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일 수요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천국 생활의 규칙

 

성 경: [6:27-32]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30)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6: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그러나(알라) - 원래 '알라'는 반대의 뜻을 나타내는 접속사로 쓰이나 여기서는 앞에서 나온 주제와 병행하는 다른 주제를 소개하는 연결사로 쓰인다.

 

본절로 부터 36절까지는 '원수에 대한 사랑'을 교훈하신 내용이다.

5:21-48에는 주님의 가르침 다섯 가지가 연속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비하여

누가는 그 가운데서 한 가지(5:43-48)를 택하여 이를 보다 확대시켜 상세히 기록하였다.

 

(5:43-48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누가는 구약의 구체적 계명을 꼬집어 말하면서 예수의 교훈과 대조시키지는 않는다.

 

* 비교 : (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단지 그는 적극적인 사랑의 계명을 직접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마태는 황금률(黃金律)을 의도적으로 뒤쪽으로

옮겨 앞의 교훈들에 대한 결론적 요약의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으나,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누가는 자연스럽게 문맥을 따라 그것을 언급하는 방식을 취한다.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 어떤 사람의 인격이나 재산, 지위 등에 상관없이 그에게 참된 관심을 나타내고 먼저 사랑을 보이라는 말씀이다.

 

이는 예수님의 교훈 중에 극치를 나타내는 것이요 기독교의 가장 큰 교훈이다.

예수께서는 이를 몸소 실천하심으로써 본을 보여 주셨다.

 

(23:24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이 구절 하반부에서부터 30절까지는 사랑의 행위가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12:14-21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평행 분문인 마 5:43-48은 율법의 완성자인 예수의 차원 높은 새 계명들이 열거되는(5:21) 가운데 한 부분으로 등장한다.

 

(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반면에 본문에는 앞뒤의 연결이 다소 어색하지만,

앞의 내용이 완악한 유대교인들 특히 유대교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음에 비추어

본문은 독선적 정죄에 급급하였던 당시의 폐단을 염두에 두고 이해됨이 자연스럽다.

 

 

[6: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저주하는 것을 금하시며 오직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사면해 주는 권한만을 부여하셨다.

 

(20: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저주하다'는 뜻의 헬라어 '카타라오마이'는 전치사 '카타''소원', '간구'라는 뜻의 '아라'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는 무엇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종교적 의미를 내포하며 초자연적인 힘의 작용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자 하는 의도에서 행해진 말들을 가리킨다.

 

한편, 이 불가능해 보이는 숭고한 말씀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이다"하고 원수들을 용서하신 십자가상의 외침에서 문자 그대로 실천되었으며(23:34),

 

스데반의 순교시에도 생생히 증거되고 있다.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실 예수께서 죄있는 인간 세상에 성육신하신 것 자체가 바로 원수 사랑이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이 놀라운 교훈을 인간의 합리적이고 산술적인 계산의 안목에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예수와 우리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억만 죄악으로 말미암아 영벌에 처해질 인생이 예수의 대속으로 용서함 받아 영생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성도는 도저히 갚을 길 없는 큰 사랑의 빚을 예수께 지고 있는 셈이다.

이 사실을 확신한다면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원수 사랑의 도()까지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6:29]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 ''에 해당하는 헬라어 '시아곤'은 턱이나 턱뼈를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단순한 모욕의 행동뿐 아니라 폭력적인 행위까지 포함된다.

모욕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을 단순히 참아 넘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의 행위로 덮어 줄 수 있는 차원 높은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작은 폭력은 그보다 더 큰 폭력을 부르며 그때까지 참아 왔던 모든 일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에 수반되는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일 수밖에 없다.

한편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사랑의 행위를 강조한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컨대, 우리가 핍박에 직면하였을 때 가급적이면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지 자청하여 핍박의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던질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18:22-23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23:3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 22:26과 신 24:13은 다른 사람의 겉옷을 전당잡거나 압류한다면 그날 해가 지기 전에 돌려보내도록 말씀하고 있다.

 

왜냐하면 밤과 낮의 일교차가 심한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겉옷이 생필품으로서 밤에는 덮고 자는 이불의 역할을 하고 먼지가 많이 이는 낮에는 겉옷으로 걸치고 다녔기 때문이다.

 

따라서 겉옷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추위 속에서의 굉장한 고통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가난한 사람들은 때로 중요하게 여기는 겉옷을 전당잡히고 돈을 빌리기도 하였다.

