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2
성 경: [눅 7:3-10]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눅 7: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 마태는 '백부장이 나아와'라고 말한다.
(마 8: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반면 여기에는 백부장이 나온 것이 아니라 백부장이 유대인의 장로들을 보낸 것으로 말한다.
이것은 서로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마태는 요약적인 내용만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일어난 일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오는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유대인의 장로들을 택한 이유는 자신은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와 잘 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 '구원하시기를'(디아소세)이란 폭풍 같은 상황 속에서도 안전하게 구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에는 그 종의 생명이 몹시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곧 죽을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지금 백부장이 구원을 요청하는 것은 예수께서 죽어가는 자신의 종을 구원하여 건강하게 소생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전제로 한 것이다.
여기에 백부장의 겸손하면서도 확고한 믿음이 있다.
그는 스스로를 이방 죄인으로 여긴 터라 감히 예수께 직접 나아가 간구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음이 분명하다.
[눅 7: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의 접촉을 꺼리며 그들과의 접촉을 부정한 것으로서 간주했다.
특히나 자신의 나라를 점령하고 있는 로마인들과의 접촉은 더더욱 기피했었다.
그런데 유대 사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장로들이이 백부장에게 매우 호의적(好意的)이었다는 사실에서 유추해 보건대 이 백부장이 평소 유대인들에게 베푼 선행이 엄청났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유대인의 장로들은 자기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을 위해서 예수께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또한 예수께 가서도 간절히 간청하였다.
'간절히'란 원어상으로 보건대 서두름을 의미하는 말에서 나왔는데 시간에 쫓기는 상태에서 열렬히 무엇을 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이는 장로들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백부장의 종을 위해 시간을 다투어 예수께 열심히 간청한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장로들의 간구가 단순히 한 두 번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응답이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낸다.
[눅 7: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 그가 - 이 말은 회당을 짓는데 있어서 그가 완전히 그 자신의 재산으로 지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 당시 로마 군관들은 일반적으로 교만하고 백성을 압제하여 재물을 탈취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유대인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전하는 자료에 따르면 이 백부장은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이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 주었으며 또 유대인들에게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고 한다.
따라서 장로들은 백부장을 위해 그의 종을 살려주어도 될 만한 자격과 가치가 그에게 충분히 있음을 예수께 강조하였다.
백부장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회당을 지었는지 아니면 당시의 종교적인 관습을 따라서 지도자로서 회당을 지어 희사(喜捨)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백부장의 태도로 보아 일단의 신앙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눅 7: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 주여 - 이는 단순한 호칭의 의미보다는 전체적인 문맥을 고려할 때 신앙 고백적 측면까지 내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9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 백부장은 경건한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큰 거리낌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것을 꺼려한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비록 예수를 만나본 적이 없었지만 그의 위대하신 능력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대하신 분이 자기 집에 들어오는 것을 감당치 못할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의 겸손한 신앙심을 표현해 주는 말이다.
또한 그는 예수의 놀라운 신적 권능을 확신했기 때문에 예수께서 굳이 몸소 집을 방문해 주시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종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눅 7: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 말씀만 하사 - 이를 직역하면 '한 마디 말씀만 하시면'이다.
그는 예수의 말씀의 능력을 믿은 것이다.
백부장의 믿음은 어떤 신체적인 접촉을 한다거나 환상을 보는 따위의 외적 증거를 넘어선 것이었다.
백부장은 종으로 하여금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도록 하지도 않았고,
예수의 몸이 닿은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예수의 말씀 한 마디면 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사실 그의 믿음대로 예수는 한 마디 말씀으로써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시고,
(11-16절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풍랑을 잔잔케도 하셨다.
(8:22-25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예수의 말씀은 태초에 무(無)의 상태로부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의 말씀과 동일한 것이었다.
(창 1:1-3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1)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14)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8)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20)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21)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24)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 2절에서는 '종'(둘로스)으로 표현되었으나 여기서는 '하인'(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스'는 '아들'을 지칭하기도 함)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장로들과는 달리 백부장이 그 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그 종을 아들과 같이 여겼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백부장은 아들과 같은 하인이 죽어가는 것을 볼 수가 없어서 예수께 간절히 간청하였던 것이다.
[눅 7: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 나도 - 원문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있어서 백부장이 예수께서 말씀으로만 그 종을 치료하시리라고 생각하게 된 뚜렷한 이유를 드러낸다.
▶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 백부장은 자신의 위치를 설명함에 있어서 자신의 부하를 내세워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고 우월성을 강조할 수 있었으나 오히려 자신이 남의 수하(underauthority, NIV)에 있음을 먼저 드러내는 겸손함을 취하고 있다.
▶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 백부장은 자신의 군대 생활의 경험을 예로 들어 실제적으로 설명한다.
그는 지금까지 명령만 하면 자신이 직접 행동하지 않아도 그 명령에 따라 원하는 것이 그대로 실행되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따라서 그는 예수께서도 어떤 권위로 말씀만하시면 그것이 능히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어쩌면 이 백부장은 유대교에 익숙하였던 관계로, 하나님의 명령에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순종했던 천군 천사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 말을 하였는지 모른다.
(왕하 6: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시 34:7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68:17 하나님의 병거는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 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마 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어쨌든 군대의 상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신적권위를 가진 예수와 연약한 인생인 자신이 영적상하 관계에 있음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으며,
권위 아래에 있는 자신이 그 수하 사람들을 복종케 할 수 있다면 하물며 신적 권세를 가진 예수께서 못하실 일이 없으리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실제로 예수는 하늘과 땅에 속한 권세를 지닌 주권자이시다.
(요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눅 7: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 예수께서 이상히 여기신 것은 오직 두 번 기록되었는데 한 번은 믿음이 있음을 보신 후였고, 또 한 번은 믿음이 없음을 보신 후였다.
(막 6: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예수께서 기이히 여기실 정도로 백부장의 믿음이 위대했던 것은
앞에서도 지적되었다시피 다음 세 가지 사실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1) 그의 겸손함(humility)이다.
(2) 예수의 말씀의 권능을 확신한 사실이다.
이와 유사한 예는 요 4:50에서도 발견된다.
(요 4: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3)예수의 신적인 신분에 관한 남다른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그의 겸손함이나 말씀의 권능 확신 등에 대한 기본적인 근거라 할 수 있다.
▶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 이 말은 이스라엘에 대한 비탄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미 믿음을 찾으셨기 때문이다.
(5: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마 8:2-3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께서 놀라신 것은 그가 비록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능가하는 위대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선민들조차 갖지 못한 귀한 믿음을 이방인 백부장이 지녔던 사실을 한층 강조해 준다.
[눅 7: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 마태는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마 8:13)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한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다만 보냄을 받았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종이 이미 건강해진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는 치료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짐으로 말미암아 그 종이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를 정도로 심각했던 중풍병으로 부터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상인처럼 기력을 완전히 회복하였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이적적 치료 행위를 통해서 예수의 메시야성은 밝히 드러났으며 아울러 예수의 사역은 유대인 중심에서 이방인을 향하는데 까지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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