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의 강퍅
출애굽기 6장-12장
하나님은 모세로써 바로에게 명하고, 바로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을 석방하게 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바로는, 완악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말씀으로서 명하셨다. 그렇지만 바로는 단연히 이에 따르지 않았다.
이렇게 되어 하나님은 그의 능력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으시는 데 이르렀다.
하나님은 쉽사리 이적을 행하지 않으신다. 도리와 말씀으로서 안 되는 때, 부득이 이것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바로와 같은 완악한 자라 할지라도, 처음부터 이적으로써, 이를 억누르시지 않는다.
또 이적으로써 임하신다 하더라도, 우선 경한 것을 가지고 시험하시고, 그 믿지 않음을 보고서 서서히 무게를 더하신다.
먼저 모세로 하여금 지팡이를 가지고서, 이를 바로 앞에 던져 뱀이 되게 하여 이로써 저 모세에게 이능이 있음을 보이게끔 하셨지만, 바로와 그 신하는 이것을 깨달아 알지 못하고, 더욱 그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여, 모세와 아론의 말을 물리쳤다.
그 후 나일 강의 물을 피가 되게 하여, 그들을 각성케 하려 하셨지만, 이것 또한 주효를 보지 못했다.
다음으로 개구리를 불러내고,
다음으로 이를 들끓게 하고,
다음으로 파리 떼를 보내고,
다음으로 수역(생축으로 악질)을 앓게끔 하고,
다음으로 우박을 내리고,
다음으로 메뚜기를 보내어, 바로의 강퍅을 꺾으려 하셨지만,
바로는 그대로 아직 그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이에, 최후의 대 재난은 바로와 애굽국에 임했다.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지라(11:5-)’라는 명령이 내렸다.
이리하여 이 재난은 전국에 미치고, 바로는 드디어 여호와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기에 이르렀다.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서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12:31-)’라고 바로는 또 두 사람에게 간청하여 말했다.
‘(너희는)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12:32-)’
나라에 몇 번이나, 재난이 임했지만도, 그 마음을 고치지 않던 바로는 자기 장자를 뺏기게 되자, 마침내 하나님의 명을 따르려 했다.
강국의 대왕도 역시 사람이다. 자기 아들을 건지기 위해서는, 백성에게 자유를 주기도 하고, 또 사람에게 기도를 의뢰도 한다.
‘너희는 또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나를 위하여 축복하라)고.
가석하다. 지금 비는 것은, 모세와 아론이 아니다. 대왕이다. 대왕은 이제야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애걸한 것이다.
여기서는 기적론을 말할 곳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바로 앞에서 이적을 행하게 하셨다는 것은 성서의 여기서 분명히 기록해 보여 주고 있는 바이다. 이것을 믿거나, 의심하는 것은, 사람들의 자유이다.
그렇지만 한 두 가지, 우리들이 여기서 주의해야 할 일이 있다. 그 하나는, 여기 기록된 이적이 애굽적이라는 사실이다.
즉, 애굽국에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지팡이를 뱀이 되게 했다는 당시의 흔했던 비술을 제외하고,
나일 강의 물이 피처럼 붉게 되었다는 일,
개구리가 전국에 발호했던 일,
이(벼룩), 파리(말파리), 메뚜기의 발생했던 일 등은,
애굽국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천연적 현상인 것으로, 그것이 속속 잇달아서 격렬하게 여기에 임한 것은, 하나님의 이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지 만도, 그것이 애굽에 아무 관계도 없는 현상이 아닌 것, 즉 관계있는 현상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하나님은 즉 이때, 애굽국 특유의 재해로써 그 왕과 백성에게 임하셨던 것이다.
만약 천재(天災)에 도덕적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모든 나라에 임하는 천재는 역시 그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와의 각성을 재촉하기 위한 하나님의 경계이시다.
이탈리아의 진재(폼페이 재화)도, 인도의 기근도, 또한 이 의미에 있어서 해석할 수가 있다.
특히 애굽에 한하여, 이때 이 재해가 임한 것은 아니다. 이와 비슷한 재해는 수없이 거듭 다른 나라에도 임하고, 또 지금도 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주의할 바, 제 이의 점은 자유 획득의 곤란이라는 것이다.
백성의 자유는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치자는 피치자에게 쉽사리 자유를 주지 않는다. 지사의 권고도 듣지 않으며, 식자의 명시를 보고도 믿지 않고, 드디어 재해가 뒤꿈치를 따라 자기에 임해 오는 때, 하는 수 없이 백성을 석방하는 것이다.
그리고 위정자가 그런 것이다. 악마(사단) 역시 그런 것이다. 그는 쉽사리 죄의 포박(a knot)을 풀지 않는다. 그는 쉽사리 영혼에 자유를 주지 않는다. 그의 속박에는 벗어나는 것은, 지난(至難)한 일이다.
그리고 바로는 악마를 대표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한다.
출애굽기는 역사적 사실로서 하는 심령 석방, 자유획득의 기사이다. 하나님의 인내에 대한, 악마의 강퍅을 보여 주는 기록이다.
이적을 이적만으로 볼 때 이것을 해득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이적을 사람을 구하는 수단으로 볼 때, 그 해석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적은 과학적으로 해석할 바의 것은 아니다. 도덕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해석하려 할 때, 그 과학적 해석은 용이해지는 것이다.
우주만물은, 본래 사람은 얽매기 위한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 쓰이기 위한 것이다.
그를 기르고, 그를 가르치며, 그를 자유와 영광으로 인도하기 위한 기계, 또는 수단이다. 그리고 이제 여기서 이스라엘로써 자유는 비로소 인류에게 주어지려 한 것이다. 일은 매우 하찮은 듯 보이면서도, 실은 매우 큰 것이다. 자유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애굽의 압제국에서 인류 중에 생성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인류적 이유가, 이 사건에 있음을 알 때, 하나님께서 그 성수(聖手)로써 특별히 이 일에 관여(관계)하신 것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소민족의 구원이 아니다. 전 인류의 구원이다.
하나님은 소위 ‘고센의 땅’(‘에다무라’, 현세의 속칭, 이 세계의 속칭, 또는 불교에서 쓰는 피안세계, 때로는 더러워진 땅)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여기서 이적으로써, 인사에 관여하신 것은 아니다.
여기서 자유의 근원(the origin)을 열어, 세상 끝 날에 이르기까지, 전 인류에게 자유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여기서 이 이적을 행하신 것이다. 목적의 원대함을 알고서, 수단의 이상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출애굽기는 유대 역사의 한 부분은 아니다. 인류 역사의 요부이다. 이에 이적이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인류는 이렇게 해서, 이 최초의 자유를 얻은 것이다. (내촌감삼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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