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에 대한 교훈
성 경: [눅 6:39-42]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눅 6: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 비유로 말씀하시되 - 누가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기록을 일상생활에서 비롯된 네 가지 짧은 비유로 끝맺는다.
주께서 이러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는 지금까지 말씀하신 내용들을 무리들에게 효과적으로 인식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든지, 그의 말을 듣기 위해 군중들에게 설교하든지,
서기관 및 바리새파 사람들과 논쟁하든지 간에 비유를 자주 사용하셨다.
그런데 예수의 메시지를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비유가 사태의 본질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진리를 모호하게 하는 수수께끼 같은 내용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나 정직하고 착한 심령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수수께끼조차 환영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들이 A.D. 20-30년대 팔레스틴 변방의 생활환경을 잘 밝혀준다는 사실이다.
비유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던 까닭 중 일부는 청중이 그 비유 속에 묘사되어 있는 상황에 이미 익숙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본장에 나타난 비유들에서 청중들은 모두 동전 하나를 잃는 일이 어떻게 집을 발칵 뒤집어 놓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15:8-10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또한 그들은 먼 나라로 자기의 행운을 찾아 떠난 방탕한 아들을 머리 속에 그릴 수 있었다.
(15:11-32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그리고 당시 여리고 도로의 위험은 그 소문이 자자했다.
(10:30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 이 구절은 팔레스틴의 지형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곳의 땅들은 바위들이 많고, 많이 패여서 소경이 안전하게 보행을 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길을 소경이 또 다른 소경을 인도한다면 어찌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 소경이 영적 소경을 인도하고 지도한다면 인도한 자는 물론 인도함을 받은 자까지 영혼의 멸망을 당하게 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소경은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가리킨다.
이들은 빛 되신 예수를 반대하였고, 빛보다 어두움을 택하였으며,
보지 못하면서도 교만하게 본다고 말하였다.
(요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9:40-41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그리고 그들은 제자를 얻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지만 결국에는 그 제자를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들고 말았다.(마 23:15)
[눅 6: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 마태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마10:24)라는 구절을 추가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말이, 핍박의 상황을 묘사하는 문맥에서 사용되어, 제자들에게 닥칠 핍박이 예수께 닥친 것보다 더 심할 수 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해 언급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앞 절에서 둘 다 구덩이에 빠진 소경들이 바리새인들을 가르킨 것이라면 지금 이 구절에서도 그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소경인 제자는 소경인 선생보다 못할 것이고 바리새인들의 지도와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은 여전히 그 거짓된 교훈의 틀에 속박 당하고 말 뿐이라는 의미이다.
▶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그 선생의 가르침을 온전히 좇게 된다면 그 선생과 똑같은 바리새인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이면에는 예수의 다른 의도,
즉 '나를 따르는 제자들은 이 사람보다는 달라야 하지 않겠느냐, 나의 제자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가르침을 통하여 온전케 되어 나와 같이 되라'는 권고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생들 중에 그 누구도 예수의 수준에까지 이를 수는 없을지라도,
성도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범사에 자라가야 한다.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골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눅 6:41-42]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이 두 구절은 39, 40절과 연결되어 잘못된 선생들의 과오를 지적하는 말이다.
'티'와 '들보'는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인간성의 모습을 나타낸 말이다.
'티'(카르포스)는 원래 '조각'이란 뜻인데 조그마한 나무조각, 즉 '나무 부스러기'를 가리킨다.
이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가지셨던 목수 일을 연상케 하는 말이다.
그리고 들보는 건물의 서까래로 쓰기에 적절한 무거운 목재를 가리킨다.
자신이 저지른 커다란 범죄에도 불구하고 형제의 생활 속에서 나타난 조그마한 실수나 잘못을 비판하는 거짓 선생들의 위선적인 행동을 예수께서 작은 나무 부스러기와 커다란 들보의 관계로 말씀하고 계신다.
사람은 대개 다른 이의 잘못에 관심이 많으며 그것을 비난하고 흉봄으로써 쾌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그리고 한 단체의 개선이나 개혁을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의 개혁이 수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허물을 냉철히 돌아보는 일에는 인색하다.
그래서 서로가 상대방을 비방하고 정죄함으로써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특히 당시 바리새인들의 심각성은 그들 속에 들보가 박혀 있으면서도 전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에 있다.
진정한 개선이나 회개는 자신의 처한 형편을 직시하는 데서 비롯되거니와
그들은 위선과 외식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하나님의 신령한 계시의 빛이 뚫고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 어찌하여(포스) - 이는 부정적인 답변을 기대하는 의문사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자신의 눈 속에는 들보,
즉 온갖 위선과 죄악들이 가득하기 때문에
형제의 조그마한 실수나 허물을 정죄하고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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