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7일 화요일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빈자(貧者)의 축복

 

누가복음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개역개정)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곧 너희 것임으로이다'(누가복음 6:20일역)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본대도 빈자의 종교입니다.

성서가 빈자를 축복하고 부자(富者)를 책(저주)한 말은 수없이 있습니다.

구약은 두고서라도, 신약에서만 볼 때, 이것이 사실임을 압니다.

 

그 주요한 것 서 너 가지를 들면,

 

'마음이(혹은 마음으로) 가난한 자는 복이다. 천국은 곧 그 사람의 것임으로이다'(마태복음 5:3일역)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은 도리어 쉽다.'(마태복음 19:24일역)

 

'형제여, 부르심을 입은 너희를 보라. 육에 의한 지혜 있는 자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자 많지 않고, 귀한 자 많지 않다. 하나님은 지자를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자를 택하시고, 강자를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자를 택했도다'(고린도전서 1:26-27, 여기서 말하는 어리석은 자는 지식적인 빈자, 약자는 권력적인 빈자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여, 들으라. 하나님은 이 세상의 빈자를 택하여 신앙으로 부하게 하시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약속하신바 나라를 상속하는 자로 되게 하시는 것 아닌가'(야고보서 2:5일역)

 

'부자여, 너희 위에 임하려는 불행 재난을 생각하고 울며 부르짖으라. 너희 재물은 썩고, 너희의 옷을 좀먹고, 너희의 금은은 녹슬었도다. 이 녹은 증거가 되어 너희를 치고, 또 불과 같이 너희 의 살()을 먹으리라. 너희는 이 말일에 있어서도 재물을 쌓는 일을 했도다너희가 땅에 있어서 사치하고 즐기며, 도살하는 날에 있어서도 그 마음을 기쁘게 했도다'(야고보서 5:1-5일역)

 

이상은 모두 강한 말입니다.

그리고 이에 비슷한말은 구약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는 어디까지나 빈자의 편이고 부자의 적입니다.

 

그리스도가 부자에 편하고(가세하고) 빈자에 반대하는 때에,

그리스도교는 언제나 쇠해지는 것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그리스도교는 물론 빈자라고 칭해도, 나태의 결과,

빈을 자기에게 불러온 자에 대하여 동정을 표시하지 않습니다.

'손을 게을리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힘써 일하는 자의 손은 부를 얻는다'(잠언10:4일역)고 가르칩니다.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다. 빈자의 궁핍은 그 멸망이다'(잠언10:15일역)라고도 가르칩니다.

 

나태의 결과로서의 빈을 배척합니다.

근면의 결과로서의 부를 칭찬합니다.

하지만, 대체에 있어서 빈에 동정하고 부에 반대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 거역하는 부자연스런 이 사회에 있어서,

부는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 부자연스럽고 부당하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부는 그 소유자가 만든 것이 아니라,

사회 즉 다수 즉 빈자가 만든 것입니다.

 

이 죄의 세상에 있어서는,

소수의 이른 바 '운 좋은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으로서 참으로 자기의 힘으로

부를 만들어 냈다는 것은 좀처럼 없는 것입니다.

 

부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세상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 세상이라면,

빈자도 부자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에 있어서는

 

'많이 거둔 자도 남을 것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는 일없다'(고린도후서 8:15일역)

성서에 있는 것이 보통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세상에 있어서는 '남는 자''모자라는 자'가 보통입니다.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대로,

재물은 '불의의 재물'(누가복음 16:9)입니다.

 

가령 세상의 법률에는 어긋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의 목전에는 '불의의 재물'입니다.

 

부자연한 부() 도리인 분배에 의해 얻은 부인 것으로서,

결코 복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부당한 분배에 의해 얻은 부는 불행재난의 씨인 것으로서,

행복의 기본()은 아닙니다.

 

가령 세상의 율법은 이것을 벌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노는 이에 따릅니다.

 

성결해지지 못한 부와 회개하지 않은 부자는 실로 불행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자기가 구하지 않았는데 부자로 된 자가 있습니다.

부가에 태어난 자가 있습니다.

