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8일 수요일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천국민과 그 율법 2

 

누가복음 636-49: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49)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예수는 천국민의 율법을 말씀하신 후 이것을 한마디로 총괄하여 말씀하셨다.

'이러므로,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또한 너희도 자비를 베풀라'(누가복음 6:36일역).

이는 그리스도교 도덕의 진수이다.

크리스천의 도덕의 표준은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대우하신 것같이 사람을 대우하는 것이 그의 도덕이다.

 

특히 아버지의 자비(긍휼)하심 같이 또 자비(긍휼)를 베풀라고 하는 것으로,

천국민의 모든 율법은 총괄되는 것이다.

 

도덕의 표준을 완전한 하나님께 두도록 하라.

결코 그것 이하를 목표로 하지 말라고.

이는 실로 높은 도덕이다.

세상에 어디에 또 그와 같은 교훈이 있는가?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라고 하지만도 결국 여기에는 이르지 못했다.

사람의 도덕은 여기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다시 이것을 실행함의 길을 예비하신다.

 

그에게 의지하여 이 귀한 이상의 실현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인류의 영예는 이 지고(至高) 지존(至尊)의 도덕을 부여받은 데 있다.

인생의 의의는 이것의 실행을 기대하는데 있다.

 

말씀 마시라. '인간이어서 할 수 없다'.

 

그러한 구실은 크리스천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변해도 못되는 것이다.

그는 맥연 하나님의 완전을 목표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또한 자비를 베푸는 일,

이는 그의 최대의 야심(대망 ambition)이다.

 

산상의 수훈은 여기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한 것이다.

만약 이때의 청중으로서, 12사도 기타 그의 진실한 제자뿐이라면,

예수의 교훈은 여기서 일단 종결을 고했으리라.

하지만 그의 안()전에는 아직 허다한 사람들이 있었다.

비평안으로써 냉연(냉담)히 그를 지켜보는 학자, 바리새의 무리도 있었다.

 

또 그의 가르치심을 깨닫는 일 천박하여

이것을 그 중심(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거짓된 제자들도 있었다.

 

예수는 이제 그들에게 주목하여 다시 얼마 그 제자에 대한 경계를 부인함과 함께,

또 직접 그들에 대해서도 일언하기를 원하셨다.

여기서일지, 그의 말은 저조를 띠면서 그는 좀 다른 방면의 교훈을 주셨던 것이다.

 

'사람을 헤아리지(심판하지) 말라'(37일역)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 이때 그 안전에 저립(佇立)한 바리새인에게 주목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바리새인처럼 사람을 헤아리지 말라.'.

 

이것은 그의(진의)이다.

그는 절대로 사람을 헤아리는(심판하는) 일없기를 요구하신 것은 아니다.

 

일이 만약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것일까,

혹은 형제의 구원에 관한 것일까,

이것을 묵과할 수는 없다.

 

어떠한 것의 재판은 이것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때 심판(재판)하는 자의 고통은 실은 심판 받는 자의 이상이다.

그는 어버이가 자식을 책망하는 쓰라림을 참아가면서, 하는 수 없이 이것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는 전연 이것과 반대였다.

그들은 타인의 흠점의 폭로로서 괘사로 삼는 것이다.

타인의 죄악의 가책을 열락으로 삼는 것이다.

헤아리는 일(심판 하는 일), 죄를 정하는 일, 이는 그들의 기호()였다.

 

그래 예수는 이 정신을 자국에서 근절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일언을 부가하여 그 제자를 경계하신 것이다.

 

'너희는 바리새인 같이 사람을 헤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 교훈의 가치는 오늘에 이르러서도 조금도 변함없다.

바리새의 정신은 또한 교회의 정신이다.

교회의 오랜 역사와 그 현상이 명백하게 이 사실을 증명한다.

 

우리들 천국민인 자는 바리새 또는 교회를 본받아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타인의 죄를 보는 때,

어떻게 하면 이를 면하게 할 수 있을 것인지,

어떻게 해서 이를 가볍게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법정에 있어서의 검사의 입장을 바리새 또는 교회의 태도라고 하면,

우리들의 태도는 실로 변호사의 입장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결코 최후의 심판 날에 있어서

자기가 같은 관대의 처치를 받기 위해서는 아니다.

최후의 심판의 경감은 목적이 아니라 결과이다.

사람을 헤아리지 않고 죄 벌하지 않고서 사하는 자는

또한 반드시 헤아림을 받지 않고 정죄 하지 않고서 용서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예수는, 비평가인 학자, 바리새인에 대하여 일격을 가하셨다.

'또 이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39)

 

'그들'이란 즉 이들(바리새 기타)을 말함이다.

이것을 알 때, 이하의 교훈의 의미는 명료하다.

 

'맹인이 맹인의 인도를 할 수 있는가'(39일역)

 

스스로 맹목이면서, 어찌 감히 사람의 스승 되려 하는가?

'제자는 그 스승보다 못하다. 무릇 다 갖춘 자(다 배우고 난자)는 그 스승처럼 될 것이다.'(40일역)

 

후반을 개역하여

 

'그들이 다한(배운) ()에는 그 스승처럼 될 것이다.‘라고 읽을 필요가 있다.

 

바리새의 제자는 역시 바리새이다.

