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15일 토요일

내촌의 '세칙의 의의'


세칙의 의의

출애굽기 12-13

유월절의 어린양은 없는 수컷, 가장 거룩한 것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것을 잡은 , 고기는 모두 이것을 먹지 않으면 된다. 이를 먹는데 있어서도 여러 가지, 특별한 방법으로써 해야 것이 교시되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주 기이한 습관이다. 실행하는 이스라엘 사람 자신, 의의를 아는 자는 아마도 얼마 되지 않으리라.

그렇지만, 이를 크리스천의 입장에서 보는 때는, 중에 또한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아는 것이다.

가장 좋은 주해는 요한복음 6 53 이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살은 참된 양식이요 피는 참된 음료로다

실로 성서 가장 좋은 주해는 언제나 성서 그것이다. 유월절의 어린양의 고기를 먹는 것은 이에 의해 어린양의 생명을 우리의 것으로 하기 위해서이다.

어린양의 고기를 먹지 않으면, 영생은 우리에게 임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먹는데 있어서 머리와 정강이() 내장을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남는 것은 소화하라 했다.

희생 제물의 사체의 어느 부분을 가릴 없이, 전부 이것을 먹으라고 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머리와 발과 내장을 버려서는 된다는 것인가?
어찌하여 구미에 맞지 않는 부분까지도 모두 먹지 않으면 되는 것인가?

필경,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자기의 것으로 삼지 않으면, 영생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예수를 먹는다고 하면서도 머리만을 먹고, 다른 것을 돌아다보지도 않는 자가 있다.

예수께로부터 지혜만을 받고,
감정의 소재인 내장이라든가,
실행의 표인 (정강이) 버리는 것이다.

혹은 예수의 말씀 중에서 도덕의 가르치심만을 받고
혹은 그의 행위만을 받고,
혹은 그의 행위만을 모방하는 같은 ,

모두 그를 모두 먹지 않는 자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명하시는 것이다.

어린양의 머리와 (정강이) 내장을 모두 먹으라.

예수의 사상과 정의와 행위를 모두 먹지 않으면 된다고, 머리라 하고, 발이라 하고, 내장이라고 한다.

말은 시적이 아니다. 산문으로서도 매우 조잡한 것이다. 구약성서에 그러한 문자가 적지 않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구약성서를 평하여
샘불즈(Shambles, 도살장; 고깃간) 종교이다라고 한다.

소나 양이나, 돼지 등이 피투성이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그렇게 보이지 않는 아니다. 그러나 일단 이를 자기의 영적 체험에 비추어 생각하는 때는, 그것이 가장 깊은 진리를 표백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갖추어주신 어린양 전부를 먹고, 인자의 살과 피를 남김없이 섭취함으로써, 비로소 영생이 자기에게 임하는 것이라고 해득하는 , 소위 푸줏간의 종교 훌륭한 1편의 시로 되는 것이다.

날로나 물에 삶아서는 먹지 말고 불에 구워 먹으라 했다. 역시 푸줏간의 종교이다.

그리고 가장 깊은 가르치심이다.

우리들의 영혼의 양식이 그리스도는 소위 천명을 다하고서, 심상의 죽음을 취하신 그리스도는 아니시다. 불사른바 되신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들의 위해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자기를 직면하게 하신 그리스도가 아니어서는 된다.

몸소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지우실 벌을 모두 자기 몸에 인수하신 그리스도가 아니어서는 된다.

어린양을 불에 구워 먹고, 비로소 귀한 맛이 생긴다. 그처럼,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사른바 그리스도를 받아 비로소 그의 귀한 생명이 우리들에게 임하는 것이다.

유니테리안의 잘못(오류) 이것을 인정하지 않음에 있다. 그들은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이다. 어떻게 죽으셨는가가 큰일이 아니다. 어떻게 하여 사셨는가, 그것이 가장 중대한 문제라고,

그러나 십자가를 떠나서 그리스도를 해석하려 대도 불가능한 것이다. 그가 우리들의 구주이신 까닭은 십자가상의 죽으심에 있는 것이다.
기타,
어째서 나물과 아울러 먹어야 하는가
어째서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 하는가?

나물을 아울러 먹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실험과 함께 이것을 먹음의 뜻이다. 그리스도를 받아서 가장 좋고 귀한 맛을 아는 것은, 우리들 자신 간난 중에 있는 때이다.