세상의 소위 행운의 사람이라고 하여,

스스로 부를 쫓지 않았는데 부가 따르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 부는 죄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죄는 아닙니다. 하지만 불행인 것은 면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은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불행입니다.

그리고 또 사람의 도리에서 생각해본대도 불행입니다.

부는 불행, 부자는 불행, 그것은 성서에 호소할 것도 없습니다.

인류의 실험(경험)이 충분히 이것을 증명합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빈자는 복입니까?

하나님의 은사의 보다 적은 분배에 참여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보다 많은 분배에 참여한 자이므로,

뒤에 그 여분을 징발(수용 requisition)될 우려가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빈자는 보다 적게 받은 자이므로,

뒤에 그 부족을 보충 받음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야고보는 말한 것입니다.

 

'부자여, 네 위에 임하려는 불행(재난)을 생각하고 울며 부르짖으라'(야고보서 5:1일역),

 

 

'(가난한) 형제여, 참고서 주의 오심을 기다리라'(야고보서 5:7일역).

 

대체에 있어서,

부자의 생애는 근심(걱정)의 생애임에 비하여 빈자의 생애는 희망의 생애입니다.

 

'빈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누가복음 4:18),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제1의 목적이었음을 알고서,

빈자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빈자의 행복은 미래에 있는 것만 아닙니다.

현재에도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의뢰합니다. 의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중심에서

 

'우리의 일용양식을 오늘도 주옵소서'(마태 6:11)하고 기도합니다.

 

그는

'너희는 하늘의 새를 보라. 심는 일없고, 거두어들이는 일을 않으며, 곳간에 쌓는 일없다. 그런데 너희 하늘의 아버지는 이것을 기르시는도다. 너희는, 이것보다 크게 지나는 자가 아닌가'(마태복음 6:26일역)라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서,

 

자기의 일처럼 느낍니다.

또 히브리서 13장에

'너희는 세상을 지나가는데 돈을 탐내는 일을 맡고, 있는 것으로서 만족해하라. 대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고, 또 너를 버리지도 않겠다고 말씀하셨음으로라. 그러므로 우리는 대담히 말할 것이다. 주 나를 돕는 분이시매 두려움 없다. 사람이 내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히브리서 13:5-6일역)

 

는 말씀을 읽고서, 그 위대한 힘을 느낍니다.

 

매일 하나님께 양육 받음의 기적을 실험(경험)할 때,

그는 천부의 실재를 의심하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행복은, 빈자가 특히 실험하는 바입니다.

 

노동의 쾌락도 또한 빈자 특유의 것입니다.

세상에 불행한 자라해도, 일하지 않는 자,

일하지 않고서 사는 사람 같은 것은 없습니다.

 

노동의 쾌락은 가장 확실한 쾌락입니다.

가령 적당한 보수가 이에 따르지 않는다 해도,

노동으로 '나는 오늘도 무엇인가 했다'는 만족이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

 

'최대의 죄악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것이 있는데,

 

실로 그대로입니다. 사람은 노동에 의해 인생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락기관은 일시의 진통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주 열심히 일하는 때에는,

사람은 누구나 소아와도 같이

이노센트(innocent 무구한 자)로 되는 것입니다.

 

빈은 긴장(조심 strain)의 생애입니다.

그리고 긴장 중에 신앙도 생기고, 사랑도 희망도 생깁니다.

(가난)은 특히 주 예수의 지상의 생애였습니다.

우리들도, 빈에 있어서 그를(예수에 대해) 깊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부한 자였으나, 너희들 위해 가난한 자로 되셨도다. 이는 너희가 그의 궁핍으로 인하여 부한 자로 되기 위함이라'(고린도후서 8:9일역)고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만이 최대의 부입니다.

그리스도 신자는 이것 이상의 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빈자는 자기의 빈을 자랑하여 부자를 조소할 것일지요?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빈은 신자에게 있어서는 보다 좋은 경우(처지)로서 감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부지에 대하여 깊은 동정을 표시하고 그가 부의 유혹하는바

되는 일없이 신앙의 행복에 들어가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1922년의 여름-86-경정택에 있었던 이 세상의 부자들에 대하여 말한 바의 것이다)

 

*내촌감삼의 (19247'성서지연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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