졸업하면 선생 같이 악한 자가 된다. 다른 곳에 있어서

'아아 화 있을진저, 위선 된 학자와 바리새인아. 너희가 널리 수륙을 두루 다니면서, 한 사람이라도 자기 종지에 끌어들이려 하는 도다. 이미 끌어들이면, 이것을 너희보다도 배나 되는 지옥의 자식을 만드는도다'(마태복음 23:15일역)고 있음과 동의이다.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보면서 네 눈에 있는 들보를 알지 못함은 어찜인가'(41일역)

너희가 선생 태도로 사사로운 소 도덕을 사람에게 강요하면 서도,

자기의 내심에는 악독, 포흔을 간직하고,

결국 자기 구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책살(crucifixion)하려는 흉념(흉악심)마저 가지고 있지 않는가.

 

'대저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은 좋은 나무가 아니다'(43일역)

 

너희의 제자를 보면, 선생인 너희의 가치를 알기에 족하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악한 곳간에서 악을 낸다'(45일역)

 

악한 마음의 교사의 말에 진리 없는 것 아니라 해도,

 

'마치 죽은 파리가 향기로운 기름으로 악취를 나게 하듯'(전도서 10:1일역)

 

악념(악심) 다만 일언으로 나타나 곧 전 교훈을 파괴해 버린다.

이것을 요약하건대, 바리새인의 과오는 스스로 스승 되려고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예수는 또 어떤 때 경계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는 랍비(선생)의 칭호를 받지 말라. 대저 너희의 선생은 한 분 곧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모두 형제이다'(마태복음 23:8일역)

 

따라서 성서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가 아니고서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없다.

다만 '권고'를 할 뿐.

 

형제여, 나도 또한 같은 경험을 가지매,

이렇게 하라고 말하면서 권하는 것이다.

 

'주 말씀 하셨다'고 하여, 주로 하여금 가르치게 하는 것이다.

천국의 백성 사이에는 세상의 이른 바(소위) 스승이라는 것은 있어서 안 되는 것이다.

먼저 제자를 가르치시고, 다음으로 적인 바리새를 경계하시고,

이제 또 화제를 일전하여 거짓 제자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신다.

즉 예수의 말씀을 얕게 두뇌에 있어서 알고 충심(진심)으로 이것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다.

 

'너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않고서, 어찌 나를 주여 주여 부르는가'(46일역)

오히려

 

'너희, 어찌하여 나를 주여 주여 하고 부르고 내 말하는 바를 행치 않는가'로 역() 하는 것이 옳다.

 

그는 그의 말을 듣고서 이것을 행하는 자와 행치 않는 자와를 2종의 건축에 비유하셨다.

 

'집을 세우는데, 땅을 깊이 파고 기초를 반석 위에 놓는'자는

 

'홍수 때, 물살이 그 집을 쳐도 요동케 할 수 없다'(48). (그러나 이와 달리)

 

'기초 없이 집을 땅 위에 세우는'(49)자는

 

'물살이 이것을 치는 때 그 집이 곧 무너지고, 그 무너짐이 또한 대단한 것이다'(49)

 

그가(예수께서) 이때 서서 말씀하신 그 장소가 바로 그러한 토지였으리라.

갈릴리 호반의 사구(dune) 조금만 파고 들어가면,

견고한 바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하지 않고서 사상에 집을 세우는 사람 많고,

호상 갑자기 바람 설레고, 파고가 치밀어 올라오는 때,

폭우 곧 홍수를 일으키며, 물살이 쳐 오면 곧 전복 파괴되었던 것이리라.

 

그의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자란,

듣고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모르며,

다만 두뇌로서 교훈을 아는데 지나지 않는 사람이다.

 

그 적절한 실례는 오늘날의 학생의 신앙이다.

그들이라 해도,

귀로 듣는 바를 손으로 실행한다는 천박한 의미에 있어서 행하는 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서에 있어서의 '행함'의 관념은 아주 심원하다.

깊이 알고 깊이 이것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경우에 있어서,

예수께서 특히 '내 말을 듣고 행한다'고 한 것은,

 

산상 수훈의 절정인

 

'네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또 자비를 베풀라'(36일역)는 한 말씀(일언)을 지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

그것이 참된 행함이다.

 

가령 예수의 가르치심에 대하여 그것이 아무리 맑고 귀하고 아름다운 것임을 느끼고

이에 동경한다 해도,

만약 하나님의 사랑 같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인가,

그 사람의 신앙의 전도는 알만한 것이다.

 

'홍수 때, 물살이 이것을 치면, 그 집은 곧 무너진다'.

 

홍수 때란 결국 최후의 심판 날을 말함이리라.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거의 이 세상에 있어서 이미 신앙을 버리는 것이다.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자비를 행하는 일,

이는 최대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타인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자비를 가지는가에 의해

자기의 신앙을 시험할 수가 있다.

 

의사는 환자의 심장을 소홀히 하고서 질병의 치료를 꾀(도모)할 수는 없다.

신자의 심장은 여기에 있다.

 

복음을 영(신령)의 근저에 있어서 맛본 자는,

이 근본의 사랑과 자비(긍휼)를 지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325, 등정무필기)

 

*내촌감삼의 (19175'성서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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