 

아울러 겉옷의 현물가치 때문에 노상강도들은 겉옷을 걸친 사람들을 약탈하는 수가 다반사였으며 심지어는 겉옷과 함께 속옷까지도 빼앗아 가는 사례가 심심찮게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저항하거나 반항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의 배후에는 불쌍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의 정신이 깃들어있다.

 

다른 사람의 아픔과 불행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유익을 위해 고난을 감내하며 자신의 가장 소중한 물건까지도 희생할 줄 아는 실천적인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사랑을 몸소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보여주셨다.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6:30]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 이것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던져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한 사랑의 정신에서 주는 것을 의미한다.

 

(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계명은 진정한 사랑의 깨달음도 없이 어리석은 맹목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시행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의도는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보상을 기대하지 말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라고 하는 것이다.

계산된 행동과 숨은 의도로서 다시 받을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것처럼 주는 것을 뜻한다.

 

잠언 기자는 이를 하나님께 꾸이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고 갈파한다.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 본절 상반절의 내용과 비슷하지만 더 강화된 표현이 사용되었다.

 

'구하는'에 비해 '가져가는'은 보다 강압적 분위기를 느끼게 하며,

'주며'보다는 '다시 달라지 말며'라는 말이 한층 사랑의 밀도를 더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강도의 폭행을 방관하라거나 절도자의 손을 제지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러한 말씀들을 하시지는 않았다.

 

다만 물질의 손실이나 이해타산에 급급한 나머지 정작 소중한 영혼에 타격을 입히지 않을까를 우려하시며, 더 적극적으로는 궁핍한 처지에 있는 자들을 헌신적으로 구제하라는 뜻으로 이 말씀들을 반복하신 것이다.

 

 

[6: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 이른바 황금률(黃金律)로서 기독교 윤리의 적극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어떤 주석은 이 황금률이 원래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랍비 힐렐(Hillel)이 이미 사용한 규범을 예수께서 사용하여 강조한 것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B.C. 5세기 후반 헬레니즘 세계에서 소피스트 운동의 결과로써 이와 유사한 교훈들이 생겨났다.

 

예컨대 유대의 저명한 랍비인 힐렐(Hillel)'네가 싫어하는 것은 타인에게도 행치 말라'고 하였고

헬라의 스토아 철인(哲人)들은 '네게 해주기를 원하지 않는 일이면 다른 사람에게도 행치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말 것을 이야기하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측면에서의 교훈을 남겼다.

 

그러나 이 같은 교훈들이 예수의 황금률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사람들의 교훈이 당시 사회의 윤리적 기초가 되었으나 그것을 적극적이며 긍정적이고 실천적 교훈으로 이끌어 올리신 분은 바로 예수이시다.

그런데 예수의 말씀 중 황금률만 따로 떼어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이 황금률을 '이웃을 사랑하며,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요컨대, 예수의 교훈은 보편 윤리적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한 차원 더 앞선 무조건적인 희생의 사랑이 담긴 데에 그 독창성과 특징이 있다.

 

 

[6: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 마태는 "무슨 상이 있으리요"(5:46)라고 말한다.

 

마태가 의미하는 ''(미스도스)은 그들 자신의 일이나 고생에 의해 얻어지는 상이 아니라 무조건적 은혜로 주어지는 상을 말한다.

 

본문의 '칭찬'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 또한 '은혜' 혹은 '선물'의 뜻으로 자주 쓰인다.

 

따라서 이는 그리스도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암시한다.

결국 이제껏 언급된 차원 높은 새 교훈들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의 은혜에 근거하여 실행되어야 함을 확인하고 있다.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은 '이에는 이, 생명에는 생명'이라는 소위 탈리오의 법칙을 율법의 정신으로 받들고 있었으나 예수는 인과응보(因果應報)적 보복의 차원을 넘은 희생과 사랑의 온전한 모랄(moral)을 제시하신 것이다.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 '죄인들도''그 죄인들 조차도'란 뜻이다. 마태는 '세리'(5:46)라고 말한다.

 

여기서 죄인이란

이방인들과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세리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리고 창기와 기타 당시에 죄인 취급을 받았던 소외된 모든 계층을 의미한다.

 

이처럼 버림받은 사람들조차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면 선택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차원 높은 사랑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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