허리를 졸라매고, 신을 신고, 지팡이 잡는 것은, 세상의 여로로 보고, 우리는 나그네 또는 우거 하는 임의 뜻이다. 언제까지 여기 앉아서, 세상을 즐기려 하는 그리스도의 맛은 없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이들의 실험에 비추어 때는, 성서의 편언(片言) 척구(隻句) 모두 깊은 의미를 발휘해 오는 것이다.

사람들 중에, 이것을 가리켜, 억지로 말을 끌어다 조리에 맞추는 식의 견강부회(牽强附會)라고 하리라.

그러나 옛날의 말과 우리들의 체험은 너무나도 부합하는 것이다. 말들을 옮겨, 그대로 말에 해당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 있는 자에게 있어서는 이것을 그렇게 해석하여, 이의 없을 아니라, 여기서 다함없는 위로를 발견하는 것이다.

다음에 주의할 바는 유월절에서 무교절까지의 순서이다.

먼저 어린양을 취하여, 다음에 고기를 먹고, 그런 무교절을 지키는 것이다.

순서는 우연한 같으면서도, 우연은 아니다. 순서는 구신약 전체를 통하여 변함이 없다.

우리들의 구원은 먼저 하나님의 어린양의 희생으로써 시작하는 것이다. 기타의 것은, 모두 후이다.

보통 교회 등에 있어서 말하는 바는 반대이다. 그들은 말한다.

먼저 마음의 부정을 모두다 씻어버리도록 하라. 그리하면 구원되리라.
먼저 실내를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임하시리라.

그리고 우리들은 이것을 경험에 의해 안다.
 한편을 소제하면, 다른 한편은 더러워져, 도저히 이것을 깨끗이 없다는 것을, 무교절을 먼저 실행하려 해도, 결국 이것을 실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잡힌바 되어, (보혈) 의해, 우리들의 죄는 속량되고, 그런 후에 비로소 거룩(성결; 깨끗)해지는 것이다. 속량은 먼저이고, 성결은 후이다. 우리들(모두가) 오랫동안 하나님께 반역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위해 독생자를 주시어, 피를 흘리시게 하신 것이다. 먼저 은혜에 참여하여 신앙으로써 그리스도를 나의 것으로 , 비로소 심중에서 죄를 배제할 있는 것이다.

구원은, 내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된다. 이는 엄격한 도덕의 정반대이다. 먼저 속량되고, 그런 후에 성결(거룩함) 오는 것이다. 무교절은 후이다. 유월절은 먼저이다.
실로 우리의 구원되는 , 그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시다.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으면, 구원은 불가능이다.

이스라엘인이 애굽을 나와서 도리어 가나안 땅에 이른 여행기는 이것을 가장 명백하게 가르쳐주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12:37-)

도보(보행) 남자가 60만이라고 하면, 노약 부녀를 합쳐, 거의 200만이나 되었으리라. 그리고 다수의 사람이 거쳐 통로는 어디였든가? 에담에서 블레셋 사람이 거한 가나안 땅에 이르는 데는, 해안을 누비며 전진하며, 200마일 여에 지나지 않는다. 2개월을 소비하면, 얼마든지 도달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13:17-18)라는 것이다.

블레셋 사람과 싸워 패하면, 기가 죽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는 마음 가질 것을 생각하여, 하나님은 멀리 홍해의 광야(황야) 돌게 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광야에서 유랑하기 40, 겨우 가나안에 달할 수가 있었다.

백성은 200만이다.
때는 40년이다. 그리고
곳은 광야이다.

시험 삼아 생각해 보시라. 누가 우리 도쿄시민 200만을 인솔해 가지고서, 40 동안 사막을 다녔다고 하면 어떠했을 것인가? 이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 자신이 이적이다.

그러므로 학자는, 60만의 수를 있는 깎아내리려 하고, 혹은 여행의 거리를 단축하려 든다. 혹은 홍해라는 것은, 지금의 수에즈운하(Wuez-애굽 동북부에 있고,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 뚫린 지형의 남부에 해당되는 홍해의 극히 좁은 부분이라 하고, 혹은 지중해안의 세르보니스 호수(Serbonis Lake-애굽의 호수로 지금은 마른 호수) 그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단축 경감하여 생각하려 대도, 일은 이적 아니랄 수는 없다. 그것을 학리에 비추어 해석할 아니다.

다만 이를 신앙에 비추어 비로소 깊은 의미와 강한 힘을 감득 수가 있는 것이다. 출애굽은 역사상의 사실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신앙상의 실험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출현은, 예수의 출생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다. 멀리 이스라엘인의 출애굽 시에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말한다.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호세아11:1-)출애굽은 실로 그리스도교의 남상(濫賞)이다.

(내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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