는 이야기와 같아, 아무런 특별한 의미도 없는 듯이 보인다. 유대인 자신도, 참된 의미를 모르고서 절기를 지키는 자가 많은 것이다.

그렇지만 유월절의 깊은 진리는 그리스도에 의해 명백해졌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가르치심의 설명으로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도 몸소 말씀하신 것인데, 특히 이를 역설한 것은, 사도 바울이다.

우리들이 구원되는 것은 ,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신자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바이다. 설명은 무엇이라 붙인대도, 그것은, 이를 버릴 수가 없다.

혹은 이는 유대사상이지, 우리들의 사상은 아니라고 하면 있지 만도, 어쨌든 신약성서 중의 가장 중요한 교리로써 오늘날까지 오랫동안 우리들이 지켜온 바의 것이다.

자신도 처음에 이것을 무엔가 철학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시도한 일도 있었다.

피는 생명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들에게 옮겨지는 것이라고 말한 일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이 가고, 신앙이 자람에 따라 점점 깊이 느끼는 것은, 단순히 그런 설명만으로는 부족한데가 있다는 것이다.

피는 생명이라는 것은, 설명의 일부리라. 그러나 전부는 아니다. 온전한 의미는 지금은 알지 못한다.

그렇다. 의미는 모르지만도, 나는 다만 이를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구원하심을 믿고, 그리하여 깊은 진리가 모두 명료하게 명시되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우리들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김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 뿐만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최후에 사람 모두 그리스도 앞에 서서 심판을 받고 면양과 산양으로 나눠지는 날이 오는 때에, 어떤 사람이 구원되는 가를 가르쳐 주는 일이다.

그때 의인은 구원되고, 죄인이 멸망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구별의 표준은 어디에 있는가? 도덕인가 인격인가, 혹은 선행인가?

만약 도덕 문제에 의한다면, 애굽사람 수천만 중에 선한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을 역사에서 찾아보더라도 분명하다.

이스라엘의 회중 가운데는 , 아주 열등한 사람도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룻밤 여호와의 사자가 애굽 전역을 돌아다닌 , 이스라엘은 모두 구원되고, 애굽은 모두 친바 되었던 것이다.

이유는 어디에 있었던가? 오로지 어린양의 피를 문에 바르고, 아래 피했기(숨은)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심은, 이것이다.

도덕에 의하지 않고, 품성에 의하지 않고, 공적에 의하지 않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아래 피하느냐(감추인바 되느냐) 아니냐에 의해 심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이끌려 나가는 , 나의 얼마의 사업이라든가, 선행을 내어놓는대도, 내가 구원될 아무런 이유로도 되지 못한다.

그때, 나는 다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의 피로 말미암아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외에 다른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의 피만이 나의 은신처(피난처)이시다. 그리스도의 아래 은신하여 나는 비로소 의로운 심판을 받는데 견디어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나의 구원의 소망은 없는 것이다.

나를 구원하시는 것은, 그의 뿐이다. 이것을 떠나서, 나의 구원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하늘의 형벌이 전국에 임하는 , 이스라엘 사람만은 문에 피를 발라, 이로 인하여, 재난이 집에는 오지 않을 것을 믿고, 안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이 구원의 이유가 아니었더라면, 얼마나 커다란 공포가 그들을 괴롭혔던 것이랴!

그러나 구원의 이유는 인격이 아니고, 행위가 아니라, 다만 어린양의 피였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 깊은 평화는 상실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들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자기의 공적에 의해서는 아니다. 오로지 피로서이다.

그리스도의 귀하신 (보혈)로서이다. 피가 우리들의 출입문의 기둥과 인방( 아래위로 가로 지은 나무) 칠해져 있음을 생각하여 무엇이 온대도 문제없다는 최후의 안심이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아직도 불안이 시작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전율하지 않으면 죄의 두려움(공포) 자각한 자에게 있어서는 이것 외에, 소망을 데가 없는 것이다.
생각컨대, 사람의 사상으로서, 이것만큼 깊은 것은 없는 것이다. 너무나도 깊은 까닭에, 이를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희생의 관념은, 실로 인류의 가장 통절한 요구에 기초하는 것이다. 세계 어떤 교의에 있어서도 이것을 보지 못한다.

무엔가 어떤 것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구원된다는 사상은, 인심 깊은 곳에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다만 지나치게 심오한 까닭에, 얕은 두뇌로서는, 불과 소부분 접촉할 있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설명은 곤란하다. 그러나 이는 신앙상의 사실이다. 이것을 믿는 , 한없는 위자가 우리들에게 임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머지않아, 두려워할 그날에 직면하지 않으면 된다. 머지않아, 죽음의 방문을 받지 않으면 된다.

그때, 우리들을 위로하는 것은 도덕도 아니다. 품성도 아니다. 선행도 아니다.

그때, 우리들은 이러 이러한 사업을 했다든가, 혹은 깨끗한 행위를 계속했다든가, 혹은 좋은 품성을 가졌다든가, 사람을 구원했다든가, 친절을 다했다든가등등,

여러 가지 좋은 것을 늘어놓아 본댔자,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그리스도에 의해 양심을 날카롭게 함을 입은 자에게 있어서는 과거를 돌아보고서 자기의 공적 위에 안심을 구하려 대도, 전연 불가능이다.

크롬웰(Cromwell. Oliver) 같은 위인도, 최후에는 대성을 발하여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손에 빠지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라고 외쳤던 것이다.

실로 이제 죽게 때에는, 생각할 힘마저 없는 것이다. 그때, 오로지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모든 안심이 얻어지는 것이다.

그렇다, 나의 죽음의 자리의 평화이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에 서는 때의 나의 변증이다.

나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중에 얼마만큼 깊은 진리가 있는가, 이는 도저히 천박한 인간의 지혜로서는 측량해 수는 없다.

다만 신자는 성령의 인도 따라, 경험과 연구가 진보됨을 따라, 언젠가 귀함을 완전히 때가 오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 이것을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이를 전하여, 이로써 깊은 인상이 제군의 마음에 새겨지기를 바랄 뿐이다. (내촌감삼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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